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의 계절에

다시 축구의 계절이 돌아왔다. 2002년 서울발 거리응원이 4년이 지난 지금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 뜨거운 열기는 그때와는 사뭇 다르다. 거리응원이 광장을 독점계약한 기업과 또 다른 미디어의 주도와 후원으로 이루어지는가 하면 방송들은 연일 과잉편성으로 축구 열풍의 국외자들을 짜증나게 한다.

이 짜증은 급기야 사람들이 축구에 들뜨고 환호하는 풍경과 이를 부추기는 주변 여건들을 싸잡아 파시즘의 이름으로 비판하기에 이른다. 솔직한 심경으로 월드컵 또는 축구 열풍이 민족주의나 상업주의를 부추기고, 국민이 아니라 자본이 응원한다는 비판도 무리는 아니다. 좀더 냉정해지면 정치나 경제나 사회적 제반 현안은 몽땅 축구에 파묻혀 버리고 얼핏보아 온 국민이 국가적으로 환호하고 열광하는 가히 병적이라 할 정도다.

환호하고 감동하는 시민들의 정서를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가와 자본의 이름으로 경기에 열광하는 집단행위에는 광적인 도취가 불안하게 어린다는 점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경기를 즐기고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면서 단합된 힘을 과시하는데는 스포츠 만한 것이 없고, 그 힘을 과시하는데 다소의 폭력적인 현상이 일어나더라도 지금 한국사회가 처하고 있는 구조적 정황을 인정하여 관대하게 보아주어야 하는가. 지금 우리사회는 알게 모르게 다수의 폭력적 바람에 시달리고 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싸움에 이기고, ‘법’ 위에 ‘떼법’이 있다는 조소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최근 사이버 공간에서 떠도는 내용 중에 어느 미국인이 본 한국ㆍ한민족에 대한 이야기가 괘씸하지만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드물게 보는 단일민족, 암 사망률ㆍ음주 소비량ㆍ양주 수입률ㆍ교통사고ㆍ청소년 흡연률ㆍ국가 부채 등 악덕 타이틀에서 세계3위권 밖으로 벗어나지 않는 종족, IMF 경제위기를 2년 남짓만에 벗어나 버리는 희한한 민족, 자기나라 축구장은 텅텅 비워놓고도 월드컵 때에는 수백만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나라, 월드컵에서 단 1승도 못하다가 갑자기 4강까지 후딱 해치우는 미스테리 종족, 조기 영어교육비 세계 부동의 1위를 지키면서도 영어 실력은 100위권 밖의 나라, 물건은 비쌀수록 잘 사는 종족, 아무리 큰 재앙이나 열 받는 일이 닥쳐도 1년 내에 깡그리 잊고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민족, 해마다 태풍과 싸우면서도 다음해 꼭 같은 피해를 계속하는 대자연과 맞짱뜨는 엄청난 종족, 변변찮은 지도자들이 나라를 이끌어가면서도 망할 듯 망할 듯 안 망하는 엄청난 내구력의 종족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욕적(?)인 어구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언뜻 보아 수긍이 가는 점도 있었지만 부인하고 싶은 심경은 나의 알량한 애국심 탓일까.

누가 뭐래도 좋다. 우리 나름의 합리성과 자신감에 바탕을 둔 행위라면 그래도 좋다. 그러나 외적인 자본과 미디어의 충동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이라면 월드컵 이후도 생각해보자. 불안하고 피곤한 현실을 극복하고 타파하기 위해 축구의 힘을 빌린다면 즐겁고 가벼운 마음으로 관전하고 응원하고 내일을 맞을 준비도 아울러 하자.

김형춘 香岩 (반야거사회 회장) 글. 월간반야 2006년 7월 제68호

청년의 위기

요즘 대학을 졸업하는 젊은이들에겐 졸업시즌은 괴로운 계절이다. 우리 학제로 유치원부터 계산해 보면 17년, 그사이 재수를 한다든지 어학연수를 다녀온다든지, 다른 사정으로 휴학을 한다든지, 군 복무를 마친다면 20년이 넘을 수도 있다. 이처럼 오랜 기간 신체적 정신적 성장에다 지적성장을 위한 사투(死鬪)(?)가 끝나는 시점인데 어쩌면 홀가분하고 자랑스럽고, 즐거운 기분으로 새로운 사회에 달려나가야 할 텐데 괴롭다니 말이 되는가. 물론 모두가 괴로운 것은 아니지만.

미국의 저널리스트 ‘알렉산드라 로빈스’는 「인생 1/4분기에 맞는 위기」- 20대에 맞는 특이한 도전들-에서 ‘청년 위기’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고 한다. 부모와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20대가 냉혹한 현실사회를 만나면서 겪은 좌절감과 불안, 그로 인한 일탈을 청년 위기로 표현한 것이리라. 유독 이 용어가 이 시기의 우리에게 와 닿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 상황에서 맞는 첫 번째 졸업시즌이기 때문이다. 잔혹한 계절, 저주의 계절이라 할 정도로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지 않은가. 이 상처를 억지로 피해 보려고 일부러 졸업을 유예한 사람 또한 부지기수라 한다.

올해 2월 대학 졸업자 수는 대충 60만 명 정도라고 한다. 취업 포털 사이트 커리어에 따르면 지난 1월말까지 취업이 확정된 비율은 올해 대졸자의 15%에도 미치지 못할 것으로 추산된다고 했다. 이 수치는 지난해의 1/3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산술적으로 계산해 보면 50만 명 정도가 아직 직장을 못 구한 상태인데 여기다 지난해 졸업자 53.8%도 아직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는 통계 수치까지 합친다면 올해엔 80만 명 가량의 대졸자가 취업전선에 내몰린 셈이다. 이들 가운데 얼마가 취업을 하고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취업에 실패하여 좌절과 불안에 휩싸일 것인가. 이런 자녀를 둔 부모나 가족들까지 합친다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청년실업의 문제로 고민하겠는가.

연세대 사회학과 김호기 교수는 금융위기로 인한 경제불황이 20대의 청년들에게 안겨주는 고통을 일컬어 ‘트라우마 세대’라고 명명하였다. 취업 실패에 대한 좌절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는 트라우마(trauma)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식이다. 중ㆍ고교 시절 외환위기를 맞아 부모의 실직과 부도를 간접 경험한 20대 중ㆍ후반 세대가 이번에는 금융위기로 취업대란에 직면한 것을 심리적 외상(心理的 外傷)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미 수십 차례 입사지원서를 냈고, 운이 좋든지 실력이 있어서든지 면접까지 보고도 최종단계에서 낙방의 아픔을 맛본 사람들. 잠을 못 이루고 소화불량에다 과도한 스트레스로 탈모현상이 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지난해 하반기부터는 고용시장이 더욱 위축된 탓이라고 자위도 해 보지만 하루하루 불안과 초조는 더해갈 뿐이라고 한다.

정부 차원에서도 청년실업의 심각성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현재로서는 백 약이 다 효과가 나질 않는다. 웅덩이에 돌 집어넣기라고나 할까. 이런 때일수록 단기적 효과를 내는 처방에 급급하지 말고 근원적인 처방을 모색해야 한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역시 교육이라고 본다. 지금 우리 경제나 실업이 이 지경인데도 구직난(求職難)과 함께 구인난(求人難)에 허덕이는 중소기업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흔히 말하는 3D업종을 비롯한 1차 산업에는 돈을 주고도 사람을 못 구하는 실정이라고 한다. 중소제조업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법체류외국인 근로자’가 아니면 공장 문 닫을 판이라는 말을 공공연히 한다. 고등학교 졸업자의 85%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는 나라, 국민의 교육수준이 높아지는 것은 대단히 긍정적인 현상이지만 모든 국민이 기대하는 일의 종류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된다. 사회가 발전하고 전문화될수록 일의 종류가 많아진다. 이 일을 국민 모두가 고루 나누어 맡아 할 때에 우리 사회가 이상적으로 유지되어 갈 것이다. 요즈음 취업의 심각성을 경험하고서야 4년제 정규대학 졸업자들이 전문대학이나 직업훈련원을 찾는 수가 부쩍 늘었다고 한다.

하루 빨리 우리의 교육제도, 특히 대학의 수와 정원을 대폭 축소 조정하고 부담 없이 제대로 된 직업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확충되어야 한다. 더불어 부모와 기성세대의 교육관과 직업관이 바뀌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하여 졸업시즌을 부모와 주위 사람들의 축복 속에 맞고, 당사자도 희망과 즐거움에 넘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새로운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으면 좋겠다.

향암 김형춘 (반야거사회 회장, 창원전문대교수) 글. 월간반야 2009년 3월 제100호

천재지변(天災地變)

중국 쓰촨성(四川城)의 지진 뉴스는 언제까지 계속될까. 인적 물적 피해규모는 얼마나 될까. 언제쯤이면 복구가 될까. 복구에 필요한 예산은 얼마쯤 될까. 과연 완전 복구가 가능할까. 세인의 짧은 지식과 부족한 정보, 무딘 상상력으론 엄두가 나질 않는다.

1976년 중국 탕산(唐山) 대지진 때엔 25만 명의 사망자를 냈고, 1995년 한신(阪神) 대지진으로 6500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2004년엔 동남아시아에 강도 9.0의 지진으로 인한 쓰나미(해일) 사태가 발생하여 인도네시아에만 11만 명이 사망하였고, 최근 미얀마에선 싸이클론으로 사망자는 확인되지 않고 이재민이 20만 명 정도라고 외신이 전한다. 이번에 또 중국의 쓰촨성에서 진도 7.8의 강진이 일어나 그 피해 규모를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인데다 여진마저 계속되어 사태가 언제까지 계속될 지 걱정이다. 한반도를 에워싸고 있는 동북아의 주변국들의 재난은 우리와는 무관한가. 우리는 이런 천재지변으로부터 안전한가. 괜히 불안해 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 대지진은 유라시아 지각판에 속한 티베트고원이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중국 쓰촨성 청두(成都)시 서북쪽에 위치한 룽먼산(龍門山) 단층의 활동을 유발시킨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았다. 이 쓰촨성에서는 1933년 8월에도 규모 7.5의 지진이 발생하여 9300여명이 사망한 바 있다고 한다.

일부 네티즌들은 이번 지진을 불교를 신봉하는 티베트인의 독립ㆍ자치시위를 유혈 진압한 중국정부에 대한 ‘부처님의 분노’로 해석하기도 했다. 부처님오신날(12일)에 발생하였고, 베이징 올림픽 성화가 에베레스트 등정을 마치고 다음달 중순 티베트 진입을 앞둔 시점에서 티베트고원이 요동쳤기 때문이란다.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지만.

또 하나의 원인으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싼사(三峽)댐’이다. 이 댐은 양츠강 유역의 홍수 피해를 줄이고 클린 에너지를 공급하겠다는 의도로 건설되었지만 오히려 환경문제 등에 어두운 면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댐은 규모가 우리나라 소양강댐의 14배나 되는 세계최대라고 하니 그 저수량(총 저수량 390억톤)의 수압이 이곳 지각층을 눌러서 재앙의 규모가 더 커졌다는 것이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보면 이번 대지진은 물론 천재지변이 큰 원인이겠지만 여기다가 인간의 탐욕과 무지와 인간중심주의 사상으로 인한 무분별한 개발과 자연훼손, 생태계의 파괴 등 인재(人災)도 상당부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껏 인간은 일부이긴 하지만 지식층에서 나름대로 인간중심주의를 외치면서 인간의 자유와 이성이 자연을 지배ㆍ정복해야 하며, 인간의 존엄과 권위를 위해서는 신이 존재할 수 없다고 외치고 있다. 세계의 주인으로서의 인간은 자연을 지배ㆍ정복하고, 자연을 마음껏 이용하여 편의와 행복을 누려야 하며, 학문ㆍ기술ㆍ사상은 인간에게 만족과 영광을 줄 수 있다고 큰소리쳐 왔다.

그런데 이게 뭔가. 1976년 탕산에선 잠자리와 새 수만 마리가 떼지어 수백 미터를 날아갔는데 사람들은 이를 눈여겨보지 않았고 급기야 며칠 뒤 대지진의 발생으로 25만 명이나 사망하는 사고가 있지 않았는가. 2004년 인도네시아의 쓰나미 때에도 직전에 해안의 동물들이 줄지어 언덕으로 대피하는 모습들이 목격되어 보도되지 않았는가. 이번에도 지진이 쓰촨성을 뒤흔들기 사흘 전 진앙지 인근 마을에서 두꺼비 10만 마리가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사진이 보도되었는데 이들은 차와 사람에 밟혀죽으면서도 줄곧 한 방향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불안해 하였지만 당국에선 ‘산란기 이동이니 환경이 좋아졌다는 소식’이라고 반겼다니, 하찮은 미물들의 경고라고 무시해버린 오만한 인간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이즈음 들어 자연 앞에서, 영원 앞에서, 무한 앞에서 인간의 왜소함이 더 절실히 느껴지는 것 같다. 쓰촨성의 폐허에서 가진 자와 없는 자, 배운 자와 무식한 자, 권세와 명예를 누리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구별이 있던가. 일찍이 부처님께서는 태자 시절 온갖 부귀와 영화, 넘치는 소유, 장차 왕위가 보장된 그 모든 것을 가졌지만 진정한 삶, 영원한 행복을 찾기 위해 이 모두를 포기하지 않으셨던가. 이번 중국의 대 참사는 인간에게 과연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할 것인가를 다시 한번 일깨워 준 것이다.

김형춘 香岩 (반야거사회 회장 창원전문대 교수) 글. 월간반야 2008년 6월 제9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