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경스님─유혹은 결정적인 순간에 다가온다

*유혹은 결정적인 순간에 다가온다.* = 보경스님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애욕에 빠진 사람은 횃불을 들고 바람을 거슬러 달리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손을 데는 화를 입게 된다.” [42장경]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듣는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과 관련이 있으리라는 생각까지는 잘 하지 않는다.

세상에 나와 상관없는 일이 하나라도 있던가? 모두가 나의 잠재 적인 모습이다.

부처님과 보살들이 중생에게 연민의 마음 을 일으키는 것은 일체를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 다.

최근 뉴스에 우리나라 여성의 사망 원인 중 세번째가 자살이라고 했다.

슬프다.

도대체 얼마나 희망을 못 느꼈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단 말인가.

사회의 지도층, 종교인들은 깊은 참회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욕망을 이해하지 못하 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들은 세상을 쉽게 봤을 것 이다.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다 얻을 수 있으리란 생각 을 했을 것이다.

그들은 “하루를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 면 그 길을 따르리라”는 호기를 부렸을지도 모른다.

안 된다.

이런 자세는 결코 삶에 도움되지 않는다.

반짝이는 하루보다는 덜 반짝이는 열흘, 지루한 한 달, 밋밋한 일 년을 살겠다는 진지한 자세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횃불만 보고 달려 나간다.

욕망이라는 횃불이 얼마나 위험한가.

왜 인간은 그토록 매번 뜨거운 맛을 보고 나서야 황폐해진 심신을 거두는 것일까.

우리는 모두 보고 알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손에 타고 있는 불을 보면서 말한다.

“당신은 몰랐단 말인가.

그 토록 위험한 욕망이라는 괴물을!” 하지만 자신도 탐욕이 라는 횃불을 쥐고 있음을 안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하시드 신비주의자이며 하시디즘의 시조인 바알 셈 (1690-1760)에게 그의 제자가 유혹을 피할 수 있는 법 에 대해 물었다.

그는 유혹을 피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지금 당장은 유혹받을 일도 없으며 그만한 자격도 없다 는 말을 했다.

제자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말했다.

“유혹이라는 악마는 너를 쫓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네가 쫓아가고 있다.

당장은 그런 일이 일어 나지 않는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에는 내가 너를 돌봐 줄 것이다.” 유혹은 마지막 절정에 온다.

인간사 장애는 뭔가 결정 해야 할 때 모습을 드러낸다.

이 절정을 잘 넘어서면 안락을 얻을 수 있다.

중국에서 위진남북조 이래로 300 년간은 불학과 불교의 분위기가 충만했던 때다.

수 왕조 를 개국한 수문제 양견에 이어 황제에 올랐던 수양제 양광은 부친과 형을 시해하고 황제에 올랐는데, 당시 그는 득의양양하여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본래 부귀를 추구하는 마음이 없었거늘, 부귀가 사람을 다그치며 올 줄을 누가 알았으랴.” 세상이 자신을 유혹했다는 뜻이니, 참으로 대담무쌍한 말이다.

훗날 나라가 망하고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게 되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도리에 어긋나게 들어 오면 도리에 어긋나게 나간다.” 이것은 증자가 말한 “말[言]이 도리에 어긋나게 나간 것은 어긋나게 들어오고, 재물이 어긋나게 들어온 것은 또한 어긋나게 나간다”는 말과 흡사하다.

사물의 적절한 이치를 이해한다면 우주를 더 크게 유용할 인연이 다가 온다.

그는 이미 경이롭고 큰사람이다.

보경스님─어디에 있든지 바른 행을 하라

어디에 있든지 바른 행을 하라

-보경스님-

값진 세속의 삶이란 부처님이 라자가하 죽림정사에 계실 때의 일이다.

그 무렵 앵무라는 바라문이 볼 일이 있어 어느 거사 집에 머물고 있었다.

바라문은 그 거사에게 ‘때때로 찾아뵙고 존경하며 가르침을 받을만한 스승’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했다.

거사는 서슴없이 부처님을 뵈라했다.

앵무 바라문은 죽림정사로 부처님을 찾아가 여러 가지 궁금한 점을 여쭈었다.

“도를 닦으려면 집에서 하는 것이 좋습니까, 집을 떠나서 하는 것이 좋습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도를 닦는 사람이 집에 있느냐, 집을 나오느냐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보다는 삿된 행을 하면 나는 그를 칭찬하지 않는다.

삿된 행은 바른 지혜를 얻지 못하고 법답게 살도록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에 있거나 나오거나에 관계없이 바른 행을 하면 나는 그를 칭찬한다.

왜냐하면 바른 행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바른 지혜를 얻으며 법다움을 알기 때문이다.” 바라문이 물었다.

“그렇다면 큰 공덕과 이익을 얻으려면 집에 있는 것이 좋습니까, 집을 나와서 하는 것이 좋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부단한 자기부정의 터널 지나면 눈부신 ‘대긍정의 세계’ 펼쳐져 “그것은 일정하지 않다.

집에 있는 사람으로서 큰 재앙이 있고 다툼이 있으며 원망과 미움이 있어서 삿된 행을 하면 큰 결과를 얻지 못하고 공덕이 없다.

또 집을 나온 사람이라 해도 작은 재앙이 있고 다툼이 있으며 원망과 미움이 있어서 삿된 행을 하면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집에 있는 사람으로서 큰 재앙이 있고 다툼이 있으며 원망과 미움이 있더라도 바른 행을 실천하면 큰 과보와 공덕이 있다.

또 집을 나와 도를 배우는 사람이 작은 재앙이 있고 다툼이 있으며 원망과 미움이 있더라도 바른 행을 실천 하면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진실하며 허망한 말이 아니다.” (중아함 앵무경) 요즘 우리절의 경전강좌로 (치문(緇門))을 시작했다.

이 책은 북송(北宋) 택현온제선사가 (치림보훈(緇林寶訓)) 1권을 찬술한 이래로 여러 차례 증보한 것을 고려 태고보우국사가 원나라 유학시절 (환주지현 본)을 가지고 온 이래 출가자를 위한 지침서가 되었다.

출가자들의 삶이지만 재가자들에게도 유용한 것이 없지 않으리란 생각에 교재로 택했다.

수강자들이 얼마나 흥미를 가지고 따라올지 속단하기 어렵지만, 잘 해볼 것이다.

부처님은 출가와 재가의 구분보다는 각자의 환경에서 바른 삶의 자세와 그렇지 않는 삶의 비교를 통해 큰 공덕의 성취를 말씀하셨다.

황금이 일차적이라면, 황금으로 만들어지는 모든 물건과 그에 따른 가치는 이차적이다.

삶도 마찬가지여서, 외형이 이차적이라면 그 사람이 추구하는 삶의 자세가 일차적이다.

최선의 상태에서는 모든 이차적인 것이 꽃가루처럼 떨어 져버린다.

최근 스티븐 잡스가 세상을 떠났다.

특히 그가 젊어서부터 선불교에 심취하였고, 여기에서 얻은 직관이 사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다.

“stay hungry stay foolish-항상 갈망하고 우직하게 살라.” 2005년,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그가 했던 유명한 말이다.

어느 늦은 오후에 (방거사어록)을 뒤적이다가 발견한 “편의를 얻으면 편의에 떨어진다(得便宜是落便宜)”는 말이 여기에 겹치면서 많은 생각에 잠기게 했다.

부단한 자기부정의 터널을 지나면 눈부신 대긍정의 세계가 펼쳐 진다.

이것이 선의 정신이며 진실되고 허망하지 않는 보배로운 길이다.

[불교신문]

보경스님─수행은 거문고 줄을 다루듯이

수행은 거문고 줄을 다루듯이

-보경스님-

道, 속도보다 진솔한 자세 중시 한 사문이 어느 날 밤에 가섭부처님의 (유교경)을 외우는 중이었는데, 그 소리가 슬프면서도 급하고 회한에 가득 차 물러서려는 것처럼 들렸다.

부처님께서 사문에게 물으셨다.

“너는 출가하기 전에 집에 있을 때는 무슨 일을 하였느냐?” 사문이 대답했다.

“저는 거문고를 즐겨 탔습니다.” “거문고 줄이 느슨하면 어떻게 되는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거문고 줄이 너무 팽팽하면 어떻던가.” “줄이 끊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팽팽하지도 느슨하지도 않으면 어떤가.” “모든 소리가 제대로 나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문이 도를 배우는 것도 이와 같다.

마음이 적절하고 조화로우면 도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도에 대하여 너무 급한 생각을 내면 몸이 피로해지고, 몸이 피로해 지면 마음에도 싫증이 나고, 생각에 싫증이 나면 번뇌가 일어나 수행에 퇴굴심이 생기게 된다.

수행에 퇴보가 일어나면 죄업만 더하게 된다.

마음이 항상 청정하고 즐거워야 도를 잃지 않을 것이다.” 너무 급하면 몸이 피로해져 싫증나고 퇴굴심 생기게 돼 삶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가 가진 재능은 천차 만별이어서 일정한 척도를 가지고 말하기도 어렵다.

일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느냐의 관건은 첫째가 재능 이라면 둘째는 그 일에 대한 집중력의 여부일 것이다.

이는 선천적인 면과 후천적인 면에서 가장 우선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

수행도 마찬가지어서 사람의 근기가 있고 원하는 수행방법에도 편차를 보인다.

여러 사람이 길을 나서도 빨리 가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느리게 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런데 누가 멀리 갈 수 있는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우리 몸은 자신이 겪어내는 환경에 따라 단련되어진다.

트레이닝에 있어서 기본적인 규칙은 절대적인 연습량은 줄이더라도, 휴식은 이틀 이상 넘기지 않는 것이라 한다.

근육은 잘 길들여진 소나 말 같은 사역동물과 비슷하여 주의 깊게 단계적으로 부담을 늘려 나가면 그 훈련에 견딜 수 있도록 적응해가는 이치이다.

수행은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극복해가는 먼 과정이다.

최근에 내가 좋아하는 무라카미 하루끼의 산문집을 즐겁게 읽었다.

아마추어 마라토너이자 마니아인 그가 올림픽 마라토너인 1980년대 세계 마라톤의 영웅이었던 세코 도시히코(보스턴 마라톤 2회, 런던 및 시카고 마라톤 대회우승 등)에게 달리고 싶지 않을 때, 달리기를 그만 두고 집에서 잠이나 자고 싶어지는 때는 없는지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늘 그렇습니다!” 인간의 불행은 모두 중심을 벗어난 데서 비롯된다.

밸런스와 규칙을 어기고서 삶을 도모할 수 있던가.

삶은 실재의 다른 말이다.

우린 어차피 살아가야하고, 그 가운데서 절절할 수만 있다면 즐거움이 일어난다.

즐거움은 조화로운 삶의 자세가 가져오는 축복이다.

이도 하나의 도이다.

불행은 지옥 같은 삶이다.

지옥은 우리를 지치게 하고 좌절하게 만든다.

지옥은 불균형의 상태이다.

따라서 지옥은 정상에서 가장 멀리 벗어난 세계이고 극락정토는 가장 조화롭고 정상적인 세계라 할 수 있다.

어디를 가고 오며, 무엇을 얻고 잃으며, 어떤 삶을 영위하느냐의 문제는 균형감각에서 기인함을 잊지 말라.

크건 작건, 도는 진솔한 자세를 중시한다.

속도를 잊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