육환장(六鐶杖)의 비밀

옛날에는 사람이 먼 길을 갈 때 지팡이를 짚고 길을 가는 수가 많았다. 요즈음이야 교통수단이 좋아 먼 길을 걸어가는 경우가 별로 없으니 지팡이를 사용하는 것이 그만큼 줄어들었다 하겠지만, 그래도 등산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개량된 스틱이 있고 나이 많은 분들이 출행할 때 곧잘 지니고 다니는 나무 지팡이가 아직도 많이 쓰인다. 행인의 말없는 벗이 되어 주는 이 지팡이가 상징하는 의미는 더 크다. 민중의 지팡이란 말도 있고 사람이 의지할 힘이 되어 주는 것을 지팡이기 되어 준다고 말하기도 한다. 지팡이는 사람에게 필요한 매우 고마운 것이다. 지팡이 없는 인생을 생각한다면 더없이 쓸쓸한 느낌만 더욱 배가 될 것이다.

지팡이의 한자말은 석장(錫杖)이다. 특히 이 말은 불가에서 많이 써 온 말이다. 스님들이 만행을 할 때 석장을 짚고 다닌 것은 오래된 풍습이었다. 이 석장이 좀 특별하게 만들어진 것에 육환장(六鐶杖)이라는 것이 있었다. 지팡이 머리에 여섯 개의 고리가 달려 있다 해서 육환장이라 부른다. 보통 기다란 막대기에 위의 머리 부분은 주석으로 만들고 그 위에 여섯 개의 고리를 달며 밑의 땅에 닿는 부분인 아래는 동물의 어금니나 뼈를 붙이거나 금속을 박아 뾰족하고 단단하게 만든다. 납자들이 운수행각을 할 때도 이 육환장을 들고 천하의 산과 강을 돌아다니기도 하였지만, 본래 이 육환장은 보살의 육도만행을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육환장을 짚고 길을 가면 고리가 흔들려 짤랑짤랑 소리가 난다. 이 소리를 듣고 벌레나 작은 짐승들이 사람의 행차를 알고 미리 피하여 밟히거나 다치지 않도록 하는, 살생을 방지하고 자비를 베푸는 의미가 있다. 산길을 갈 때는 육환장에 의지하여 걸음을 수월하게 하며 때로는 나이 많은 노인을 만났을 때는 이 육환장을 주어 잡게 해서 부축해 주기도 한다.

부처님이 사용했던 석장에 대한 기록도 문헌에 전해진다. 현장의『대당서역기』에는 여래가 사용했던 석장은 전단향 나무로 대를 만들고 백철로 고리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의정삼장이 지은『남해기귀내법전』에도 인도의 스님들이 석장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머리 부분에 2~3치 가량의 철권(鐵捲)이 있고, 아래는 촉이 있으며 나무로 된 장대로 사람의 어깨 높이에 해당되는 길이를 가졌다고 말했다. 또『삼국유사』에는 양지(良志)라는 스님이 조각을 잘 했는데 석장을 만들어 거기에 자루를 매달아 허공에 던져 이 석장이 신도의 집 문 앞에 날아가 짤랑거리는 소리를 내면 신도가 시주물을 자루에 넣어 주면 석장이 다시 날아 양지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는 양지가 육환장을 이용하여 신통을 부렸다는 이야기이다.

육환장의 여섯 개 고리가 무엇을 상징하는가 하면 중생이 윤회하고 있는 육도를 의미한다. 인간세상과 천상, 아수라, 지옥, 아귀, 축생의 여섯 세계를 상징하기 위하여 여섯 개의 고리를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고리가 흔들려 소리를 내는 것은 일체 중생들에게 어서 윤회를 벗어나자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윤회를 벗어나는 것은 생사의 고통을 벗어나는 것이다. “살다가 죽는 존재들이여, 살다가 죽는 이 운명을 우리 다 같이 벗어나 버리자.” 육환장의 방울이 울리는 소리가 이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원초적인 비극을 가지고 있다. 매우 역설적이고 억지스러운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 근원적으로 잘못된 것은 나쁜 업을 짓는 중생이 이 세상에 자꾸 태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마치 신종 인플렌자와 같이 이 세상에 새로운 병균이 생기는 것과 같은 것이고 또 신체 장애자가 태어날 때부터 신체 불구의 몸으로 태어나 평생을 정상적인 신체 활동을 못하는 슬픔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효 스님은 외쳤다. “태어나지를 마시오. 죽는 것이 괴로움입니다. 죽지를 마시오. 태어나는 것이 괴로움입니다.”(莫生兮也 其死也苦 莫死兮也 其生也苦)

불교의 근본을 생사해탈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바로 불교의 목적이기도 한 것이다. 부다가의 보리수 아래서 정각을 이룬 부처님이 이렇게 독백을 하는 장면이 아함경에 나온다. “나는 다시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을 자신이 있다.” 이 말을 ‘나는 해탈자’ 라는 말은 달리 표현한 것이다.

육환장의 고리는 육도의 고리다. 고리를 물고 사는 사슬이 먹이사슬처럼 생사의 주기 속에 매여져 있는 것이다. 때로는 우리는 사슬 속에서 묶여 산다는 자신에 대한 자각도 해 보아야 한다. 이 자각을 일깨우는 진언이 하나 있다.『천수경』에 나오는 ‘육자대명왕진언’ 이라는 것이 있다. 관세음보살의 본심미묘진언이라 하기도 하는 이 진언은 육도를 벗어나기 위한 염원을 하는 진언이다. ‘옴마니반메훔’이라는 여섯 글자로 되어 있는 이 진언은 한 글자가 육도의 한 도를 뜻한다. ‘옴’은 천상, 마는 아수라, ‘니’는 인간, ‘반’은 축생, ‘메’는 아귀, ‘훔’은 지옥과 관련이 있다. 물론 어원의 뜻을 풀이하면 그 의미는 또 다르게 나온다.

‘옴’은 감탄사로 ‘아!’의 뜻이고 ‘마니’는 여의주와 같은 보배 구슬이다. ‘반메’는 연꽃인데 연화수보살을 가리킨다. ‘훔’은 조음소로 그냥 들어간 말이다. 전체의 뜻을 연결시켜 보면 “아! 연꽃 같은 보배구슬이여,” 혹은 “아! 연꽃 같은 성자의 품에 안기고 싶나이다.”이다. 여섯 글자가 각각 색깔을 나타내기도 한다. 천상을 뜻하는 ‘옴’자는 백색을, 아수라의 ‘마’자는 청색을, 인간의 ‘니’자는 황생을, 축생의 ‘반’자는 녹색을, 아귀의 ‘메’자는 홍색을, 지옥의 ‘훔’자는 흑색을 나타낸다고 한다. 따라서 이 진언은 육환장의 육도를 상징하는 여섯 고리를 진 ‘옴마니반메훔’의 육자진언으로 대입하여 생각할 수 있다. 아! 연꽃 같은 보배 구슬이여, 나의 윤회는 언제 끝나는 것입니까? 유유히 흐르는 윤회의 강물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자문해 보고 싶은 사색의 계절 가을이 깊어간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09년 10월 107호

우리시대의 우상

월드컵 축구 열풍이 온 세계를 달구고 있다. 참으로 열광적인 사람들의 함성이 실제 경기장이 아닌 곳곳의 거리에 있는 광장에서도 터져 나오고 있다. 누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거리에 나오게 했는가? 지구촌의 축제가 어디 한 두 가지뿐이리오 마는 최대의 응원인파를 모이게 하는 것은 역시 월드컵 축구인 것 같다. 지난 2002년도에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개최된 월드컵 축구 경기 때부터 나타난 특이한 현상은 수많은 군중이 광장에 모여 응원전을 펼치며 ‘대한민국’ 하고 국호를 외치며 승리를 기원하는 새로운 응원문화가 생겨 세계를 놀라게 했다는 점이다. 가히 놀라운 열정을 보이면서 응원의 함성이 나라 안팎을 울렸던 것이다. 지금도 독일에서 열리는 월드컵의 열풍은 세계를 풍미하고 있다. ‘붉은 악마들’을 위시해 경기장을 찾아간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국내의 거리 응원전에 모이는 인파도 바다를 이룰 정도가 되어 경기 때마다 응원의 함성이 하늘을 울린다.

생각해 보면 응원이라는 이름 아래 너나없이 함께 모여 신명나게 구호를 외치며 심지어 밤을 새게까지 하는 이러한 자발적 행사는 어디에도 없을 것 같다. 다 같이 목청을 높여 외쳐대는 저 장엄한 합창은 어떤 명연설보다 뛰어난 애국의 웅변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며, 마치 힘을 합쳐 애국가를 부르는 국민의 가장 우렁찬 목소리라 할 수 있겠다.

간간히 TV를 통해 경기장면과 응원 장면을 보아온 나는 왜 스포츠 경기 하나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저렇게 열광 하는가 생각해 보았다. 단순히 일상의 피로에 젖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라고만 할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그러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군중 심리에 휩싸여 무언가 외쳐보고 싶은 충동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한 사람 모이는 장소에 끼어들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사람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어떤 정황의 배경에 의해서 시대문화는 언제나 새롭게 등장하는 것이다. 이 시대 우리가 겪고 있는 삶의 애환은 풀리지 않는 카타르시스의 후유증에 의해 무언지 모르게 답답해져 가는 억압심리가 사람 가슴을 화석화 시키고 있다. 어딘가 뛰쳐나가고 싶은 돌파심리도 가슴 깊이 도사리고 있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무거워진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 언제나 이상적인 동경의 세계를 꿈꾸며 사는 인간은 환상의 꿈이 현실에 부딪쳐 깨어지는 좌절의 아픔도 자주 맛본다. 하지만 순간의 낙천을 누리고 자신의 기분을 최대로 살려 줄 어떤 매개체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하다. 다시 말하면 어떤 우상을 갖고 그것에 의해 자기만족의 카타르시스 해소를 원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우상은 윤리적 도덕적 구속을 싫어한다. 철학적이거나 사변적인 사색이나 이론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현대의 우상은 우선 내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고 유행처럼 많은 사람의 관심의 대상이 되며 인기가 있는 것이라야 한다.

베이컨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우상을 말했다. 종족의 우상에서 동굴의 우상 그리고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을 이야기 했다. 이러한 우상들을 가지고 역사를 따라 내려왔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우상은 과거의 우상을 바꿔버렸다. 스포츠가 하나의 우상이 되었고 인기 있는 연예인이 또한 우상이 되는 시대다. 이른바 스타플레이어 한 사람이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의 관심이 되고 인기가 높아진다. 현대의 우상은 다분히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모드로 변해간다. 종교적 우상이 대중의 관심을 끄는 도수는 점점 낮아지고 있다.

그러나 한편 우상은 불충분한 자신에 대한 호도(糊塗)심리에서 출발하는 경향이 있다. 우상에 빠지는 것은 이성적 판단과 건전한 지혜를 상실할 위험이 있는 것이라고 심리학자들은 말하기도 한다. 스스로 우상이 되어 인기를 한 몸에 누리고 많은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실제로 우상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상은 남의 관심과 지지에 의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상은 지극히 주관적인 개인의 선호도에 따라 일어나므로 공정한 객관적 가치를 보장받는 것은 아니다. 다분히 감정적인 일방적 선호에 의해 군중이 한데 어울리는 일종의 피플파워(people power) 현상이 문화적 가치로 상승하기 위해서는 인간적 우호의 성숙도가 있어야 한다. 어떤 면에서 승패를 다투는 편 가르기의 일방적 응원이 스롯머신을 움직이는 도박적인 근성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란 말이다. 스포츠에 있어서 승패는 게임 구성의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다.

16강의 좌절된 한국 축구의 불운이 다시 우상이 되어 국민적 사랑을 지속적으로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더 나은 실력 연마가 있어야 할 것이다. 다만 승부의 근성으로 사는 세상의 역학적 구조가 패배를 무시하는 오도된 선입관을 유발하지만 패배에도 아름다움은 있는 법이다. 때로는 이겼다고 우쭐거리는 마음보다 지고 겸손해 지는 마음이 더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6년 7월 제68호

옴 살바 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

불교신행의 한 방법에 주력(呪力)이라 하는 것이 있다. 주술적인 힘을 의지하여 마음의 영성(靈性)을 밝혀 깨달음에 이르는 신비한 공부법이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는 비밀스러운 가르침이라는 밀교(密敎)의 수행법이라고 하면서 이를 의지하여 본격적으로 수행하는 종파들 이름에 총지종, 진언종, 심인종 등의 이름이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 밀교도 대승불교의 한 전통으로 내려왔으며 티베트의 불교가 밀교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원래 종교 신앙에 있어서 기도를 하여 소원을 빌고 복을 비는 것은 원시적이자 원형적인 인간 심리라 할 수 있는 모습이다. 어떤 초자연적인 힘이 있어 불가항력적인 어려움을 해결해 줄 것이라 믿는다. 이 때 부처님 등 숭배의 대상에 간절한 믿음을 가지고 초자연적인 위신력을 구하여 자신이 보호되고 또 어떤 이익이 오게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 주력신행의 요지이다.

이 주력을 할 때 외는 말을 진언(眞言)이라고 부른다. 이는 가슴 속에 있는 가장 진실한 것을 말한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사실 사람의 가슴 속에는 누구에게나 자기 진언이 숨어 있다. 무엇인가 절절히 가슴에 맺혀 있는 비원 같은 것이 숨어 있다. 때로는 자기 생명의 불꽃을 연소시키고픈 지극한 원이 남아 있어 이것 때문에 내가 살고 있다고 생각될 때도 있다. 선(禪)의 이치에서 말할 때는 우리 마음 자체가 진언이 된다. 내 마음이 내 진언이라는 말이다. 때문에 마음 없는 중생이 없는 것처럼 진언 없는 중생이 있을 수 없다.

절에서 불공이나 기를 드릴 때 필수적으로 독송하는 경전을 『천수경』이라 한다. 이 경은 기도의례용 경으로 여기에는 여러 가지 진언이 나온다. 중요한 진언이 ‘신묘장구대다라니’라는 긴 진언이지만 그 외에 짧은 진언이 8개가 들어 있다. 제일 처음 나오는 ‘정구업진언’에서부터 ‘준제진언’에 이르기까지 여러 진언이 나오는데 이 가운데 ‘참회진언’이라고 이름을 붙여 놓은 진언이 있다. ‘옴 살바 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라는 범어를 음독(音讀)하는 이 진언은 스님들이나 신도들이 계를 받을 때 반드시 독송하는 진언이기도 하다. 이 진언은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는, 이름그대로 참회하는 진언이다.

나는 한 때 출가하여 스님이 되고부터 이 진언을 무던히 외운 적이 있다. 그것은 세속의 인연에서 지은 불효의 죄를 참회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나 때문에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고, 속가 형도 내가 도와주지 못하여 일찍 죽었다고 생각하고 윤리적 죄책감을 많이 지고 살아왔다. 그 뿐만 아니라 남에게 은혜지고도 갚지 못할 때도 죄책감을 느낀다. 그래서 매일 기도시간마다 이 참회진언을 외웠다. 소리 내어 외는 것은 물론 속으로 늘 이 진언을 중얼거리며 살다시피 하였다. 지금도 나는 미안한 일이 생길 때마다 이 진언을 곧잘 읊조린다. 정말 내가 지은 죄업이 어느 정도 인지 모르지만 나는 이 진언으로 내 모든 죄업을 소멸하고 싶다.

공자는 사람의 수신(修身)을 위하여 ‘일일삼성(一日三省)’이라는 말을 『논어』에 남겨 하루에 세 번씩 자신을 반성하라고 하였다. 반성이 없는 생활은 도덕이 무너지는 무서운 결과가 야기되어 개인은 물론 사회가 함께 불행의 도가니에 빠지는 결과가 야기된다. 진정한 마음으로 반성하여 참회할 때 선근과 공덕이 키워지며, 자기 이익과 행복을 보장 받는 법이다.

축구 경기장이니 야구 경기장의 스탠드에 수많은 관중이 모여 경기를 지켜보며 응원을 하기도 하고, 경기 자체를 즐기기도 하듯이 나는 가끔 산중절간에 앉아 뉴스를 듣고 신문을 보며 세상 돌아가는 것을 관중석의 구경꾼처럼 구경을 하고 있다. 그런데 요즈음 와서 느끼는 것 하나가 우리사회가 반성을 모르고 사는 것 같은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많다. 각종 비리에 연루된 소식들이나 부정부패에 관련된 소식을 들으면 그러한 사건이 터진 것도 답답한 일이지만 사건 주변의 연관된 사람들의 반성 없는 행동에 더 실망을 금치 못한다. 우리 사회가 반성이 실종된 사회가 되었는가? 연일 떠들썩했던 불교계의 부끄러운 사건소식도 그렇거니와 정치계 등 사회지도층의 오염된 모습 또한 반성이 없는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다. 작금의 사건 소식들로 매스컴의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기분 나빠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정말 참회진언이라도 외우도록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잘못이 있건 없건 우리 모두 참회의 진언 합창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참회진언은 깨달은 지혜를 빨리 얻게 해 달라는 어원의 뜻이 들어 있는 말이다. 어서 깨달은 지혜를 얻어 영광이 있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깨달은 마음은 반성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개인의 문제를 반성하여 고치고, 사회적 문제도 반성을 통하여 개선되어 향상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영광스러워질 수 있다.

아! 일체의 지혜를 깨달은 중생들이여, 영광이 있으소서. ‘옴살바 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11월 제8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