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하착(放下着)

“趙州因嚴陽尊者問 一物不將來時如何 師云放下着 嚴云 一物不將來 放下箇甚麽

師云 伊麽則擔取去 尊者大悟”

옛날 중국의 엄양존자(嚴陽尊者)라 불리우는 스님이 하루는 조주(趙州)스님(779-897)에게 물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을 때는 어찌해야 합니까?”

조주스님이 대답하기를 “내려놓아라(放下着).”

이 말씀을 들은 엄양존자는 도대체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물었습니다.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무엇을 내려놓으라는 말입니까?”

그러자 조주스님은 “그렇다면 짊어지고 가게”하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엄양존자는 크게 깨쳤습니다.

위의 일화는 ‘방하착(放下着)’이라는 화두로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방하착이란 ‘내려놓아라’는 뜻으로 여기서 ‘착(着)’은 ‘방하(放下)’를 강조하기 위한 어조사(語助辭)로 특별한 의미는 없습니다. 원래 ‘방하착’이라는 용어는 『오등회원 (五燈會元)』<세존장(世尊章>에서 나오는 말로써 흑씨범지(黑氏范志)가 오동꽃을 받들어 세존께 공양하자 부처님께서 흑씨범지를 불러 ‘방하착하라’고 말씀하셨다는 일화에서 유래합니다.

즉 부처님께서 흑씨범지에게 꽃을 공양했다는 집착된 마음마저 내려놓으라는 뜻으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여기 공안에서 조주스님께서 ‘방하착하라’고 하신 의미는 모순적 취사선택의 상황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하거나 양쪽 모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를 놓아버리고 분별적 사고에서 벗어나라는 말씀이십니다. 더 나아간다면 ‘놓아버린다’는 것도 또한 분별이므로 무분별의 분별마저도 놓아버리는 것으로 마치 서양논리학에서 말하는 모순율을 극복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단계를 뛰어 넘어야 만이 선에서 말하는 절대적 선의 경지에 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공안은 『선문염송』 435칙, 『종용록』 57칙과, 『조주록』 등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인해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10월 제58호

밤은 깊고 산은 비어

夜靜山空萬籟沈 밤은 깊고 산은 비어 만상이 잠겼는데

寂寞燈下費孤吟 적막한 등불 아래 홀로되어 읊조리니

庭前唯有靑松韻 뜰 앞에 소나무가 우우우 소리 내어

添却騷人一段心 오히려 내 마음을 달래 주누나.

고요한 적막 속에 산속의 밤은 깊어졌다. 만상이 잠들어 있을 때 희미한 등불 아래 이 세상에 가장 외로운 사람 하나 있어 홀로 밤을 샌다. 그는 만상이 잠들어 있을 때 깨어 있기를 좋아 했다. 마치 야신(夜神)이 초대한 손님처럼 밤을 지키는 나그네가 되었다. 오늘 밤 따라 온갖 심회가 서린다. 산당에 앉아 있는 자신이 하나의 정물(靜物)처럼 느껴진다. 물아일여(物我一如) 속에서도 물아의 대화가 일어난다. 우우우 소나무 가지 사이로 송뢰가 일고 그것이 잠 못 드는 사람의 심중을 알고 어떤 화답을 보내는 것 같기만 하다.

하나의 정물이 되어 밤의 산을 지키면 어둠 속에 살아나는 침묵의 언어들이 있다. 산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우주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시원(始原)으 알 수 없는 태고의 원음 같은 것이 들려오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바로 자기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영혼의 모음일 수도 있다. 산이 깊으면 밤이 더 깊고, 밤이 깊으면 사람의 마음도 더 깊어진다. 바다의 밤과 사막의 밤이 산속의 밤을 따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설암추붕(雪巖秋鵬)이 남긴 설암잡저(雪巖雜著)에 수록되어 있는 이 시는 원제목이 야중즉사(夜中卽事)라 되어 있다. 한 밤중에 일어난 일이란 뜻으로 다분히 즉흥적으로 읊은 시상이 전개되고 있는 시이다. 선시에 보면 밤을 배경으로 지은 시들이 꽤 많다. 밤이 그만큼 시를 짓는 적시가 되는 것은 밤의 고요함과 작자의 고독이 잘 조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마치 세인들이 밤에 잠을 못 이루며 그리워하는 것이 있듯이 수도자들도 자기 내면을 깊이 응시하는 것은 아무래도 밤의 고요할 때가 더 좋기 때문이 아닐까?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8년 8월 제93호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야야포불면 夜夜抱佛眠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조조환공기 朝朝還共起 아침마다 함께 일어나네

기좌진상수 起坐鎭相隨 앉으나 서나 늘 따라다니고

어묵동거지 語默同居止 말할 때나 안 할 때나 함께 있으며

삼호불상리  毫不相離 털끝만큼도 서로 떨어지지 않으니

여신영상사 如身影相似 몸에 그림자 따르듯 하는구나

욕식불거처 欲識佛去處 부처님 간데 알고자 하는가?

지자어성시 只這語聲是 단지 이 말소리 나는 곳 부처이로세

인간을 불성(佛性)의 존재로 파악하는 것이 근본 입장이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 자리가 바로 부처가 있는 자리라는 것이다. 마음 없는 사람이 없다. 때문에 마음이 있는 자는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부처님 최후의 설법으로 알려진 <열반경>의 대의 중 하나가 일체중생 모두가 불성이 있다고 밝힌 것이다. 사실 마음이 부처라는 사실을 바로 알면 나와 부처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화엄경>에도 분명히 마음, 부처, 중생 이 세 가지는 똑 같은 것이라 하였다. (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 또 선가(禪家)에서는 뭐라 했는가?

즉심즉불(卽心卽佛) 마음이 부처라고 누누이 강조하면서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지 말라 하였다.

부대사(傅大士)의 게송으로 알려진 이 송(頌)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주도하는 주인공이 바로 부처라는 것을 설해 놓은 법문이다. 잠잘 때 잠드는 주인공이 바로 부처요 일어날 때 일어나는 주인공이 바로 부처다. 앉거나 서거나 일체의 행동거지를 일으키는 장본인이 바로 부처라는 말.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항상 함께 하는 부처는 바로 내가 내 마음을 떠나지 못한다는 뜻에서 해 놓은 말이다.

부대사는 양나라 무제(武帝) 때의 사람이다. 생몰연대가 서기 497년에서 569년으로 기록되어 전해진다. 비승비속(非僧非俗)으로 살면서 불법에 뜻을 두어 크게 도인풍을 드날린 사람이다. 같은 시대의 보지공 (寶誌公) 화상이 양 무제에게 미륵불의 화신이라고 소개한 적이 있었다. 때문에 이 게송을 미륵 게송이라고 말해 오기도 하였다. 성(姓)을 따라 부대사라 하기도 하고 동양사람이라 하여 동양대사(東陽大士)라고도 불렀다. 또 송산의 쌍림에 암자를 짓고 살았으므로 쌍림대사(雙林大士)라 부르기도 하였다. 부대사록 4권과 심왕명 1권이 전해지고 있다.

지안스님 해설. 월간반야 2003년 1월 (제1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