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상생경( 彌勒上生經) _ 도솔천 왕생하는 방편

불교신앙의 형태를 특정 불보살을 위주로 구분하여 말할 때 여러 가지가 있다. 이 가운데 미륵불 혹은 미륵보살을 특별히 신앙하는 것을 미륵신앙이라 한다. 이 미륵신앙에 관한 여러 경전들이 있는데 미륵삼부경 또는 미륵육부경이라 하여 세 개의 경을 들거나 여섯 개의 경을 들어 말하기도 한다.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은 미륵 신앙의 대표적인 경전으로 <미륵하생경>과 쌍벽을 이루며 <미륵성불경>을 더하여 삼부경三部經이라 하며, 이역에 해당하는 구마라습 역의 <미륵하생경>과 또 의정삼장 역의 <미륵하생성불경>과 역자미상의 <미륵내시경(彌勒來時經)>을 합하여 육부경(六部經)이라 불러오기도 했다.

<미륵상생경>은 유송(劉宋) 때 저거경성(沮渠京聲)이 번역한 1권으로 되어있는 경이다. 원 이름은 <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이며 <미륵보살반열반경>이라 부르기도 한다. 미륵신앙 계통의 경전 중 가장 늦게 이루어진 경으로 알려진 이 경은 미륵의 정토인 도솔천에 왕생할 수 있는 방편을 설해 놓은 경이다.

부처님이 기원정사에 계시던 어느 날 밤, 부처님이 방광을 하여 광명이 비친다. 이 광명 속에 화불이 나타나 법을 설하자 수많은 불제자들이 모여 들었다. 이때 우바리존자가 부처님이 미륵에게 수기 준 것을 기억하고 아직 범부인 미륵이 목숨을 마치면 어디에 태어나게 되느냐고 묻는다. 이에 미륵이 도솔천에 태어나 일생보처보살로 머무를 것이고, 5백만 억의 천자들이 공양할 것이며 천자들이 서원을 일으켜 궁전을 만드는 이야기를 하면서 도솔천궁의 장엄에 대하여 설한다.

미륵은 이곳에서 여러 천상의 사람들을 교화하다가 마침내는 하생하여 부처가 될 것이라 하였다. 특히 미륵은 석가모니의 교화인연이 다한 다음에 사바세계에 강림하여 중생들을 교화할 미래불의 대명사로 인식된다. 한 생만 지나면 부처가 되지만 현재는 보살이므로 미륵은 보살이라 부르기도 하고 당래 부처로서 말할 때 부처라 하기도 한다.

원래 미륵은 자씨(慈氏)라고 번역하는 것처럼 중생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보살이다. 마이테리아(Maitreya)라는 범어를 한자의 자慈로 번역하여 이를 성(姓)으로 하여 김씨, 박씨 하듯이 자씨라 한 것이다. 자능여락(慈能與樂)이라 하여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 하였는데 미륵은 일체 고난 중생에게 즐거움을 누리도록 좋은 세상을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미륵신앙의 특징이 바로 여기에 있다. 좋은 세상이 도래하기를 염원하면서, 인류의 보편적이고 통상적인 이 공동 염원을 미륵신앙에 의해서 구현한다는 것이다. 구세불로서 미륵의 이미지는 새로운 세상을 여는 개벽의 주인공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이 경은 왕생신앙을 강조하면서 그 방법을 가장 쉽게 제시해 놓았다. 이리하여 예로부터 미타정토와 마찬가지로 미륵정토를 쉽게 받아들여 널리 민간에 유통되게 된 연유가 고도의 수행을 요구하지 않고 쉽고 간명하게 설해 놓은 법문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이 경의 주석서로는 길장의 <미륵경유의(彌勒經遊意)>가 유명하며 우리나라의 원효 스님의 <미륵상생경종요>와 경흥의 <미륵상생경요간기>가 있다.

지안스님, 월간반야 2010년 9월 제118호

무위진인

당대(唐代)에 임제종의 개조인 임제의현(? ~ 867)스님께서

하루는 대중을 위해 설법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몸뚱이 속에 한 무위진인(無爲眞人)이 있다.

그는 항상 그대들의 얼굴을 통해 출입하고 있으니 아직 깨닫지 못한 자는 살펴보아라.”

그때 어떤 스님이 나와서 물었습니다.

“무엇이 무위진인입니까?”

임제스님이 대뜸 그 스님의 멱살을 잡고서 다그쳤습니다.

“말해봐라, 말해봐!”

스님이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확 밀쳐버리고 말씀하시기를

“무위진인이 이 무슨 마른 똥막대기냐” 하고 곧 방장실로 되돌아가 버렸습니다.

지난 해 12월 13일은 조계종의 큰 어른이신 백양사 방장이셨던 서옹스님께서 열반에 드셨던 날입니다. 평소 큰스님께서는 ‘자각한 사람의 참모습’을 무위진인으로 정의하며 참사랑 운동을 펼쳤던 분이십니다. 즉 무위진인이란 ‘초발심에서 성불에 이르는 수행단계(42위, 52위, 57위)에 떨어지지 않고 성범(聖凡), 미오(迷悟), 상하(上下), 귀천(貴賤) 등을 초탈한 참된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영원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 속에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모두는 개별성을 초월한 무위진인임을 확인할 때, 우주의 주인공으로서 우리의 참다운 면목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인해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11월 제48호

무(無)

어느 날 한 사람의 수행승이 조주(趙州) 스님(778-897)에게 물었습니다. “개에게도 불성(佛性) 있습니까?” 조주(趙州) 스님이 대답했습니다. “무(無)!”

이것이 소위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의 화두입니다. 구자(狗子)의 ‘자(子)’는 의자(椅子), 탁자(卓子)의 예처럼 어조사로 뜻은 없습니다. 수행승의 질문을 받은 조주 선사는 중국 산동성 태생으로 성은 학씨(郝氏)로 이름은 종심입니다. 조주(趙州)의 관음원(觀音院)에서 살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조주 선사라고 불렀습니다. 남전선사의 법을 이어서 한평생 선(禪)을 하면서 살아간 고승으로 당대 선계(禪界)의 거물이었습니다. 120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열반경』에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 하여 모든 중생들은 다 불성이 있다고 합니다. 불성(佛性)은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종자(種子)를 뜻하는 것으로, 불성이 있다는 말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나면서부터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즉 만유에 부처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의 도리는 알고도 남을 조주스님이신데 왜 “무”라고 답했을까요? 이것이 바로 ‘화두’입니다. 조주는 다른 수행승에게서 똑같은 질문을 받고, 이번에는 “있어”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조주와 같은 고승의 입으로 아무렇게나 대답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것인데,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대답을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이처럼 중요한 대답이 각각 다른 것은 한 입으로 두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없다(無) 혹은 있다(有)는 개념에 집착하지 말고 상대적인 인식을 초월하라는 가르침으로 조주가 말한 유무(有無)는 유(有)란 무엇이며, 무(無)란 무엇인가 하고 따지지 말고, 있다ㆍ없다를 초월한 무(無)라는 것입니다.

조주스님이 “무(無)”라고 대답한 것은 불성이 있다 없다 하는 분별의 차원을 넘어선 경지에서의 무(無)라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조주스님의 답변은 깨달음을 직시(直示)하라는 것으로 물음에 대하여 어떤 사량계교(思量計較)도 용납하지 않음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오직 흔들림 없는 간화(看話)로만이 깨달음에 이룰 수 있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인해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8월 제45호

인해스님은 동화사 강원의 강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