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림사 절 앞에서 손님 배웅하는데

東林送客處(동림송객처) 동림사 절 앞에서 손님 배웅하는데

月出白猿啼(월출백원제) 달이 밝게 떠 있고 잔나비가 우는구나.

咲別廬山遠(고별여산원) 웃으며 헤어지던 여산의 혜원스님

何須過虎溪(하수과호계) 아뿔싸, 그만 호계의 다리를 지나고 말았네.

이 시는 당나라 때 시선(詩仙)이라 불리어진 이백이 ‘호계삼소(虎溪三咲)’의 설화를 두고 지은 시이다. 이백 역시 여산을 자주 드나들며 시를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동진(東晋) 때 여산(廬山) 동림사에 혜원(慧遠: 335~417)이 주석하고 있었는데 그는 산문은 물론 절 앞에 있는 호계의 다리를 건너지 않고 도량을 떠나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워 있었다.

그런데 어는 날 시인 도연명(陶淵明)과 도사(道士) 육수정(陸修靜)이 찾아와 한 참 담론을 나누다가 혜원이 두 사람을 배웅을 하게 되었다. 배웅 중에 이야기에 팔려 혜원이 그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리를 건너버린 것이다.

이때 호랑이 울음소리를 듣고 다리 건넌 줄을 알라 차려 크게 웃었다는 고사가 호계삼소다. 그러나 혜원과 도연명은 비슷한 시기의 사람이지만 육수정은 연배가 늦은 점을 두고 과연(생몰연대를 보면 혜원과 육수정은 70살의 나이 차이가 난다) 이 세 사람이 만나 어울릴 수 있었나 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돌아와 발을 씻고 침상에 올라 자다

귀래세족상상수 歸來洗足上床睡 돌아와 발을 씻고 침상에 올라 자다

곤중부지산월이 困重不知山月移 산 위로 달이 가는 줄 미처 몰랐네

격림유조홀환성 隔林幽鳥忽喚醒 숲 속의 새소리에 문득 눈을 떠보니

일단홍일괘송지 一團紅日掛松枝 소나무 가지에 붉은 해가 걸렸구나

일에 쫓기는 일이 없는 한가로운 여유가 넘쳐나는 이 시는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는 남구만의 시조의 연상케 하고 있다. 어느덧 사람 사는 마을이 도시화되고부터 자연을 벗삼아 한가로움을 즐기는 시대는 이미 지나 가버렸지만 그러나 사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물어 볼 때 대답을 못하면서도 우리는 너무 바쁜 일과에 쫓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산다는 것이, 생활한다는 것이 어쩌면 부담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적 관계에서나 사회 제도에서 오는 심리적 부담 속에 존재하는 자체가 피곤해질 때가 많이 생긴다. 부담스러운 일이 없을 때 선의 세계로 들어가 실컷 마음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은 분명 부담 없는 경기인데 우리는 경기에 임하기 전부터 너무나 많은 부담을 안고 링에 오르는 권투선수처럼 이 세상을 전쟁터로 보고 생존경쟁에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번뇌 때문일 것이다.

이 시는 석옥 청공(石屋 淸珙) 선사의 시다. 중국 송(宋)나라 때 스님으로 우리 나라 고려 태고 보우(太古 普雨)선사가 석옥으로부터 법을 이어 받았다. 조계종 법맥의 연원이 이 두스님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다. 산월(山月)이라고 제목이 붙은 이 시는 그윽한 자연 속에 매여진 일상에 쫓기지 않고 사는 한가로운 여유가 넘친다.

지안스님 해설. 월간반야 2003년 6월 (제19호)

도력(道力)이 업력(業力)을 이길 수 있으려면

스님들이 강원에서 배우는 ‘書狀(서장)’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것은 중국 송나라 때의 임제종臨濟宗 승려인 대혜선사와 사대부 간에 주고받은 서간문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선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간화선(看話禪:公案禪)에 대한 독창적인 전개로 사상계(思想界)에 큰 영향을 끼친 매우 의미있는 서간문집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강원에서 서장을 읽다가 ‘선(禪)’의 미묘한 경계에 환희심을 내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선방으로 훌쩍 떠나버리는 학인들도 있었다고 하니 대혜스님의 심오하고 뛰어난 경지와 문장력에 새삼 감탄할 따름입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잠시 일전에 배웠던 글들을 되새기던 중 꽤 의미 있게 다가온 구절이 있어 몇 자 적어봅니다.

“근기가 날카롭고 뛰어난 이는 무엇을 이루고자 할 때

힘을 들이지 않고 마침내 쉽게 이루려는 마음을 내어

문득 수행하지 않고 대게 눈앞의 경계에 끄달려 본 마음을 주재하지 못하니,

이렇게 날이 가고 달이 깊어지면 미혹하여 돌이키지 못하다가

결국 도력이 업력을 이기지 못하게 됨이라”

우리들 개개인의 성격이 다르듯이 가지고 있는 근기 또한 사람마다 천차만별입니다. 그리하여 근기가 수승하여 조금만 기도하고 수행하여도 성취를 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수행이나 기도에 있어 성취를 보기 어려운 이들도 있습니다. 사실 저 또한 둔근기인지라 성취가 빠른 도반들을 볼 때면 늘 부러운 마음이 생길 때가 많습니다. ‘저 스님은 전생에 얼마나 수행을 했기에 저렇게 빨리 성취가 되나?’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근기가 뛰어나고 똑똑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많이 안다고 ‘관문상(늘 들었던 법문이라 하여 소홀히 하는 자만심)’을 내어 스승님과 도반들의 가르침을 가벼히 여기거나 ‘용이심(쉽게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내어 무엇이든 손쉽게만 이루고자 한다면 결국 신심에 바탕한 꾸준한 정진력을 잃어버리고 대상경계에 휘둘려 본심(本心, 근본 마음자리)을 놓쳐버릴 수 있습니다.

본심을 놓쳐버리게 된다면 모든 것을 자기 근본마음 자리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탐진치 삼독심이나 아만심, 집착심, 의구심이 만들어낸 업業의 자리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좀 더 객관적인 시각에서 지혜롭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잃어버리면 자기 주관적인 시각에 빠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관적인 시각, 즉 세상의 모든 것들을 자신의 욕심과 집착, 어리석음으로 덧씌워진 ‘자기생각’으로 바라본다면 그것이 바로 업의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업이란 불자님들도 다들 잘 아시고 계시듯이 욕심내고, 화내고, 어리석은 세 가지 독한 마음을 몸과 말과 생각을 통해 짓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이것에 대하여 대혜선사는 “도력이 불승업력이라(도력이 업력을 이기지 못하게 된다)”고 하여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내가 남들보다 조금 나은 위치에 있다고 하여 사람이나 대상을 무시하고 가벼히 여긴다면 결국 업보의 굴레에 빠져들 것이며, 반대로 나의 주변상황과 능력이 남들보다 못하다고 퇴굴심을 내어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려 하거나, 기도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목적지가 지척에 있는데도 어리석게 주저앉아 버린다면 이 또한 업보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일만 참으면 인간 몸을 받을 구미호는 ‘늘 그렇듯이’ 마지막 단 하루를 참지 못해 인간의 몸을 받지 못합니다. 밤길을 열심히 달려가다 포기하고 주저앉았더니, 다음 날 아침 목적지가 바로 앞에 있었음을 깨닫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물은 99도가 아닌 100도에서 끓으며, 또한 1도가 아닌 0도에서부터 얼어버립니다.

늘 깨어있는 마음과 불퇴전의 정진심으로 기도하는 불자님들이 되십시오. 아만에 물든 관문상이나 쉽게 이루려는 용이심, 그리고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믿지 못하는 퇴굴심은 곧 우리 본마음에 갖추어진 도력(道力)의 무한한 가능성을 무너뜨리고 괴로운 업력(業力)의 굴레에 윤회하게 하는 어리석은 결과를 낳습니다.

“달구어진 정진의 무쇠 솥에는

시련의 눈송이가 닿기도 전에 이미 사라져 버립니다.”

정진합시다!

신경스님, 월간반야 2010년 10월 제11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