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오르는 산

영축산은 영락없는 독수리 형상이다.

날개 크게 펼쳐 하늘 허공을 돌며

먹이를 낚아채기 직전, 저 거침없는 몰입의 긴장을 나는 느낀다.

무진장무진장 눈이라도 퍼붓는 날이면

흰 날개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이고

산의 들숨날숨 따라가다 나도 함께 숨을 멈추고 만다.

명창의 한 호흡과 고수의 북 치는 소리 사이

그 사이의 짧은 침묵 같은, 잠시라도 방심한다면

세상 꽉 붙들고 있는 모든 쇠줄들

한순간에 끊어져 세차게 퉁겨 나가버릴 것 같은,

팽팽한 율에 그만 숨이 자지러지는 것이다.

겨울산을 면벽 삼아 수좌들 동안거에 들고

생각 놓으면 섬광처럼 날아와 눈알 뽑아버릴

독수리 한 마리 제 앞에 날려놓고

그도 물잔 속의 물처럼 수평으로 앉았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잔속의 물 다 쏟고 마는

그 자리에 내 시를 들이밀고, 이놈 독수리야!

용맹스럽게 두 눈 부릅뜨고 싶을 때가 있다.

나도 그들처럼 죽기를 살기처럼 생각한다면

마주하는 산이 언젠가는 문짝처럼 가까워지고

영축산은 또 문짝의 문풍지처럼 얇아지려니

그날이 오면 타는 손가락으로 산을 뻥 찔러보고 싶다.

날아라 독수리야 날아라 독수리야

산에 구멍 하나 내고 입바람을 훅 불어넣고 싶다.

산 뒤에 앉아 계신 이 누구인지 몰라도

냉큼 고수의 북채 뺏어들고

딱! 소리가 나게 산의 정수리 때려

맹금이 날개로 제 몸을 때려서 하늘로 날아가는 소리

마침내 우주로 날아오르는 산을 보고 싶은 것이다.

출처: 시집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

정일근 시인 글. 월간 반야 2011년 5월 126호

날마다 좋은날(日日是好日)

하루는 운문(864~949)선사가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십오일(十五日) 이전에 대해서는 너희에게 묻지 않겠다.

하지만 십오일 이후에 대해서는 어디 한 마디 일러 보아라.”

제자들 중 그 누구도 스승의 질문에 선 듯 나서서 대답을

하지 못하자 스님은 스스로 답했습니다.

“날마다 좋은날(日日是好日)이니라.”

세상 사람들은 날씨가 맑으면 좋다 궂으면 나쁘다 하며 생각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우주의 본체(本體)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날씨가 좋든 싫든 모두가 자연의 현상일 뿐 거기에는 선, 악, 분별은 없습니다. 이를 선에서는 의심즉차(擬心卽差) 또는 동념즉괴(動念卽乖)라는 표현으로 사의(思議)를 하면 곧 진리와는 어그러지게 된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만약 운문선사가 대중에게 물은 ‘십오일’을 기준으로 이전 ․ 이후라는 분별로서 헤아리게 된다면 운문선사가 요구하는 의도를 바르게 대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필경 운문선사와 같은 조사의 입장에서 십오일이라는 단순한 날짜의 구분을 두어 물었을 리는 만무합니다.

무릇 선의 경지는 스스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부득이 운문선사는 제이의문(第二義門)인 방편적인 말로써 자신의 선의 경지를 “날마다 좋은 날이다”라고 나타내 보였던 것입니다. 이는 곧 우리들이 살아가는 날들을 무명에서 벗어난 시간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이것이 바로 한결같이 좋은 날일 것이요. 임제선사가 말한 무위진인의 삶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일일시호일’은 『벽암록』 6칙, 『선문염송』 1009칙에 나오는 공안입니다.

인해스님 (동화사 강사) 글. 월간반야 2005년 5월 제54호

날마다 산을 보아도

일일간산간부족 日日看山看不足 날마다 산을 보아도 보는 것이 모자라고

시시청수청무염 時時聽水聽無厭 때마다 물소리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아

자연이목개청쾌 自然耳目皆淸快 귀와 눈이 저절로 맑고 시원해

성색중간호양염 聲色中間好養恬 소리와 색깔 그 속에 고요함을 기르네.

수도자들은 예로부터 산과 물을 벗한다. 사는 곳이 산속이니 의당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심한 자연 속에 무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눈을 뜨면 산이니 아무리 보아도 싫지가 않고 시시로 들려오는 물소리 그 소리에 짜증을 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산을 보니 눈이 맑아지고 물소리 들으니 귀가 시원해진다. 여기에서 도심이 깊어지고 사는 일이 조용하다.

이 시는 고려 때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沖止 : 1226~1292)의 시이다. 한가함 속에서 스스로 기뻐서 지었다면서 제목을 한중자경(閑中自慶)이라 붙인 시이다.

출가 전 19살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서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던 스님은 문장이 뛰어나 이름을 날리기도 했는데 29살에 원오(圓悟)국사를 의지해 수계 스님이 되었었다. 몽고 침입 때 환수 되었던 사찰의 토지를 돌려 달라는 글을 올려 원나라 세조를 감동케 해서 땅을 돌려받고 세조의 청으로 연경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의 사후 고려 충렬왕 때 원감국사어록을 간행했으나 산실되고 말았는데 육당 최남선이 일본에서 구해와 다시 국내에 알려지게 되었다.

요산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2월 제7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