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숲 짙은 그늘

녹수음롱하일장 綠水陰濃夏日長 푸른 숲 짙은 그늘 여름날은 길고 긴데

누대도영입지당 樓臺倒影入池塘 누대의 그림자는 연못 속에 거꾸로 잠겼구나.

수정렴동미풍기 水晶簾動微風起 미풍이 일어나 수정발이 흔들리고

만가장미일원향 滿架薔薇一院香 줄기 뻗어 가득 핀 장미로 온 절이 향기롭네.

중국 선종사에 위앙종을 연 위산 영우(771~853)선사가 있었다. 백장회해(720~8140)의 법을 이어 선풍을 크게 드날렸던 스님이다. 이 스님이 ‘수고우(水牯牛)’란 화두를 남겼다. 하루는 위산 스님이 “내가 삼년 후에 죽어 산 밑의 신도 집에 태어나면 왼쪽 옆구리에 위산의 스님 아무개라고 쓰였을 것이다. 그때 만약 위산의 스님이라 하려면 곧 수고우이고 만약 수고우라 부르려면 곧 위산의 스님 아무개일 것이니, 자! 무엇이라 불러야 하겠는가?”

수고우란 물소라는 말이다.

이 화두에 대해 고봉원묘(高峯原妙 : 1238~1295)선사가 위의 시를 지었다. 절 안의 여름 정경을 묘사한 뛰어난 시라 할 수 있는 이 시에 오묘한 선지(禪旨)가 드러나 있다고 평가 받는다. 녹음이 우거진 여름날의 평화로운 절 안, 거기에 수정발을 흔드는 미풍이 있고 만개한 장미 향기가 집안에 가득하다.

수정 고봉 선사는 『선요(禪要)』라는 저서를 남겨 선수행의 지침을 제시해 주기도 하고 그 밖에 어록을 남겨 선의 요지를 설해 주었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6월 제55호

팔죽시(八竹詩)

차죽피죽화거죽 此竹彼竹化去竹 이대로 저대로 되어가는 대로

풍취지죽낭타죽 風吹之竹浪打竹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반반죽죽생차죽 飯飯粥粥生此竹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생기는 대로

시시비비부피죽 是是非非付彼竹 시시비비는 저에게 맡긴 대로

빈객접대가세죽 賓客接待家勢竹 빈객 접대는 가세대로

시정매매시세죽 市井賣買時勢竹 시정 매매는 시세대로

만사불여오심죽 萬事不如吾心竹 만사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연연연세과연죽 然然然世過然竹 그렇고 그런 세상 지나가는 대로 살리라.

이 시는 대‘죽(竹)’자를 이두 식으로 풀이하여 ‘대로’로 해석하는 특이한 시로 한시의 격을 무시한 파격 시다. 불가에서는 예로부터 이 시를 신라시대 부설(浮雪)거사가 지은 것이라 여겨왔다. 그러나 이 시가 김삿갓(김병연)의 시집에 수록되어 현재 전해지고 있다. 이는 후인이 김삿갓의 시를 수집하여 시집을 만들 때 일부의 시가 잘못 김삿갓의 시로 착각되어 포함되었으리라 여기고 있다.

부설 거사는 어려서 출가하여 불국사에서 스님이 되었는데 총명 영특하여 식견이 뛰어났다고 한다. 영조(靈照), 영희(靈熙) 두 스님과 도반이 되어 두류산에 가서 경론을 연구하고 법왕봉 아래 묘적암(妙寂庵)을 짓고 10년간 정진하다가 오대산으로 가던 도중 두릉(杜陵)의 백련지(白蓮池)에 있는 구무원(仇無寃)의 집에 며칠 머물다 주인의 딸 묘화(妙花)가 스님에게 연정을 품고 병이 나게 되어 구무원의 청에 의해 숙세의 업연을 어찌할 수 없다 하고 묘화를 아내로 맞아 들여 환속을 하여 거사로 도를 닦았다. 영조, 영희의 만류를 뿌리치고 세속에 남아 공부를 하다 아들 등운(登雲)과 딸 월명(月明)을 낳고도 도를 이루었다고 한다. 죽은 뒤 영조, 영희 두 스님이 찾아와 화장을 하고 사리를 수습하여 묘적암 남쪽에 부도를 세웠다.

요산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12월 제85호

파조타(破竈墮)

오조 홍인의 10대 제자 중에 혜안국사(642~709)의 법을 이은 파조타(破竈墮) 화상은 생몰 연대를 확실히 알 수가 없으나 , 그의 이름이 그렇게 불리어진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스님이 하루는 제자들을 동반하고 어느 산언덕 사이로 들어갔는데 한 신당(神堂)이 있었습니다. 그 당 안에는 부뚜막이 안치되어 있었는데, 여기서 기도하면 영험이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여, 원근으로 사람들이 모여 들어 제사가 그치지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물(祭物)로 그 부뚜막에 걸린 솥에 많은 생물들이 삶겨 죽임을 당했습니다. 시자를 데리고 들어선 스님은 주장자로 부뚜막을 세게 세 번 두들기고 호통을 쳤습니다.

“너는 본래 벽돌과 흙으로 이루어진 것일 뿐인데, 성스러운 영(靈)이 어디서 왔으며 신령스러운 효험은 어디서 일어나 이렇게 많은 생물의 목숨을 손상하느냐” 하고 꾸짖으면서 주장자로 또 세 번 두들기니 부뚜막이 바로 기울어져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잠시 후 한 푸른 옷에 높은 관을 쓴 사람이 나타나 스님 앞에 절을 하며 말했습니다. “저는 본래 이 신당의 조왕신(竈王神)입니다. 오랫동안 업보를 받고 있다가 오늘 스님의 무생설법(無生說法)을 듣고 이미 이곳을 벗어나 천상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찾아뵙고 감사 드립니다” 라고 말하자, 스님이 말씀하시길, “이는 너의 본래 가진 성품일 뿐, 내가 지어내어 한 말이 아니다”라고 말하자, 신은 다시 두 번 절하고 사라졌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스님에게는 부뚜막(竈)을 파했다 해서 ‘파조타’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습니다.

위 파조타스님의 고사(故事)에서 우리들이 눈여겨 볼 것은 본디 부뚜막이란 벽돌과 흙으로 이루어 진 것으로 원인(因)과 조건(緣)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온갖 사고와 인식들도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일 뿐인데, 여기에 온갖 잡다한 것들을 넣어 삶기도 하고 때로는 볶기도 하며 갖가지 알음알이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집착하는 마음, 고정된 마음, 분별하는 마음을 부수어 무너뜨릴 때만이 우리의 본래면목은 자연히 들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하면 무심한 선의 절대경지에 들어가서 모든 들리는 것이 무생법문(無生法門)으로 들리게 되어 무심한 선의 절대경지에 들어 청정한 본래심을 직접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해스님(동국대강사) 글. 월간반야 2005년 8월 제5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