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우상

월드컵 축구 열풍이 온 세계를 달구고 있다. 참으로 열광적인 사람들의 함성이 실제 경기장이 아닌 곳곳의 거리에 있는 광장에서도 터져 나오고 있다. 누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거리에 나오게 했는가? 지구촌의 축제가 어디 한 두 가지뿐이리오 마는 최대의 응원인파를 모이게 하는 것은 역시 월드컵 축구인 것 같다. 지난 2002년도에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개최된 월드컵 축구 경기 때부터 나타난 특이한 현상은 수많은 군중이 광장에 모여 응원전을 펼치며 ‘대한민국’ 하고 국호를 외치며 승리를 기원하는 새로운 응원문화가 생겨 세계를 놀라게 했다는 점이다. 가히 놀라운 열정을 보이면서 응원의 함성이 나라 안팎을 울렸던 것이다. 지금도 독일에서 열리는 월드컵의 열풍은 세계를 풍미하고 있다. ‘붉은 악마들’을 위시해 경기장을 찾아간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국내의 거리 응원전에 모이는 인파도 바다를 이룰 정도가 되어 경기 때마다 응원의 함성이 하늘을 울린다.

생각해 보면 응원이라는 이름 아래 너나없이 함께 모여 신명나게 구호를 외치며 심지어 밤을 새게까지 하는 이러한 자발적 행사는 어디에도 없을 것 같다. 다 같이 목청을 높여 외쳐대는 저 장엄한 합창은 어떤 명연설보다 뛰어난 애국의 웅변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며, 마치 힘을 합쳐 애국가를 부르는 국민의 가장 우렁찬 목소리라 할 수 있겠다.

간간히 TV를 통해 경기장면과 응원 장면을 보아온 나는 왜 스포츠 경기 하나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저렇게 열광 하는가 생각해 보았다. 단순히 일상의 피로에 젖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라고만 할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그러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군중 심리에 휩싸여 무언가 외쳐보고 싶은 충동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한 사람 모이는 장소에 끼어들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사람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어떤 정황의 배경에 의해서 시대문화는 언제나 새롭게 등장하는 것이다. 이 시대 우리가 겪고 있는 삶의 애환은 풀리지 않는 카타르시스의 후유증에 의해 무언지 모르게 답답해져 가는 억압심리가 사람 가슴을 화석화 시키고 있다. 어딘가 뛰쳐나가고 싶은 돌파심리도 가슴 깊이 도사리고 있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무거워진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 언제나 이상적인 동경의 세계를 꿈꾸며 사는 인간은 환상의 꿈이 현실에 부딪쳐 깨어지는 좌절의 아픔도 자주 맛본다. 하지만 순간의 낙천을 누리고 자신의 기분을 최대로 살려 줄 어떤 매개체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하다. 다시 말하면 어떤 우상을 갖고 그것에 의해 자기만족의 카타르시스 해소를 원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우상은 윤리적 도덕적 구속을 싫어한다. 철학적이거나 사변적인 사색이나 이론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현대의 우상은 우선 내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고 유행처럼 많은 사람의 관심의 대상이 되며 인기가 있는 것이라야 한다.

베이컨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우상을 말했다. 종족의 우상에서 동굴의 우상 그리고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을 이야기 했다. 이러한 우상들을 가지고 역사를 따라 내려왔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우상은 과거의 우상을 바꿔버렸다. 스포츠가 하나의 우상이 되었고 인기 있는 연예인이 또한 우상이 되는 시대다. 이른바 스타플레이어 한 사람이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의 관심이 되고 인기가 높아진다. 현대의 우상은 다분히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모드로 변해간다. 종교적 우상이 대중의 관심을 끄는 도수는 점점 낮아지고 있다.

그러나 한편 우상은 불충분한 자신에 대한 호도(糊塗)심리에서 출발하는 경향이 있다. 우상에 빠지는 것은 이성적 판단과 건전한 지혜를 상실할 위험이 있는 것이라고 심리학자들은 말하기도 한다. 스스로 우상이 되어 인기를 한 몸에 누리고 많은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실제로 우상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상은 남의 관심과 지지에 의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상은 지극히 주관적인 개인의 선호도에 따라 일어나므로 공정한 객관적 가치를 보장받는 것은 아니다. 다분히 감정적인 일방적 선호에 의해 군중이 한데 어울리는 일종의 피플파워(people power) 현상이 문화적 가치로 상승하기 위해서는 인간적 우호의 성숙도가 있어야 한다. 어떤 면에서 승패를 다투는 편 가르기의 일방적 응원이 스롯머신을 움직이는 도박적인 근성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란 말이다. 스포츠에 있어서 승패는 게임 구성의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다.

16강의 좌절된 한국 축구의 불운이 다시 우상이 되어 국민적 사랑을 지속적으로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더 나은 실력 연마가 있어야 할 것이다. 다만 승부의 근성으로 사는 세상의 역학적 구조가 패배를 무시하는 오도된 선입관을 유발하지만 패배에도 아름다움은 있는 법이다. 때로는 이겼다고 우쭐거리는 마음보다 지고 겸손해 지는 마음이 더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6년 7월 제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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