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부처님같이/ 법장스님 ◐ 우리의 산하(山河)가 고운 꽃으로 장엄(藏嚴)되어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를 이룬 아름다운 계절에 석가모니 부처님(釋迦牟尼佛)께서 만중생(萬衆生)의 어버이로 오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과거세(過去世)에 이미 성불(成佛)하시어 생사가 없으신데 무명(無明; 어리석음)을 삶의 주춧돌로 삼고 고통 속에서 끝없이 허덕이는 사바세계(娑婆世界)의 가엾은 우리들을 구제하여 주시고자 자비방편(慈悲方便)으로 인상(人相)을 택하시어 오신 것입니다.법화경(法華經)에 이르시기를, “나는 모든 성인(聖人) 중에서 가장 높으며 세간(世間)의 아버지이다. 이 세상은 다… 법장스님─우리도 부처님같이 계속 읽기
[태그:] 법장스님법문
법장스님─부처님이 그리워서
부처님이 그리워서 전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스님
사바세계의 교주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멸도(滅度)하신 후 부처님의 진상(眞相)이 점점 멀어져가니 세상에서 인연 중생이 원력을 세워서 부처님의 거룩하신 상을 지극한 정성으로 조성하여 모시게 된 것입니다.
그 덕분에 제자들이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부처님의 상에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고, 그 선업으로 인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닫게 되었으니 이로써 부처님의 형상을 통하여 우주에 가득하시어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시며 이름 지을 상이 없으신 부처님의 실상을 뵙게 되었고 아무 말씀이 없으신 부처님의 상을 통하여 일체 세계의 진리의 말씀을 가슴 깊이 듣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상(像)을 모시는 것은 상이 있는 도리에서 상이 없는 도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불에도 타고 물에도 풀어지고 용광로에도 녹고 세월에 무너지는 유형의 부처님 상에 예경한 인연을 통해 원히 변치 않는 광대묘용한 무형의 부처님의 위신력의 세계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실상이며 변치 않는 근본성품(根本性品)을 우리의 마음속에서 깨달아 중생이 본래 부처님임을 알고 오늘 성상의 부처님을 조성하여 모시는 인연을 계기로 각자 자신을 부처님으로 조성하여 가는 불사를 발원하여야겠습니다.
오늘이 부처님을 봉안하여 모신 불사의 회향일이 아니라 대중 모두 부처님으로 조성되는 성불기도의 입재일로 맞이하였으면 합니다.
유상(有相)을 통해 무상(無相)으로 가는 이치를 명백히 깨달아 앞으로 이 대웅전에 오셔서 참배하시는 분들은 거룩하신 성상 앞에서 정성을 다하여 선연을 맺고 공덕을 짓고 발심(發心)하고 정각(正覺)에 이르기 위하여 정진하여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부처님의 성상을 처음 조성하여 모신 내역이 조상공덕경(造像功德經)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는데, 시간상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루는 제석천(帝釋天)이 부처님께 도리천(忉利天)에 오르시어 여름 석 달을 지내시면서 어머니이신 마야왕비(摩耶王妃)를 위하여 설법하여 주실 것을 간곡히 청하니 부처님께서 이에 응하시어 도리천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때에 평소 부처님을 잘 모시던 우전왕(優塡王)이 부처님을 그리워하여 매일 목마르게 하늘을 우러러 보았으나 뵐 수가 없자 나라 안의 훌륭한 장인(匠人)에게 부처님의 형상을 조성케하여 모시고 예배공양하려 하니 이에 비수갈마천(毘首羯磨天 : 제석천의 신하로 공작을 맡은 신)이 장인으로 변화하여 “내 솜씨가 세상에서 제일이다.”라고 하자 왕은 곧 향나무를 택하여 스스로 어깨에 메고 천장(天匠)과 더불어 도끼로 나무를 쪼개니 그 소리가 위호 삼십삼천(三十三天:도리천)에까지 뻗쳐 부처님의 회상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에 부처님께서 여러모로 왕의 공덕을 찬탄하시고 멀리서 보리(菩提)의 수기를 주셨으니 이로 인하여 이 세상에 부처님의 성상이 모셔지기 시작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성상을 모신 공덕에 대하여 제석천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의 형상을 칠보, 놋쇠, 붉고 흰 동, 백철, 납, 주석, 철, 나무, 진흙으로 조성하거나 아교, 채색으로 장엄하기를 스스로 했거나 남을 시켜 했거나 모두 불도를 이룬다.
심지어는 동자의 유희나 풀, 나무, 붓, 손톱을 가지고 불상을 그린 사람도 불도를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또 관불삼매경(觀佛三昧境)에서는 우전왕이 쇠를 녹여서 부처님의 성상을 조성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부처님께서 쇠불상을 보고 우전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세에 크게 불사를 지으리니 내가 멸도 후 나의 모든 제자들을 너에게 부촉한다.
만약 어떤 중생이 나의 형상을 조성하고 여러 가지로 공양을 올린다면 그 중생은 후세에 반드시 염불청정삼매(念佛淸淨三昧)를 얻으리라.”고 하셨으니 부처님의 성상을 조성하여 모시고 공양을 올린 공덕에 대하여 무딘 제 재주를 가지고 어찌 다 설명드릴 수 있겠습니까? 누구든지 부처님의 성상을 조성하여 모시면 항하사겁(恒河沙劫)의 생사의 죄를 멸하고 미래에 미륵부처님의 처음 회상에서 모두 해탈을 얻을 것이고 세세생생에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천상 인간 중에 태어나면 금색신(金色身)을 받고 제왕이나 천주(天主)가 된다고 하시며 축생이라도 부처님 상에 엎드려 절하면 해탈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축생에 대하여 예를 들어 말씀드리자면 부처님 당시에 해율제일(解律第一)인 교범바제(憍梵婆提)스님은 전생에 소의 몸이셨을 때 물과 풀을 구하러 다니다가 정사(精舍)를 우측으로 돌았는데 이 때 부처님의 존귀하신 용모를 뵙고 환희심을 내어 절을 한 그 복으로 인하여 해탈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거룩한 인연입니까? 어리석기 짝이 없는 축생도 이런 복락을 누리거늘 사람이 신심을 내어서 정성을 다해 부처님의 성상을 조성함에 있어 그 공덕을 어찌 다 말로 옮기겠습니까? 저 수(隋)나라 때 응관사(凝觀寺)의 법경스님(法慶大師)은 개황 3년에 높이가 한 장 육척(一丈六尺)되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조성하시다 완성치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법경 스님이 돌아가신 날 먼저 돌아가신 대지 스님(大智大師)이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서 말씀하시길 “내가 염라대왕 앞에서 법경스님을 보았는데 그 때 법경 스님이 조성하시던 석가모니 부처님상이 계단에서 내려 와서 예를 올리는 염라대왕에게 ”법경스님이 나를 조성하시다가 아직 마치지 못했는데 어찌하여 죽게 하였는가?“하시니 염라대왕의 좌우에 신하들이 ”법경 스님의 수명은 아직 마칠 때가 안 되었으나 먹을 복이 다하였습니다.
“하니 이에 염라대왕이 명하되 ”법경 스님에게 연꽃 잎을 주어서 그 복된 일을 마치도록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법경 스님이 다시 살아나셨는데 저승에서 있었던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 대지 스님과 똑같았으며 그 후 법경 스님은 공양하실 때에 연꽃잎으로 만든 음식 외에는 목에서 내려가지 않아서 연꽃잎만을 잡수시며 석가모니 부처님상을 원만히 조성하여 모시고 수년을 더 사셨다고 『법원주림(法苑朱林)』이라는 책에 실려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생사를 초월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성상을 조성하는 사람도 불생불멸의 존재로서 영원한 생명이신 부처님을 믿고 정성을 다하여 조성에 임하면 그 공덕으로 자신의 생사도 초월할 수 있는 불가사의한 가피가 있다는 것을 법경 스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호력에는 예와 지금이 없고 이곳과 저 곳이 없으니 과거 수나라 법경 스님에게 있었던 가피가 지금 우리에게 없을 수는 없을 겁니다.
우리도 대원력(大願力)을 세우고 정성을 다하여 불사에 임하면 우리의 안목(眼目) 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신통의 세계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석가모니 부처님상을 모시면서 이 거룩한 불사를 통해서 진실한 부처님 의 상을 눈에 담고 마음에 담아서 세세생생 부처님의 세계에 태어나야겠습니다.
끝으로 부처님께서 사위성 기원정사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부처님을 모시는 공덕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전해드리겠습니다.
부처님을 받들어 섬기며 정성으로 예배하면 다섯가지 공덕이 있다 하셨으니, 첫째는 얼굴이 단정해지고, 둘째는 음성이 맑고 청아해지며, 셋째는 부귀하게 되고, 넷째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며, 다섯째는 목숨을 마치면 하늘에 태어나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 이유로는 부처님 모습을 뵙고 환희하는 마음을 가지기 때문에 얼굴이 단정해지고, 부처님께 귀의하고 찬탄하기 때문에 목소리가 곱고 청아하게 되며, 부처님을 뵐 때 꽃과 향 등불로 공양을 올리기 때문에 부귀하게 되며, 부처님전에 겸허한 마음으로 고개 숙여 예배하며 마음에 집착을 버렸기 때문에 좋은 집과 하늘에 태어난다고 하셨습니다.
거룩하신 석가삼존상(釋迦三尊像)을 조성해 모시고 점안식에 동참하신 여러 불자님께서는 이 무량한 공덕을 지은 인연으로 모든 업장을 소멸하시고 속히 성불하십시오.
성불합시다.
– 석가삼존상 점안식 에서 –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은 9월 11일 새벽 입적하시기 전 시자 진광 스님의 요청에 따라 평소 법문 시 불자들에게 즐겨 하시던 말씀을 글귀로 남겼다.
법장 스님이 시자 스님의 노트 뒷장에 친필로 남긴 내용은 다음과 같다.
我有一鉢囊 나에게 바랑이 하나 있는데 無口亦無底 입도 없고 밑도 없다.
受受而不濫 담아도 담아도 넘치지 않고 出出而不空 주어도 주어도 비지 않는다.
법장 스님은 또 시자 스님을 비롯한 후학들에게 “크게 한 소리 버럭 지르매 다시금 별스러운 의심이 없음이로다.
그르쳐 가지 말고, 그르쳐 가지 말지어다”라고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을 엄히 경계하는 말씀을 남겼다.
조계종 총무원은 총무원장 권한대행 현고 스님의 담화문 발표와 함께 법장 스님이 남긴 이 같은 친필 유훈을 공개했다.
법장스님─마음을 비우고 실천하는 결제
마음을 비우고 실천하는 결제
법장스님
(전조계종 총무원장) 오늘은 매년 다가오는 10월 15일 결제일입니다.
또한 우리는 결제 때 되면 매년 100일 기도 입재를 하지요.
결제와 기도 입재를 하면서 우리가 새롭게 마음을 가다듬지 않으면 결제는 하나의 형식일 뿐입니다.
기도 입재도 역시 세월만 갈 뿐이지 내가 바라고 원하는 뜻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에 화엄경에 있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단 여기서 신도님들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첫째는 내가 여기서 어떤 얘기를 하더라도 여러 스님들한테서 다 들은 얘기이지만 그렇게 가볍게 생각해서 넘기지 말고, 또 설혹 제가 어려운 얘기를 하더라도 듣기 정말 난처해서 들어도 뭐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하지 말고 자세히 들어서 새기고 새겨서 쉬운 얘기라도 여러분께서는 실천해 옮길 때만이 여러분들이 진실한 결제를 할 수 있고, 또한 진실한 기도 입재를 해서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결제는 승속을 막론하고 똑같이 결제에 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님들이 해야 하는 것과 신도님들이 해야 하는 것을 약간 구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스님들이 지켜야 되는 계는 중계라 해서 많고, 여러분이 지켜야 하는 것은 가벼우면서 또한 적고, 그렇기 때문에 구분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결제를 임하면서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진심으로 알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부처님이 무엇을 가르쳤는가 왜 우리한테 가르치는 부처님의 말씀이 3천년 전부터 내려오고 있는지, 우리는 왜 그것을 본받아야 되는지 이것을 진실로 알고 싶으면 마음을 비우시기 바랍니다.
아주 텅 빈 그릇으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면 부처님께 여러분이 소원, 대원 엄청나게 많은 욕심을 갖고 있고, 가지각색으로 각기 다를 것입니다.
그런 소원을 여러분들이 정말로 성취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여러분들의 마음 그릇을 텅 비워서 빈 그릇으로 들어오세요.
그래야 그 빈 그릇에 가득 채워 가지고 가실 수 있고, 원하는 것만 담아 가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을 가득 채워서 부처님께서 아무리 달라고 해도 부처님이 금은 보화를 주셔도 들어가지를 못하고 그냥 넘치게 됩니다.
원리망상급제취(遠離妄想及諸趣) 하고, 영심소향개무애(令心所向皆無擬) 하라.
여러분들이 정말로 짧게 일어나고, 길게 일어나고, 가까이 있고, 멀리 있고, 중요한 것이건 그런 번거로운 생각, 분별심을 결코 일으키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유스러움을 얻을 수 있고, 해탈을 얻을 수 있고, 가장 알기 쉽게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부처님께서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듣고 배우면서도 모르고, 입으로 헤아리고 귀로 들으면서도 실천해 옮기지 못하고, 욕심만 가득 가지고 와서 쌀, 돈 가지고 와서 “대자대비 부처님, 이루어 주십시오.”하고 비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바라기 전에 내 마음을 청결하게 아주 비우고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법문도 여러분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들으셔야지 법당에 나가면서도 “오늘 원장스님께서 이런 법문을 했어.”라고 다시 되새길 수가 있고 또한 집에 가셔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집에 있어도 조계사 법당에서 와서 저의 법문을 듣는 것이고, 또 가면서도 여러분들이 바로 법문을 듣는 것이요.
또한 신발을 신고 나가면서도 설혹 일어서서 나가면서도 법문을 듣는 것입니다.
그 법문을 잊지 않고, 가지고 다닐 때만이 진실한 기도를 하고, 진실한 기도를 하고, 결제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여기서는 실컷 듣고 들을 때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고, 신발 신고 나가면서 “원장스님이 무슨 얘기를 했지?” 이렇게 물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 마음에 분별심이 가득 차 있었구나.’하는 것을 되돌아보시고, 또 참회를 하고, 스스로 경책을 하셔야만 한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오늘은 여러분들한테 결제 또한 기도 입재라는 딱딱한 산중에서 하는 법문보다는 부처님 말씀 중에서 몇 가지를 정리를 해서 새로운 신행 활동에 전기를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져 보았습니다.
세존당입설산중(世尊當入雪山中 )이요, 일좌부지경육년(一座不知經六年 )이라, 인견명성운오도(因見明星云悟道)하고 언전소식변삼천(言詮消息邊三天)이라.
세존께서 수행을 하러 들어가서 설산으로 들어가서 한번 앉은 다음에 6년이 어떻게 지나 간 줄을 몰랐습니다.
여러분들도 참선을 한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종교를 넘어서 용맹정진을 다섯 번을 했습니다.
그런데, 참선을 할 때 시계를 앞에 두더라도 보지 않으면 한 30분은 훌쩍 지나가는데, 일단 시계를 한번 보게 되면 그때부터 그 이후 5분은 왜 이렇게 안 지나가고, 그러다가 5분은 남아 있는데, 입승스님께서 죽비를 치셔야 하는데, 세상에 앉아서 부글부글 속이 끓는 것이 입승스님이 왜 죽비를 안 치시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설산에 들어가서 6년이 지났는지 한 시간이 지났지 몰랐습니다.
새벽에 별을 보고 깨달으신 뒤에 그 소식을 온 세상에 두루 핀 것이 바로 오늘까지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때 핀 뜻이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들이 가장 자유스럽게 사는 것, 가장 편안하게 사는 것, 가장 근심 걱정 없이 사는 것 더 이상 바랄 것도 욕심낼 것도, 시기할 것도 없는 삶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와 같이 설산에 들어가서 6년 동안을 단 한순간처럼 그렇게 보내신 것을 받들어 우리도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 10월 15일부터 정월 15일까지 결제 기간이라 해서 우리가 오늘 바로 10월 15일날 결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는 돌아다녀서도 안 됩니다.
결제해서 정진하는 스님들에게는 계율이 얼마만큼 엄격한 규칙이 있는가 하면은 결제 중에 돌아다니는 스님은 속된 얘기로 ‘때려 죽여도 살인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렇게 엄한 규칙이 있습니다.
선방에 가보면 신문, 잡지, 텔레비전 등을 일체 볼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문 열고 들어갈 때 소리가 난다고 해서 문고리에 종이를 싸서 소리를 다 제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엄한 것이 우리 승가의 수행자의 결제인 것입니다.
그럼 이 결제는 왜 하는가? 결제를 하는 것은 선정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선정이란 것이 무엇인가? 바로 흔들리지 아니하는 지혜, 깨달음을 말합니다.
거기에는 죽고 사는 것도 없고, 좋고 싫은 것도 없고, 많고 적은 것도 없는 아주 자유스러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 우리는 결제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불자들이 이를 마땅히 본받아 결제에 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결제 중에 스님들은 어떤 공부를 하느냐 하면 물론 정진을 위해 화두를 챙겨 듭니다.
어떤 방법으로 하느냐 하면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에는 삼학이 있습니다.
세 가지 길이라는 것은 삼족정과 같습니다.
그 삼족정이라는 것은 옛날 무쇠솥을 보면 다리가 네 개가 아니라 세 개가 달려 있는데, 쇠솥의 세 다리와 같습니다.
계정혜라는 것은 삼학인데, 바로 이것은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계정혜 삼학이 불교 수행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가 하면,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전에 수발타라고 하는 120세로 가장 많은 나이로 출가한 제자에게 바로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이 29세때 출가하여 착한 도를 구했다.
수발타여, 내가 성불한 지 이미 50년이 지났는데, 이는 계정혜 삼학을 실천했기 때문이다.-배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의 설법의 요점도 이것이고, 내가 삼학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삼학을 실천하지 않으면 수행을 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계정혜’를 비유로 말하면 계라는 것은 우위를 뜻하고, 정은 동요하지 않는 흔들림이 없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혜는 스스로 지혜를 뜻합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계를 잘 지키면 탐심이 없어지고, 정을 잘 닦으면 진실로 성질내는 것이 없어지고, 혜를 잘 닦으면 어리석음은 생각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탐진치(貪瞋癡)’이 삼독이 다 없애지면 아주 편안해 지겠지요.
그러니까 탐진치 삼독을 없애는 것이 수행입니다.
탐진치 삼독만 없어지면 우리는 자유스럽고, 정말로 서로 우애도 지키고 서로 신의도 깨지지 않고 얼마나 좋겠어요.
화기애애해 집니다.
밥을 먹어도 좋고, 안 먹어도 좋고, 잠을 자도 좋고 안 자도 좋은 이런 계정혜 삼학은 탐진치 삼독을 없애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계정혜 삼학은 또한 팔정도와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즉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는 혜에 해당하고,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은 계에 해당하고, 정념(正念), 정정(正定)은 정에 해당된다고 부처님께서는 가르쳤습니다.
그러면 바로 불교에서 보면 계정혜 삼학이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요체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팔정도가 삼학이고, 삼학이 곧 팔정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삼학을 잘 닦으면 삼독심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서 열반을 얻게 되니 삼학이야 말로 불교의 시작이고, 수행의 시작이요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경전들은 불교를 신행하는 사람이 닦아야 할 덕목으로 한결같이 삼학을 들고 있습니다.
삼학을 쉽게 다시 한번 풀이하면 첫째 계학은 그릇과 같습니다.
그릇이 튼튼하면 물이 안 새고, 어느 것을 담아도, 부스러지지 않습니다.
보살계를 받는다, 오계를 받는다는 것은 그릇을 튼튼하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릇이 튼튼하지 않으면 물을 부어도 그냥 빠져버리고, 많이 부으면 그릇이 깨져버리는 것입니다.
계라는 것은 그릇과 같습니다.
계를 닦는 것은 스스로 산란스럽고 번거로운 마음을 방지하여 산란하지 않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담긴다는 옛말이 있듯이 정신이 맑고 건전하기 위해서는 늘 몸가짐을 단정히 해야 합니다.
내가 몸가짐과 말이 항상 헛되다 보면 다른 사람들이 나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또한 내 몸가짐이 흐트러져 버리면 남이 나를 따라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라는 것은 이런 것을 스스로 튼튼히 하는 종교인 것입니다.
불교는 자력 종교입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경우 타력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믿으면 천당 가고,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아주 단순적 논리, 피동적 논리 종교입니다.
그러나, 이 우리 종교는 내가 스스로 만들어서 복도 내가 만들고 지옥도 행복도 내가 만드는 것이요, 불행도 내가 만드는 것이고, 자업자득입니다.
인과 응보인 우리 불교는 자력의 종교입니다.
내 스스로 만들어 내는 종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바르고 청정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을 인간은 가지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오관입니다.
분교 시기 즉 오관을 즉 비유하는 게는 감각기관에서 일어나는 부정한 욕망과 망상을 계를 지킴으로써 안정하고 번뇌 망상을 다스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를 지킴으로서 안정을 얻고 번뇌 망상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관인 눈, 귀, 코, 입, 몸 이것에서 스스로 만들어 내는 좋고 그르다 분별하고, 감촉이 부드럽다, 거칠다, 맛있다, 맛없다, 냄새가 좋다, 그르다 이것이 번뇌 망상을 만들어 냅니다.
만약 이것에 끌려 다니다 보면 우리는 정말로 참된 맛을 볼 수 없고, 인간다운 삶을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를 잘 지켜야 합니다.
둘째는 정학인데, 정학을 비유하면 물과 같다.
이를 정수라고 하는데, 정을 닦으면 마음이 잠자는 물결처럼 고요해 집니다.
물이 맑으면 바닥까지 보입니다.
‘수불립파(水不離波)하고, 파불립수(波不離水)한다’고 합니다.
물이 파도를 여의지 아니하고 파도가 물을 여의지 아니한다.
물은 물인데, 파도가 일어나는 것도 바람 때문입니다.
바람이 잔잔해지면 파도가 잔잔해지고, 파도가 잔잔해지면 물은 잔잔하게 됩니다.
바로 내가 오관이라는 감각기관에 의해서 파도가 일어나면 땅 밑까지 전혀 보이지 않고, 항상 출렁되고, 항상 고통스럽고 짜증스럽고 원망스럽습니다.
그런 마음이 가라앉지 않습니다.
정이란 마음을 한 곳으로 동요가 없이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 속의 참된 물결이 잠들고 번뇌의 거친 파도가 가라앉으면 잃어버린 자기 본래의 정숙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파도가 가라앉으면 땅 밑까지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본래의 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물을 계속 병에 넣고 흔들면 병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계속 움직이면 안 보입니다.
여러분들 마음을 흔들지 말고 내버려 두면 스스로 고요하게 내가 잘했는지 잘못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질날 때 생각하면 내가 다 잘한 것이고, 남이 잘못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 성질이 푹 가라앉고 난 다음에 “내가 신랑한테 잘못했다.
내가 자식한테 너무 한 거지.
내가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되겠다.” 이렇게 스스로 용서하고 이해하고 포용하실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대해 사상인 것입니다.
정을 얻기 위해서는 첫째는 세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신, 조식, 조심.
몸가짐을 가지런히 호흡을 조정하고 정신을 조정해야 한다는 것이 이 세 가지 마음에서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몸을 가다듬어야 하고, 두번째는 호흡을 가다듬어야 하고, 세번째는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어야 정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참선의 수행 방법입니다.
참선 할 때 첫째 화두를 딱 들고 허리를 들고 배꼽 밑 단전에다가 이 세상의 기운을 전부 다 불어 놓은 것입니다.
눈은 자기 스스로 콧등을 쳐다봅니다.
그러면 눈은 반개가 되고, 단전에 힘을 넣었다가 참을 만큼 참았다가 내쉴 때는 입으로 최대한 천천히 내뱉고, 들이쉴 때는 코로 내쉬면서 이것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어제 저녁에는 기분이 좋았다가 오늘 아침에는 신랑이랑 싸우고 애들이랑 다투고 하는 그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어제 친구를 만나서 저녁에 만찬 식사를 잘했는데, 신랑이 늦게 들어오니까 속이 바글바글합니다.
좋았던 기분이 오늘 아침에는 왜 나쁜가? 이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마음을 스스로 책임질 줄 알 때 그것을 쉽게 얘기해서 참선의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스스로 이것을 할 때 몸의 오장육부의 혈이 전부 다 돌아서 어깨 허리 다리 아픈 것이 사라져 버립니다.
참선 잘하는 사람은 얼굴이 항상 불그레하고, 참선을 하고 수행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번뇌 망상과 싸우기 때문에 몸도 마르고 얼굴도 갸름합니다, 수행을 득한 후에는 항상 얼굴이 좋게 환하고 누가 보더라도 ‘저 스님은 달마스님 같다.
저 스님은 부처님 같다.’ 이렇게 보듯이 눈을 봐도 코를 봐도 입을 봐도 몸을 봐도 이와 같습니다.
즉, 수행자의 보신입니다.
바로 이렇게 정을 가다듬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혜학을 비유하면 달과 같습니다.
달을 혜월이라고 하는데, 대야에 담긴 물이 흔들지 않으면 달빛이 환히 비치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조금 전에 병에 물을 담아서 계속 흔들면 병 밑이 안 보인다고 했듯이 바로 그 흔드는 마음이 가라앉으면 혜월이라는 것은 밑바닥까지 환히 보입니다.
부처님이 육신통을 가진 것이 그것입니다.
부처님이 관상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부처님은 밖에서 오는 사람이 왜 왔는지 아십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내 스스로 탐진치를 다 벗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화장을 할 때 거울을 닦는 것처럼 상대방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잘 보게 하기 위해 닦는 것.
바로 이런 이치입니다.
그런데 얼굴은 예쁘게 하려고 닦으면서 마음 닦는 것은 안 하고 있습니다.
즉 정혜라는 것은 달과 같다.
혜라는 것은 분별이 없어진 상태에서의 지혜.
본래의 것을 바로 볼 수 있고, 본래의 성품을 들어 낼 수 있는 것이 혜입니다.
이런 지혜를 가져야 어리석은 생각에서 벗어나 분별심과 번뇌를 없앨 수가 있습니다.
지혜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문혜와 사혜와 수혜가 있습니다.
문혜는 우리가 들어서 배우는 지식 세계를 문혜라고 합니다.
남이 써 놓은 책.
부처님의 경전을 보는 것 쉽게 얘기한 것을 문혜라고 합니다.
사혜는 내가 생각하고 헤아려서 덧붙이는 것.
수혜라는 것은 내가 스스로 닦아서 부처님께서 당초에 일으키신 마음을 설파한 것이 수혜입니다.
이것이 진실한 지혜입니다.
문혜와 사혜와 수혜 중에서 이 수혜가 가장 중요하고 가장 완전한 것입니다.
이렇게 삼학이라는 것은 서로 밀접한 연관과 상호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계학을 실천해야 정학이 이루어집니다.
첫째 계학을 닦아서 정학이 생기고 정학을 닦아야 혜학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솥은 세 발로 걸어야 하는데, 솥은 한 발만 없어도 그 솥은 쓰러집니다.
세 가지가 다 하나 되는 것으로 우리가 수행해야 합니다.
불교를 실행하는 사람은 어느 한쪽만 강조하거나 소홀히 하면 수행이 안됩니다.
앞에서 비유한 삼족정이라는 것과 같아서 어느 하나만 소홀히 해도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만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전체적으로 익힌 사람은 진심으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포괄 포용합니다.
남이 그릇된 얘기를 해도 포옹해 줍니다.
다 듣고 상대방에게 “너가 보는 것도 맞지만, 전체를 보면 이렇다.”하고 얘기해 줍니다.
검은 안경을 쓰고 보면 상대가 검게 보이고, 붉은 안경을 쓰고 붉게 보면 상대가 붉게 보이는 이치가 그것입니다.
투명한 안경을 쓰고 보면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보이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검은 안경을 쓴 사람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삼학이라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공부하기 위해 내용적으로 화두로 삼는 것은 우리는 이것을 결제라고 얘기합니다.
이것은 출가자들을 위한 첫째 수행의 방법으로 보면 타당합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 때 재가자가 수행하는 팔관제가 있습니다.
팔제계라는 것은 여덟 가지를 금기하고 지켜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이 여덟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모든 생명을 죽이지 말 것이며, 둘째는 절대로 훔치지 말고 보시를 행할 것이며,셋째는 음욕을 품고, 음행을 하지 말 것이며, 넷째는 거짓말하지 말 것이며, 다섯째는 술을 마시거나 방탕하지 말 것이며, 여섯째는 화려하게 치장하지 말고, 가무를 즐기지 말 것이며, 일곱째는 높고 편안한 침대에 눕지 말 것이고, 여덟째는 점심 시간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말 것이니라.’ 이런 계율과 제도가 정착된 것은 부처님이 녹자의 아들 녹자모를 가르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부처님의 제자 녹자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이 어머니가 와서 “어떻게 해야만 수행자가 될 수 있으면 깨달음을 얻어서 자유스러워질 수 있습니까?”하고 묻자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을 기록한 경전은 중아함 55권 202경 「지계경」에 있는 말씀입니다.
다시 한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녹모당 불당에 계실 때 일입니다.
녹자의 아내 녹자모가 어느날 이른 아침 목욕을 한 뒤 깨끗이 하고, 며느리와 권속들을 데리고 부처님을 찾아와 예배하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부처님, 오늘 저는 죄를 갖고자 하나이다.” “부인이여, 죄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대는 어떤 죄를 가지려고 하는가?” 부인이 머뭇거리는 동안 부처님은 세 가지 죄에 대해 하나하나 이와 같이 설명을 하였습니다.
“첫째 방어하고 술을 놓아 풀을 먹듯이 오늘은 이런 음식을 먹고 내일은 저런 것을 마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밤낮으로 욕심에 집착하나니, 이러한 죄는 공덕도 없고,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느리라, 둘째는 예도를 따라는 죄를 짓는 것을 말한다.
예도는 입으로는 살생과 도둑질과 거짓말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중생을 보호하라고 말하지만, 그 자신은 처자를 위해 살생도 하고 도둑질과 거짓말도 한다.
이런 예도를 따라 가는 것은 공덕도 없고, 큰 과보도 없다.
세째는 거룩한 팔제가 있다.
팔제란 이런 것이다.
첫째 살생을 떠나고 둘째 모든 도둑질을 떠나 보시를 행하고, 셋째 음식과 음욕과 음행을 떠나고, 넷째 모든 거짓말을 떠나고 다섯째 모든 방탕에서 떠나고, 여섯째 높고 높은 편안한 평상에서 떠나고, 일곱째는 꽃다발과 장신구, 춤과 노래 놀이에서 떠나고, 여덟째 하루 한끼를 먹으며 때 아닌 때에 먹지 말라고 가르치느리라.”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팔관제, 팔제계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방화제라는 것은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면서 좋은 것만 찾아서 줍어 먹는 것으로 그것을 하지 말아라, 그렇게 하면 욕심에 빠져서 거기를 뛰어 넘기 어렵습니다.
두번째는 이건죄라고 하는데, 이것은 계보를 따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부처님께서는 살생을 하지 말고, 음행을 하지 말라고 술을 마시지 말고 자신은 막 떠들면서 자신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다른 사정이나 삿된 글이나 또한 삿된 말을 좇아 다니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세번째는 팔죄라는 것인데, 이런 여덟 가지를 여러분이 잘 지킴으로써 계정혜 삼학을 얻을 수 있고, 즉 계정혜 삼학을 얻으면 편안하고 가장 멋지게 살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잘 지켜야 합니다.
만약에 부처님께서 신도 여러분들이 “어떻게 우리가 다 지킬 수 있겠는가?” 하고 묻는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하루만이라도 이것을 지킨다면 여러분들의 옷에 때 묻은 것을 비누로 빨고 또한 양잿물에 삶는 것처럼 그동안 지은 업이 녹아들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루도 못 지키면서 일년 365일의 죄를 씻겨 달라는 것은 비는 것은 아무 쓸모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루만이라도 지키면 타화 자재천에 갈 수 있다고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지켜주시기를 바라고, 또한 한 달 동안 우리는 날짜를 정해서 포살을 행하고 있습니다.
포살은 첫째 망월일과 신월일 이라고 해서 보름날과 그믐날 언제든지 포살을 합니다.
포살을 해서 내가 그동안 지켰는가 못 지켰는가 만약 못 지켰다면 또 다시 지켜야겠다는 원을 세우고 각오를 하고, 부처님께 기도를 하고, 그런 마음을 가지고 참회를 하고, 포살을 행하고 있는데, 요즘은 우리는 한달에 두 번만이 아니라 육제일이라고 해서 열나흘날과 스무아흐렛날, 여드렛날과 스무사흐렛날 이렇게 해서 한달에 6번 정도는 꼭 포살을 하고 팔관제를 지켜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행복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재가신도는 육제일과 팔관제를 지켜서 결재를 하고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승속을 막론하고 삼학을 우리는 얻을 수 있고, 지킴으로써 팔정도의 수행을 쌓아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결제요, 이런 마음으로 하는 것을 기도 입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증사기작반(蒸沙豈作飯)이요 마전난성경 설식복불포(磨難成鏡 設食腹不飽)하고 직수착력행(直須着力行)하리라.’ 만약 여러분들이 심신이 없다면 모래를 쪄서 밥을 짓을 수가 있겠습니까.
벽돌을 간다고 해서 어찌 거울이 될 수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실천해야만 여러분들이 바라고 원하는 것을 성취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는 여러분들께서 정말로 소원이 있고 대원이 있다고 하면 그 대원과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돈과 쌀과 과일을 갖다놓는 것은 물론이고, 마음을 툭 털어놓아야만 한다.
그런 후 각오를 해야 합니다.
내가 만약 이 한 뜻을 성취하지 않는다면 불교 30년 50년을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 쓸모가 없고, 형식적인 것뿐입니다.
나는 차라리 조계사 법당에서 돌장승이 될지언정 나는 맹세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아주 금강석보다 더 단단한 심신과 원력으로 기도하고, 또한 정진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바로 그래서 불교는 실천의 종교입니다.
이론의 종교가 아니고, 학문의 종교가 아닙니다.
그래서 화엄경에 “만일 네가 많이 알고, 많이 보고 들었다 치더라도, 그것이 네가 자유를 얻는 것은 아니고, 네가 행복을 얻는 것은 아니고, 깨달음을 얻는 것은 아니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꼭 심신을 금강석보다 더 단단히 굳히실 때 여러분들이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이라고 또 한번 강조의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