끽다거(喫茶去)

중국 당나라 때의 걸출한 선승(禪僧)인 조주종심(趙州從諗)선사(778~897)가

어느 날 방문한 두 신참학승(新參學僧)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전에도 여기에 온 적이 있는가?”

“일찍이 온 적이 없습니다.”

“그럼 차나 한 잔 하게”

또 선사가 다른 한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여기에 온 적이 있는가?”

“있었습니다.”

“그럼, 자네도 차 한 잔 하게나.”

두 스님이 물러나자 옆에 있던 원주스님이 조주선사에게 물었습니다.

“노스님께서는 어찌하여 일찍이 여기에 온 일이 없는 이에게도 “차나 한 잔 하게”하고, 온 적이 있는 이에게도 “차나 한 잔 하게”라고 하십니까?”

그러자 스님은 “원주!” 라고 불렀습니다.

원주스님은 “예”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선사께서는

“원주! 자네도 차나 한 잔 하시게”

조주선사의 “차 한 잔 하라”고 하신 것은 왔다, 안 왔다는 것에 의미를 두는 신참학승이나 구참자(여기서는 원주스님)의 분별심(分別心)으로 생각하는 이원적(二元的)인 사고가 아니라 무심으로 차를 마시기를 권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바로 지금 여기 자신이 처해있는 본분의 일(本分事)에 충실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끽다거(喫茶去)’란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단지 “차를 마시라”는 것입니다. ‘거(去)’는 어조사로서 특별한 해석은 하지 않습니다. 그냥 앞의 글을 강화시키는 글자로 부탁, 훈계, 명령 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조주선사의 이 말씀에서 유래된 ‘끽다거’는 이후 조주가풍 조주가풍(趙州家風)의 선미(禪味)가 그윽하게 풍기는 유명한 선종의 화두(話頭)가 되었습니다.

이 공안은 조주록(趙州錄) 하권과 조당집(祖堂集) 등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인음수냉난자지(如人飮水冷暖自知)라.’

사람이 물을 마심에 차고 따뜻한 것은 직접 맛을 보아야 알 수 있으리라.

선의 참맛(眞味)을 맛보려거든 직접 실참(實參) 해 보시라!

인해스님 (동국대강사) 글. 월간반야 2005년 11월 제60호

꿈에 난새를 타고 푸른 허공에 올랐다가

몽과비란상벽허 夢跨飛鸞上碧虛 꿈에 난새를 타고 푸른 허공에 올랐다가

시지신세일거려 始知身世一遽廬 비로소 몸도 세상도 한 움막임을 알았네

귀래착인한탄도 歸來錯認邯鄲道 한바탕 꿈길에서 깨어나 돌아오니

산조일성춘우여 山鳥一聲春雨餘 산새의 울음소리 봄비 끝에 들리네

중국 송나라 때 대혜종고(大慧宗 ) 선사가 있었다. 간화선의 거장으로 당시의 사대부들과 교유하면서 서찰로 참선공부를 지도하였다. 그가 쓴 『서장(書狀)』이라는 책에는 42명의 사대부들과 주고받은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유일한 여성이 등장하는데, 위 시의 작자 진국태부인이다. 30세에 미망인이 되어 40여년을 불교수행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아들이 출세하여 차남은 승상(정승)이 되고 큰아들도 요즈음 법무부 고위 관직인 제형(提刑)이 되었다. 본래 성씨는 허(許)씨였는데 고귀한 신분이라, 나라에서 준 진국태부인이라는 호칭을 썼다. 대혜스님이 이 부인의 편지를 받고 깜짝 놀랐다. 그것은 부인이 정말 위 시와 같은 경지에 올라 정말 공부가 된 사람인가 의심을 하였다. 도겸이라는 스님으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서야 의심이 풀려 대혜스님 자신이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 그리하여 이참정, 유보학과 함께 대혜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는 42명 중의 3인이 된다.

꿈에 난새라는 새를 타고 허공에 올랐다는 말은 묘한 상징성이 있는 말이다. 높은데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세상은 작게 보이고 내가 커진 것 같으면서 집착하던 일에서 쉬이 초월되어 떠나짐을 느낀다. 그야말로 세상은 한 움막 같은 것이다 견고하지 못하고 잠시 임시로 머무는 거적대기 얽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서산스님도 만국도성이 개미집 같다 하였다. 멀리 보면 세상은 집착할 데가 없어진다. 프랑스의 르낭은 “별의세계에서 지상의 사물을 관찰하라”고 하였다. 꿈을 깨고 나면 몽경은 없는 것이고 또 없었던 것이다.

한단몽이라는 설화는 여생이라는 사람에 여옹이라는 도사를 만나 자기의 빈곤을 탄식하니, 여옹이 주머니에서 베개를 꺼내주며 이것을 베고 자면 부귀영화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했다. 여생이 베개를 베고 자다 꿈에 30여년의 부귀영화를 누렸는데 깨어보니 부엌에서 짓던 밥이 아직 익지도 않았더라는 설화로, 한바탕 꿈과 같은 허망한 일을 비유하는 말이다. 마지막 구절의 “깨고 보니 봄비 끝에 산새의 울음소리 들린다”는 말이 너무나 생생한 여운을 남긴다.

이 시를 감상하면 지루한 장마가 그치고 더위를 몰아내는 하늬바람이 불어왔나 보다고 느껴진다. 하늘에서부터 가을 기운이 내려오기 시작한다. 여름의 그 많던 뭉게 구름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빈방에 홀로 앉아 좌선에 여념이 없다가 밤이 되어 달 뜬 줄도 몰랐다. 선정에서 깨어나 창문을 열었더니 달 속의 계수나무 향기가 여기 저기 떨어진다. 계수나무 향기는 곧 달빛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활약했던 서산스님의 제자 사명스님이 쓴 시다. 지리산 어느 골짜기에 앉아 여름이 물러가고 가을이 오는 절기를 느끼면서 지었는지 제목이 <靑鶴洞秋坐>라 되어 있다. 지금의 청학동이 아닌 속세와 멀리 떨어진 불로장생술을 닦는 도인들이 모이는 골짜기라는 전설적인 이상향을 상징하는 이름이 청학동이다. 하늘에 뜬 달빛이 땅에 비쳐오는 모습을 달 속에 있다는 계수나무 열매가 꽃잎처럼 떨어진다고 묘사하였다. 참으로 멋진 시구이다. 결국 달빛이 계수나무 열매의 향기라는 말이다. 때로는 먼 하늘을 바라보면 그리운 사람의 얼굴이 향기로 닦아옴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사람의 순수한 감정이다. 무심은 순수를 의미하는 것이지 아무 감정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지안스님 해설. 월간반야 2003년 (제33호)

꿈속에서 꿈속의 일 말하지 말라

夢裏莫說夢裏事(몽리막설몽리사) 꿈속에서 꿈속의 일 말하지 말라.

夢去夢來夢不休(몽고몽래몽불휴) 꿈이 가면 꿈이 오고 꿈은 쉬지 않는다.

愁中莫說愁中語(수중막설수중어) 근심 속에서 근심 속의 말을 말하지 말라.

愁去愁來愁復愁(수거수래수부수) 근심이 가면 근심이 오고 근심이 다시 근심이 된다.

몽수음(夢愁吟)이라는 조선조 중엽의 괄허(括虛1720~1789) 스님의 시이다. 인생의 내용이 꿈과 근심이라는 뜻으로, 뻔한 이야기 그만 하라는 말이다. 일종의 잠명(箴銘)이다. 여기서 꿈이란 세속적 야망이 모두 꿈이다.

모두 허욕에 불과한 것으로 이것이 결국 근심을 낳는 원인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평화롭게 가져 무위(無爲)의 즐거움을 누리라는 뜻이다. 욕망은 끝이 없다고 했듯이 사실은 내가 내 욕망을 초월할 때 평화가 오는 것이다. 욕망은 언제나 근심을 달고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