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무인도(數里無人到) 멀리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곳
산황시각추(山黃始覺秋) 산이 단풍들어 가을인 줄 알았네
암간일각수(巖間一覺睡) 바위틈에 한 숨 자다 깨어 보니
망각백년우(忘却百年憂) 사는 걱정 모두 다 날라 가버렸네
선림승보전(禪林僧寶傳)에 수록되어 있는 이 시는 지극히 평범한 시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탈속한 산거인의 맑은 서정이 스며 있다. 부용도개(芙蓉道楷)스님이 지은 시인데 스님은 중국 송나라 때 조동종의 스님이다. 생몰 연대는 1043∼1118년.
인구가 과밀하여 사람 만나는 것이 부담이 되는 것 같은 현대의 생리에서 볼 때 은자의 안일무사가 오히려 부럽기도 할 것이다. 인가를 멀리 벗어난 깊은 산중. 은거하고 사는 사람 이 있어 날 가는 줄 모르고 사는데, 어느 날 산에 단풍이 들어 산색이 울긋불긋 변하는 것을 보고 가을이 온 것을 알았다. 하지만 계절이야 으레 오고 가는 것, 할 일 없어 바위틈에 누워 낮잠 한숨 잤더니 무심한 산이요 무심한 하늘이라, 사는 걱정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다. 공연히 철학하는 사람들이 인간에게 불만을 가지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만족하는 돼지보다 불만 하는 인간이 되라”고 했지만 만족은 뭐고 불만은 뭐냐. 그대로 산 속에 한 그루 소나무가 되어버린 것을.
은자송(隱者頌)이라 할 이 시는 생존경쟁을 초월한 달인의 노래다. 비록 우리는 현실의 노예가 되어 있지만 그러나 누구 없이 한 생각 돌이키면 나 역시 은자요 도인이다.
지안스님 해설. 월간반야 2002년 11월 (제2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