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장스님─그물에 걸린 고기를 방생하는 방법

그물에 걸린 고기를 방생하는 방법 –

법장스님

(전 조계종 총무원장) 날이 따뜻하니 좋으시죠? 여러분들이 기도나 정진을 할 때는 목숨을 바쳐서 해야합니다.

그렇게 하면 겨울이 가고 따스한 봄이 오는 것처럼 근심걱정은 봄눈 녹듯 사라지고, 바라는 바가 성취되는 것입니다.

오늘 게송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흰 구름이 지나가면 푸른 산이 드러난다.

그런데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서 가니 구름이 또 보인다.

그런데 돌계집이 소 고삐를 끌려고 하는데 금까마귀는 바다 밑을 갈고 있더라.

이것이 무슨 소린가? 동문서답 같죠? 오늘 잘 공부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이 소식을 알 때만이 기도 성취했다고 할 것입니다.

겨울 가고 봄이 오는 것처럼 근심걱정을 벗어버릴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당장 벗어날 것입니다.

다시는 조계사 안 와도 된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뜻을 어찌 알겠느냐 하지 마시고 가슴에 담아서 들어보십시오.돌 여자가 소 고삐를 끌려 하는데 금까마귀는 한밤중에 바다 밑을 갈고 있더라.

이것은 그물입니다.

그물을 왜 치나요? 새나 고기를 낚기 위해서 치잖아요.

만공 스님께서는 여러 대중들이 앉아서 공양을 하고 있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씀했습니다.

“대중이여 내가 오늘 농담을 하나 하겠다.

내가 그물을 하나 쳐놨는데 거기 큰 고기가 하나 걸렸다.

그러니 대중들은 이 고기를 방생해야겠는데 어떻게 해야 살릴 것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에 만공 스님 슬하에는 많은 눈 푸른 납자들이 용맹정진을 하며 밥 굶고, 잠 안 자면서 정진을 하고 있었습니다.

만공의 이 물음에 어떤 납자는 절을 삼배하고, 다른 납자는 일어나 소리를 벽력 같이 지르고 또 어떤 사람은 그물을 확 찢어서 고기가 나오면 우물에 넣겠습니다.

등등 별의별 사람이 다 있었습니다.

납자들은 이렇게 하면 ‘너희들은 능히 방생 방편을 할 수 있겠다’ 하고 칭찬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만공 스님께서는 납자가 일어나 삼배를 할 때 무릎을 딱 치면서 ‘옳지 한 마리를 낚았구나.’ 하였고, 일어나 ‘할’ 소리를 지르면 ‘옳지, 또 한 마리 낚았구나.’ 하면서 방생이 아니라 오히려 고기를 더 낚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수자들은 만공 스님의 말씀에 ‘아, 정말로 내가 만공 스님의 저 그물에 걸려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물은 만공 선사가 친 그물이 아니라 석가세존이 친 그물이요, 달마대사가 친 그물이고, 육조 대사나 경허 선사가 친 그물입니다.

근대의 조사, 선사들이 전부 쳐 놓은 그물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그물을 어떻게 해야만 벗어나고, 어떻게 해야만 고기를 방생할 수 있겠습니까? 이 소식을 알아야 ‘돌여자가 소고삐를 잡으려 하고 금까마귀가 한 밤중 바다 밑을 가는’ 부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평생 여러분들은 기도 입재만 하고, 회향은 언제 할지도 모르고 살게 됩니다.

평생 행복할까 했는데 평생 고통에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돈을 얻었는가 싶더니 빠져나가서 슬프고, 신랑이 직장을 얻었는가 싶더니 떨어져 걱정입니다.

이것은 이론이나 사량, 학문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화엄경에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많이 배우고 학문이 하늘을 찌를 듯 하더라도 소용이 없다”.

이 말은 네 아량이나 사량, 분별로써 그것은 알고 깨우치는 도리가 아니다.

여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여래란 자유, 깨달음의 경지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만이 오늘 만공 스님이 쳐놓은 그물의 이치를 알고 그 고기를 방생할 수 있겠는가? 제가 그물 속에 든 고기를 방생하는 이치를 여러분께 살짝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옛날에 이만권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대학자이며 대문장가이고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무식한 사람은 하대하니까 누구도 그와 이야기하기를 꺼려합니다.

이만권이라는 이름은 실은 책을 좋아해서 이만권을 봤다고 해서 별명이 이만권입니다.

어느날 책방에 가서 불경을 보니 ‘겨자씨 안에 수미산이 다 들었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며 길을 가고 있었는데 노스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 스님에게 ‘겨자씨 속에 수미산이 다 들었다는 이런 거짓말이 어디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당신의 이름은 왜 하필 이만권이오?’ 하고 물었고 그 사람은 이만권의 책을 봤기 때문에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스님은 다시 ‘그럼 이만권이 다 머리 속에 들어있소?’ 하고 물으니 ‘예, 제 머리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스님은 큰 소리로 ‘당신은 그 조그만 머리에 이만권이 다 들어있다고 하면서 겨자씨 소에 수미산이 들어있다는 것은 알지를 못하는가.’ 라고 말했습니다.

이 소리를 듣자마자 이만권이라는 사람은 크게 깨우쳤습니다.

바로 이것이 생사가 없는 진리이고 행과 불행이 없고 극락과 지옥이 따로 없는 진리이구나.

모든 것이 마음에 있구나라고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렇게 그물 안에 고기를 방생하는 방법을 알려드려도 모르다하면 분별심에 노예가 되어 사는 사람입니다.

분별심과 같은 생각은 탁 버려야해요.

탁 집어던져야 만이 구름이 지나니 산이 보이고 산길 굽이굽이 걸어가니 다시 구름이 나타나는 그 이치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눈으로 봐서 보이는 것이 아니고, 귀로 들어서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듣는 놈, 보는 놈, 행복을 느끼는 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느끼느냐? 자기가 느끼는 것입니다.

땅에 넘어진 사람은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한다고 그랬듯이 자기를 버리고서는 극락도 지옥도 찾을 수 없습니다.

좋은 것, 그른 것도 다 찾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봄을 맞이해서 여러분께서는 이 이치를 한 번 더 생각해서 반드시 터득하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내가 한 생각을 뒤집는데 있습니다.

반드시 생각을 뒤집어 주기를 바랍니다.

제가 그 뒤집는데 한 말씀만 더 드리겠습니다.

옛날 어느 노승이 젊은 시자를 데리고 길을 가는데 간밤에 비가 와서 개울물이 많이 불었어요.

그래서 바지를 허벅지만큼 걷어야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개울가에는 예쁜 아가씨가 있었는데 그 노승이 개울가에 다다르니 “저는 개울을 건널 수 없으니 스님께서 저를 업어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젊은 사미는 ‘저 여자가 노스님을 파계하려고 한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승은 자연스럽게 등을 턱 내밀면서 “내 등에 업히시오.” 하며 여자를 업고서 개울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노승은 사미승들에게 철저히 계율을 지키라고 가르치는 분이었습니다.여자와 이야기할 때는 방문을 열어놓고, 세발짝 떨어져서 만나고, 여자 보기를 통나무 보기로 하라고 가르치는 분입니다.

그런데 본인의 말과는 다르게 지금 젊은 여자의 허벅지를 이리저리 만지며 개울을 건너가는 것을 보니 속이 타는 것입니다.

‘우리 스님은 완전히 위선자로구나.

겉만 중이지 속은 소인보다도 더한 흑심을 가졌구나.’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개울을 다 건너 여자를 내려주고 노승과 사미가 길을 가는데, 사미가 화가 잔뜩 나서 노승에게 “스님은 저희들에게 거짓말로 가르쳤습니다.

이제 스님으로 대하지 않겠습니다.”하고 따졌습니다.

그런데도 그 노승은 뒤도 안 보고 걸어갑니다.

그러자 더욱 화가 난 사미가 “스님 정말 그럴 수 있습니까?” 하고 또 따지자 노스님은 “뭐가 그렇단 말이냐? 나는 그 처녀를 내려놓은지가 오래됐는데 너는 아직도 업고 있느냐?” 이 말을 듣고 사미는 크게 깨우쳤습니다.

파도가 물을 여의치 않고 물이 파도를 여의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파도는 물이요 물은 파도입니다.

바람이 일면 파도가 일어나고 바람이 지면 파도도 자는 것입니다.

원래 물과 파도가 둘이 아닙니다.

바로 범부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고, 생사가 둘이 아니고, 고통과 기쁨이 둘이 아닙니다.

극락과 지옥이 둘이 아닌 이 이치를 여러분이 깨우쳐야 합니다.노승이 쳐녀를 업었다가 놓는 것처럼 여러분들도 탐심을 그와 같이 헌씬짝 버리듯 버려야합니다.

탐심을 버리면 분별심이 없어지게 됩니다.

제 생각을 바꿔야 기도 성취가 되는 것이지 날자 세고, 돈이나 쌀 갖다 놓고 기도 했다해서 안됩니다.

조계사 마당에 들어오면서 금강석 보다 더 단단한 원을 세워야 합니다.

내 원이 성취되기 전에는 조계사 마당을 떠나지 않겠다.

이 몸이 돌장승이 되더라도 결코 떠나지 않겠다.

배가 고파 창자가 끊어질 것 같아도 밥을 구하는 생각을 내지 않겠다.

이런 대원을 세워야 만이 성취가 되지 형식적으로만 해서는 안됩니다.

그물에 걸린 고기를 방생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 생각을 한 번 턱 바꾸는데 있습니다.

그물을 찢을래야 찢어지지 않고, 고기를 아무리 들고 다녀도 방생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생각 한 번 툭 바꾸어 방생되는 이치를 알면, 그물이 산산이 부서져서 내 입 속에 머금고 씹어서 삼켜도 아무 탈 없는 이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 때만이 자유를 얻었다고 하고 해탈했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나는 불자라고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서 분별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고통의 바다에서 훌쩍 뛰어넘어 피안의 언덕에 다다르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마당 끝에 대나무 밭이 있는데, 바람이 살살 불고 태양은 비추니 대나무가 흔들리면서 그 그림자가 마당을 쓴다.

대빗자루로 마당을 쓸면 쓰레기가 지나가나 대그림자가 쓸면 전혀 쓸리지 않습니다.

달이 청청히 떠고 연못이 맑으면 달이 연못 속에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물에는 상처를 안 남기고 들어갑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진리입니다.

이것이 여러분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진불이라는 것입니다.

이 이치를 깨닫기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법장스님 ─오고 감 없는 삶

[법장 큰 스님 영결식 중에 방광하는 모습] ●오고 감 없는 삶/법장스님● 진리에는 본래 태어남도 없고 죽음 또한 없으며 실상(實相)은 항상 머물고 있는데 어찌 여래(如來)에게 열반일(涅槃日)과 탄신일(誕辰日)이 있어 오고 가심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태양은 항상 스스로 밝은 빛을 내고 있는데 중생들이 공연히 진다 뜬다 하며 낮과 밤을 만든 꼴이요, 꿈속에서는 분명히 생사가 있으나 깨고 나면 꿈속의 생사가 거짓이듯 진리에는 생사가 없는 겁니다.

부처님께서는 인생과 우주에 본래 생사가 없는 도리(道理)를 설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은 인간이 늙지 않고 죽지 않는 방법이 아니라 우리는 본래 늙을 것도 죽을 것도 없는 영원한 생명이요, 전능한 존재라는 가르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생사대사(生死大事)를 깨달으시고, 우리에게 생사가 없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믿음도 부족하고 지혜도 부족해서 생로병사가 있다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무명연기(無明緣起), 12연기(十二緣起)에도 보면 생사라는 것이 무명(無明; 어리석음) 한 생각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금강경(金剛經)에 이르시기를, “수보리(須菩提)야, 어떤 사람이 말하되 여래가 온다거나 간다거나 앉는다거나 눕는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내가 설한 바의 뜻을 알지 못했음이니 무슨 연고냐? 여래란 좇아오는 바도 없으며 또한 가는 바도 없을 새, 그러므로 이름이 여래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여래의 실체가 이러할진댄 어찌 여래의 그림자만을 쫓고 있을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구시나가라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시려 할 때 제자들이 울부짖으며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 우리는 무엇을 의지해야 합니까?”하고 여쭈니 부처님께서 이르시기를 “마땅히 사법(四法)에 의지하여야 하리니 무엇이 사법인가 하면, 법(法)에 의지하고 사람(人)에 의지하지 않으며, 뜻(義)에 의지하고 말(語)에 의지하지 않으며, 지혜(智)에 의지하고 앎(識)에 의지하지 않으며,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고 불료의경(不了義經)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라고 하신 가르침이 열반경(涅槃經)에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열반에 들었다고 하면 육신의 멸함으로 알고 있는데 본래의 뜻은 번뇌를 끈 상태라는 뜻과 오고 감이 없는 상태, 취(取)할 것이 없는 상태, 부정(不定)이 없는 상태, 장애(障碍)가 없는 상태 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부처님 열반일’을 맞이하여 사부대중(四部大衆)께서 부처님께 갖가지 공양물을 올리고 정성껏 기도를 올리시니 제가 진실한 공양에 대해서 장아함경(長阿含經)의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려고 누우시니 하늘에서 천신(天神)들이 예쁜 꽃과 훌륭한 과일을 바쳤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 아난 스님(阿難尊者)에게 이르시기를, “여래에게 바치는 참다운 공양은 여래의 법을 올바르게 실천하는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대중께서는 이 가르침을 명심하셔서 수행자의 몸과 마음으로 참다운 공양을 올리시기 바랍니다.

부처님께 올리는 가장 아름다운 등공양(燈供養)은 우리의 마음에 지혜의 빛을 밝혀 부처님께 바치는 것이요, 가장 향기로운 향공양(香供養)은 우리의 마음에 중생을 향한 자비의 향기를 부처님께 바치는 것이니 이 몸이 초가 되어 부처님 전을 밝히고 이 몸이 향이 되어 부처님 전을 맑히는 공양을 올려야 가장 큰 공덕을 짓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게으름 없이 정진하여서 불과(佛果)를 맺는 것이 천신의 수승한 과일공양보다 더 위대한 공양이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지난 죄업을 참회하고 선업(善業)을 쌓아 자비로 피어나는 미소를 중생들에게 보낼 때 천상의 꽃보다 더 아름다운 꽃 공양을 부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일체 형상이 있는 것은 영원한 것이 없으니 그저 스쳐 가는 바람으로 알고 꿈이고, 물거품이고, 그림자이고, 이슬 같고, 번갯불 같다고 생각하고 또 우리가 받고 있는 모든 고통과 고난과 번민이 모두 스스로 어리석음으로 시작하여 애착 때문에 일으킨 것임을 깨달아 스스로 놓아 버리고 벗어나야 열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 꼭 이렇게 되어야만 부처님께 진심으로 공양을 올리는 것이 되고 은혜를 갚는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불문(佛門)에 든 수행자들이 부처님의 열반에 드신 거룩함에는 비교할 수는 없지만 타종교의 지도자들보다는 초월적이고 감동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생사가 본래 없는 도리를 확실하게 깨달아서 생사를 초월해 언제 어디서나 걸림 없이 자유롭게 살다보니 죽음 또한 멋지게 맞이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 예로 저 중국의 등은봉 스님(鄧隱峰 禪師)께서는 세상을 떠나실 때 대중 스님들에게 “내가 알아보니 그 동안 앉아서 가고 서서 간 스님들은 많이 계시나 거꾸로 서서 떠난 분은 없으니 이제 내가 그렇게 가겠다.”

라고 하시고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가셨는데 신기하게도 몸은 거꾸로이신데 옷이 뒤집혀 흘러내리지 않았고 제자들이 아무리 당겨도 떨어지지 않으셨습니다.

잠시 후 선사의 누이가 되시는 비구니께서 “노형(老兄)은 평상시에도 율법(律法)을 잘 안 지키고 이상한 행동을 일삼아 대중을 놀라게 하시더니 돌아가실 때에도 대중을 현혹시키는 짓을 하십니까?”하고 미니 시신이 떨어져 넘어갔습니다.

우리도 생사의 근본도리만 깨달아 증득하면 갈 때를 스스로 알고 마음대로 때와 곳을 택해서 자유자재하게 대해탈의 세계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명철한 진리의 세계에서 보면 부처님탄신일이라고 기뻐할 것도 부처님열반일이라고 슬퍼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부처님의 크신 은혜를 찬탄할 뿐입니다.

끝으로 불교의 역사를 나타내는 불기(佛紀)는 부처님 열반하신 해를 기원(紀元)으로 하는 것을 알려 드리니 이를 입멸연대(入滅年代)라 합니다.

-전 조계종 총무원장, 열반에 드신 법장스님의 부처님열반재일 법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