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깊고 물은 찬데

山深水密生虛 산심수밀생허뢰 산은 깊고 물은 찬데 텅 빈 적막의 소리여

月皎風微夜氣凉 월교풍미야기량 달은 밝고 바람 자서 밤기운 서늘하다.

却恨時人昏入夢 각한시인혼입몽 사람들은 지금 한창 꿈속에 들었겠지

不知淸夜興何長 부지청야흥하장 맑은 밤 이 흥취를 누가 어찌 알려나.

산속 깊이 온 세상이 잠든 밤에 가끔 깨어 있는 사람이 있다. 잠이 오지 않아 깨어 있는 것이다. 불면의 번뇌에 시달리거나 밤새도록 해야 할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밤하늘의 별빛처럼 그날따라 정신이 초롱초롱 해져 잠이 오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저 무심히 선정의 마음으로 돌아가 보는 것이다.

그대가 만약 깊은 산속에서 잠을 자지 않고 밤을 지새운다면 이 시와 같은 흥취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밤중에 산이 내쉬는 숨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이 세상은 밤이 있어서 더욱 신비스러워지는 것이다. 자연이 갖고 있는 보이지 않는, 숨어 있는 비밀 같은 것이 밤에 잘 느껴지는 법이다. 밤에 보면 산이 더 깊다. 사람이 많이 사는 도시의 밤보다도 또 바다의 밤보다도 산이 깊어 그런지 산의 밤이 더 깊게 느껴진다. 텅 빈 고요한 적막의 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산의 교향악을 그대는 한밤중에 깨어 있으면서 들어 보아야 한다.

이 시는 조선조 초기의 함허득통(涵虛得通 : 1376~1433)선사의 시다. 21세에 출가하여 이듬해 무학 대사를 뵙고 법문을 들은 뒤 제방으로 다니며 수행정진하다 세종대왕의 청으로 대자어찰(大慈御刹)에 수년을 머물기도 하였으며 희양산 봉암사에서 입적하였다. 박학다식한 학문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선교를 두루 섭렵해, 당시의 불법 선양에 크게 공을 남겼던 스님이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8년 5월 제90호

산아래 흐르는 물은 그저 흐르고

유수하산비유의 流水下山非有意 산아래 흐르는 물은 그저 흐르고

편운귀동본무심 片雲歸洞本無心 골짜기에 모이는 구름 무심할 뿐이다.

인생약득여운수 人生若得如雲水 인생이 만약 물과 구름 같아진다면

철수화개편계춘 鐵樹花開遍界春 무쇠나무에 꽃 피어 온 누리가 봄이리

자연의 섭리는 언제나 도에 순응하여 일어난다.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이치, 바로 여기에 깨달음의 소식이 있다는 것이다. 차암수정(此庵修淨) 선사의 이 시는 자연의 섭리를 통해 깨달음이 열리는 담담한 심경이 묘사되어 있다. 이 세상을 달관하고 보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담담하게 느껴질 뿐이다. 울분도 욕망도 벗어나 자신을 잊고 사는 것이다. 무아의 경지에 들어갈 때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주관에 일어나는 망상이 들어서 사물의 참모습을 왜곡해버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때문에 깨닫지 못한 범부 중생은 항상 진리에 대한 오해로 일관하면서 일생을 허비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잘못 보는 오해의 눈을 고쳐야 한다는 점이다. 오해는 모르는 것만도 못한 것이다.

차암수정스님에 대해서는 알려진게 별로 없다. 생몰연대도 미상이다. 고존숙어록에 이 시가 전해 질 뿐이다. 순리에 의해 세상을 무심히 받아드리면 거기서 초월된 절대의 세계가 나타나 모든 격을 뛰어넘는 격외의 소식을 체험, 무한한 자유를 느끼며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아름답고 편안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말해주는 시이다. 무쇠나무에 꽃이 피어 온 누리가 봄이라는 마지막 구절이 이 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극적으로 살려 놓았다.

지안스님 해설. 월간반야 2003년 5월 (제30호)

산속에 비 내려 밤새 대숲을 울리고

山雨夜鳴竹(산우야명죽) 산속에 비 내려 밤새 대숲을 울리고

草蟲秋近床(초충추근상) 풀벌레 소리 침상 가까이 들리며 가을을 알린다.

流年那可駐(유년나가주) 흐르는 세월을 어찌 머물게 할 수 있으랴

白髮不禁長(백발불금장) 흰머리 길어짐을 막을 수 없구나.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올 때 산속에 살다보면 곧잘 가는 세월 무상이 느껴질 때가 많다. 무성했던 나뭇잎이 퇴색하면서 산색이 변하며 얼룩진 단풍이 시작될 때쯤 밤이 되면 서늘한 냉기가 골짜기를 휘감아 흐르며, 침상 가에 풀벌레 소리가 들려온다. 생각은 이미 온갖 상념을 실은 사색의 날개가 되어 밤하늘을 타고 멀리 날아가 보기도 한다. 사람에 따라 공연히 인생이 서러워져 눈물이 나려할 때도 있을 것이다.

가을에 관한 한시 한 편을 찾아 읽으며 번역해보았다. 조선조 중기 문인이자 정치가였던 정철(鄭澈, 1536~1593)의 시이다. 흐르는 세월 속에 늙어가는 인생의 무상감을 술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