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한 사람의 수행승이 조주(趙州) 스님(778-897)에게 물었습니다. “개에게도 불성(佛性) 있습니까?” 조주(趙州) 스님이 대답했습니다. “무(無)!”
이것이 소위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의 화두입니다. 구자(狗子)의 ‘자(子)’는 의자(椅子), 탁자(卓子)의 예처럼 어조사로 뜻은 없습니다. 수행승의 질문을 받은 조주 선사는 중국 산동성 태생으로 성은 학씨(郝氏)로 이름은 종심입니다. 조주(趙州)의 관음원(觀音院)에서 살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조주 선사라고 불렀습니다. 남전선사의 법을 이어서 한평생 선(禪)을 하면서 살아간 고승으로 당대 선계(禪界)의 거물이었습니다. 120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열반경』에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 하여 모든 중생들은 다 불성이 있다고 합니다. 불성(佛性)은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종자(種子)를 뜻하는 것으로, 불성이 있다는 말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나면서부터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즉 만유에 부처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의 도리는 알고도 남을 조주스님이신데 왜 “무”라고 답했을까요? 이것이 바로 ‘화두’입니다. 조주는 다른 수행승에게서 똑같은 질문을 받고, 이번에는 “있어”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조주와 같은 고승의 입으로 아무렇게나 대답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것인데,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대답을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이처럼 중요한 대답이 각각 다른 것은 한 입으로 두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없다(無) 혹은 있다(有)는 개념에 집착하지 말고 상대적인 인식을 초월하라는 가르침으로 조주가 말한 유무(有無)는 유(有)란 무엇이며, 무(無)란 무엇인가 하고 따지지 말고, 있다ㆍ없다를 초월한 무(無)라는 것입니다.
조주스님이 “무(無)”라고 대답한 것은 불성이 있다 없다 하는 분별의 차원을 넘어선 경지에서의 무(無)라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조주스님의 답변은 깨달음을 직시(直示)하라는 것으로 물음에 대하여 어떤 사량계교(思量計較)도 용납하지 않음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오직 흔들림 없는 간화(看話)로만이 깨달음에 이룰 수 있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인해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8월 제45호
인해스님은 동화사 강원의 강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