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일(煦日)

햇볕 밝습니다.

참 밝습니다.

대웅전 뜰

고요하고

고요합니다.

법고 범종 목어 운판

처마 끝의 풍경(風磬)도

소리를 내려놓지 못합니다.

산제비나비 애기세줄나비 물잠자리……

누구도 감히

그림자를 그리지 못합니다.

나는, 겨자씨보다 작은 창을

살며시 열고

내다보았습니다.

천상과 지상이 모두 환합니다.

내 배꼽이 따뜻해집니다.

文殊華 하 영 (시인 , 반야불교학당) 글. 월간반야 2009년 5월 제102호

황혼에 천천히 걸어가노니

黃昏緩步行(황혼완보행) 황혼에 천천히 걸어가노니

松韻和灘聲(송운화탄성) 솔바람 여울 소리 섞여 울리고

素月更流彩(소월갱유채) 달빛마저 하얗게 흘러내리니

悠然心境淸(유연심경청) 마음속이 유난히 맑아지누나

조선조 중기의 문신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가 어느 날 해질 무렵 솔바람 여울소리를 들으며 산보를 즐기다 지은 시이다.

유명한 시조 산절로 수절로를 짓기도 한 하서는 자연을 정관하는 시풍을 남긴 성리학의 대가이기도 했다. 문과에 합격하고 홍문관 박사를 역임하며 세자를 가르친 스승이기도 했다.

그가 가르친 세자가 즉위하여 인종이 되었으나 불과 8개월 만에 죽고 을사사화가 일어나 정국이 어지러워지자 그는 후학을 가르치며 조용히 학문에만 전념하다 생애를 마쳤다.

홑이불에 한기 들고

지피생한불등암 紙被生寒佛燈暗 홑이불에 한기 들고 불등은 희미한데

사미일야불명종 沙彌一夜不鳴鍾 사미승은 밤이 새도 종을 치지 않는구 나.

응진숙객개문조 應瞋宿客開門早 나그네로 와서 자고 문 일찍 연다 투덜 대겠지만

요간암전설압송 要看庵前雪壓松 암자 앞 눈에 눌린 소나무를 봐야겠네.

이 시는 고려 말 문신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1367)의 시다. 원 제목이 ‘산중설야(山中雪夜)’로 되어 있는데 누군가 산중 암자에서 하룻밤을 묵는데 날은 춥고 밤새 눈이 온 모양이다. 지피는 종이 이불이란 말이지만 홑이불을 가리킨다. 사람이 잘 수 있는 인법당 한 구석에서 한기를 느끼면서 잤는데 법당에 켠 장등이 희미하게 비치고 새벽이 되어 날이 새는데도 절간의 종이 울리지 않는다. 종을 치던 사미승이 눈 때문에 종각에 올라가지 못한 모양이다. 날이 점점 밝아지자 나그네는 소나무가 이고 있는 눈을 보고 싶다. 암자 앞 설경이 나그네를 불러내는 것이다. 절 식구는 아직 아무도 밖에 나오지 않아 객이 먼저 나가 절문을 열자니 괜히 미안스럽다. 사미를 불러내 문을 열어 달라면 일찍도 설친다고 필시 투덜댈 것이다.

익재는 고려 조정의 문하시중을 네 번이나 역임한 정치가로 큰 활약을 한 인물이지만 학자 문인으로도 이름이 높다. 원나라에 오래 머물면서 중국의 학자들과 교류도 많았다. 과거 시험에 당락을 결정하는 지공거(知貢擧)를 여러 차례 역임하면서 당대의 학자 이색(李穡)을 등과시킨 이가 익재이다 이색의 아버지 이곡(李穀)도 그의 문하생이었다.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6년 12월 제 7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