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고 기다린 선배

후덥지근하고 지리한 장마날씨만큼이나 답답한 세태다. 너무나 빠르게 변해서인지, 미래를 향한 변화와 전통을 고수하고자 하는 신구의 갈등이 심해서인지, 도무지 변화가 없는 정체상태여서 그런지 분간할 수가 없다. 조간신문을 읽고 나면 하루종일 머리가 뒤숭숭하고, 석간을 읽고 나면 밤에 꿈자리가 뒤숭숭하다는 말이 실감난다.

물질적인 풍요와 쾌락의 추구이외에는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바라는 가치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하늘과 땅이 나누어지기 이전의 홍몽이 이러했던가. 땅은 왜 이렇게 답답하고 뒤숭숭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는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어려움은 있게 마련이지만 흔들리고 방황하지 않는 사람, 고민하고 마음 아파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던가. 가히 중생은 번뇌를 이고 산다는 말이 오늘날을 두고 한 말이리라.

철들고 난 뒤로 아파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괴로움을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아프고 괴롭고 외로울 때면 인간은 으레 본래의 그 순수한 모습으로 돌아가서 인간을 그리워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참된 위무를 받고싶어 하고, 삶에의 올바른 방향을 찾고자 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를 서운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더불어 의논하고 걱정하고 이끌어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 줄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이러니 더욱 막연하고 외로와 하고 방황할 수밖에.

뭐가 뭔지 좀 속 시원하게 옳고 그름과, 선하고 악함을, 그리고 아름답고 추함을 분명히 알 수 있게 가르쳐주고 안내해주는 이가 있으면 좋겠다. 우리가 가야할 길을 자신 있게 제시하여 주고 스스로 앞장서 나아가는 믿음직한 그 누가 있으면 좋겠다. 마음에서 우러나 존경하고 믿고 따를 수 있는 선배가 아쉽다. 어려움을 이해하여 주고 갈등을 풀어주며, 방황할 때에 확신과 신뢰를 줄 수 있는 사람이 아쉽다. 참으로 어려울 때에 손길을 뻗쳐볼 데가 없으니 말이다.

이런 선배가 그리웠다. 나에게 만의 선배가 아닌 우리 모두의 멋진 선배를 갖고 싶었다. 공정과 청백을 정치의 요체로 알고 참으로 나라와 겨레를 걱정하며, 매사에 한발 물러서서 한번 더 생각해 보는 여유와 자제를 갖고, 원숙한 언행으로 솔선 수범하는 멋진 정치를 하는 원로 선배를 보고싶었다. 옳은 것을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주장할 수 있는 지적인 성실성과 정신적 용기를 가진 지식인을 선배로 때론 스승으로 모시고 싶었다. 진실과 겸손을 바탕으로 대화와 합리를 통한 민주적인 경영으로 봉사하는 자세를 겸비한 기업인에게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을 기꺼이 투자하고 싶었다. 남의 것이 아닌 우리의 산하와 전통과 문화유산의 바탕에다 우리의 얼을 아름답게 수놓아, 가장 한국적인 예술이 가장 세계적인 것으로 인정될 수 있는 예술을 위해 외길을 걷는 선배와 더불어 취하도록 마시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춤추고 싶었다.

어쩌면 세상에는 이렇듯 매력 있는 선배들이 많이, 아니면 더러는 있을 법도 한데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 눈을 가진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푸념이었을까. 그런데 최근 나의 이 생각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물론 어제오늘의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나의 이력서의 종교 난에 확실히 ‘불교’라고 쓰기 시작한지가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는 게 부끄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적어도 예전에 나는 ‘극락과 천당과 하늘나라의 벽을 허물고 지고의 선을 추구하면서 배타와 질시와 반목을 없애고,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과 구원에 전념하는 종교인에게 신이 아니라도 좋으니 귀의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그러면서도 종교는 ‘맹신(盲信)’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 같기에 무작정 절을 찾고 절을 하고 스님의 말씀을 새겨듣길 4반세기. 이순(耳順)에 이르러서야 ‘탐욕’과 바른 ‘원(願)’을 구별할 수 있을 것 같고, 화를 낼 때와 냉정해질 때를 구분할 수 있을 것 같고, 지식과 지혜 중 어느 것이 더 소중한 지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참으로 어려울 때에 내 손길을 잡아줄 선배 없음을 아쉬워했던 자신이 스스로 부끄러워진다. 이렇게 가까이에 정신적인 안식처가 있었고, 이끌어 주시는 스승이 계셨는데. 역시 속인의 눈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나무관세음보살.

김형춘 (반야거사회 회장, 창원전문대교수) 글. 월간반야 2006년 8월 제69호

참된배려

2년여 전에 ‘상대방의 입장에서’라는 글을 쓰면서 ‘배려는 순전히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닌 상대방을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도 철이 덜 들어서인지 깨닫지 못한 부분이 있었기에 스스로의 아둔함을 자인하면서 또 ‘배려’에 대한 최근 고민의 일단을 정리해 본다.

장성한 자식을 둔 부모의 입장이 되어보면 아들딸을 시집 장가보내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을 것이다. 노부모를 모셔본 사람이면 남으로부터 ‘호상(好喪)’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할 텐데 하고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런 길흉사(吉凶事)를 당하면 자신의 일이든 남의 일이든 고민을 하는 게 ‘부조금(扶助金)’이다.

자신의 집 행사에는 ‘어느 범위까지’, ‘누구누구까지’ 청첩장을 내고 연락을 할 것인가가 최대의 고민이고, 남의 집 행사에는 부조를 ‘얼마?’ 할 것인가가 고민의 주체다. 보다 근본적인 것은 우리네 결혼이나 장례문화 자체부터 검토해 봐야 하겠지만 그건 당장 뜯어고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우선 부조금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다행스럽게도 아이 셋을 모두 성혼을 시켰으니, 그것도 우리 내외가 현직에 있을 때 해결하였으니(?) 남들이 보면 복 받은 일이라 하겠다. 아이들 혼사 이전엔 예사로 생각했던 ‘경조금’의 액수가 큰아이 둘째 아이를 결혼시키면서 ‘상대’의 입장을 생각하게 되었다. 전에는 무조건 내 호주머니 생각만 했고 무조건 액수를 많이 하는 게 잘하는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많이 하면 상대방도 다음 우리집 행사 때엔 그 액수를 맞추는 것이었다. 그런 경험을 하고는 경조사의 ‘부조’도 무척 조심스러워졌다. 상대방의 형편에 맞춰 하는 게 상대를 배려하는 게 아닐까.

추석을 앞둔 얼마 전의 일이었다. 별것 아니지만 설날과 추석이 다가오면 은사․선배․지인과 이웃 등 평소 은혜와 사랑을 입은 몇 분들에게 자그마한 선물을 보낸다. 멀리 계시는 분들에겐 우편으로, 가까이 계시는 분들에겐 아들과 함께 돌면서 그 분과의 관계도 이야기하고 인사도 드리게 한다. 그런데 가까이 계시는 분들은 자연스레 선물을 주고받는 식이 되어버렸다.

처음 내가 의도한 바와는 사뭇 다르게 관행이 되었다. 그렇다고 특별한 사연도 없는데 일방적으로 중단할 상황도 아니었다. 그런데 얼마 전 2십 년 넘게 호형호제(呼兄呼弟)해온 형님과 다른 일로 통화를 하다가 ‘명절 선물’이야기를 꺼내셨다. 성인이 된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것도 어색하고 하니 선물 주고받는 것을 하지 않는 게 어떻겠느냐는 뜻이었다. 순간적으로 좀 당황했지만 그렇게 하자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지금껏 나는 인정으로 상대를 배려하느라고 해왔는데 상대가 나에게 맞추어 화답으로 선물을 하느라 어려움을 겪은 모양이다. 그 말을 꺼내기까지 상대는 얼마나 고민했을까를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나는 상대를 배려하면서 살아왔는가.

오다가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향 사람, 학교 동창, 직장 동료 등 인연 맺은 사람들끼리 모임을 가진다. 내게도 여러 모임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편안한 모임이 하나 있다. 이름하여 ‘점심 모임’이다. 주중에 적당한 날(주로 수요일)을 미리 장소만 연락하면 알아서 모이는데, 밥값을 내는 차례는 따로 정해져 있지 않지만 점심 먹고 헤어질 때쯤이면 ‘다음 주엔 제가 당번할게요’ 하면 끝이다. 문자로 연락하면 모여서 잡담하고 떠들면서 식사하고 헤어진다. 딱히 회원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회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직업이나 직장이 같은 것도 아니고, 식당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식대가 얼마 정도라고 정해진 것도 없다. 십 년 정도 되었으니 꽤나 세월이 흘렀다. 물론 잘 나오다가 얼굴이 보이지 않은 사람도 있고 새 식구가 되어 나오는 사람도 있다. 이따금씩 초청 인사가 당일 초청되기도 한다.

이 식구들 가운데 초창기부터 참여한 한 친구가 요즈음 결석이 잦다. 예사로 생각하면서 이 친구가 문자로 불참의사를 밝혀오면 나는 제명(?)시키겠다고 위협을 하곤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나와 둘이면 괜찮은데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으니 식대를 지불하는 횟수가 좀 부담스러운 같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불참한다고 나무란 것 같다.

진정한 배려는 어떤 것인가. 상대의 입장에서 몇 번쯤 생각해보고 얼마를 고민해야 할까. 이순(耳順)이 지난지도 몇 해가 되었는데 얼마를 더 살아야 철이 들까. 다시금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되뇌이고 멀기만 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생각하게 된다.

김형춘 교수님 글. 월간 반야 2010년 10월 119호

지식기반으로 부(富)의 창출을

일전에 유네스코 활동의 일환으로 태국의 교사와 학생 20여명의 안내를 맡아 하루를 온통 해인사에서 보낸 적이 있다. 이들을 안내하는 동안 단장인 ‘몽콜’이라는 사람이 내게 한국의 스님들은 하루에 몇 번 식사를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사실대로 아침에는 죽이나 스프 등을 간단히 하고 점심에는 밥을, 저녁에는 과일 등으로 간단히 요기를 한다고 했더니 좀 의아해 하는 표정이었다.

나의 불교 상식으로도 그들의 남방불교와 우리와는 수행 방법에서 좀 차이가 있다고 알고 있기에 예사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차이를 인정하기보다는 그들 식의 수행이 옳다고 믿는 것 같았다. 민족이 다르고 국가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데도 말이다.

이처럼 공간 경계에 의한 문화의 차이도 크지만 시간의 흐름에 의한 차이 또한 엄청나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미래의 충격’, ‘제3의 물결’, ‘부(富)의 미래’ 등의 역저에서 약 1만년 전 선사시대에 우리 인류가 사냥이나 식물을 채집해서 먹다가 최초로 씨앗을 심었을 때를 농업의 발생이라 보았다. 언제 닥칠지 모를 궂은 날씨에 대비하여 잉여생산을 해 두자는 것이었다. 이 사건을 일컬어 ‘인류 최초의 부(富)창출시스템’이라 거창하게 이름 붙였다. 이후 농경시대를 제1의 물결시대로 보았고, 두 번째 부의 창출시스템을 17세기말 산업혁명과 더불어 일어난 제2의 물결 시대라고 했다. 이 산업사회는 선진경제의 원동력인 상공업도시와 산업엘리트를 배출하였지만 지구오염이나 식민주의, 전쟁과 빈부의 양극화 등 숱한 문제를 남기고 뒷걸음을 치고 있다. 여기에 산업생산의 전통적 요소가 붕괴되고 정교한 지식과 다양화, 수평화, 네트워크구조 등으로 변신이 시도되는 제3의 물결시대가 열렸다.

제1의 물결시대가 ‘키우는 것〔growing〕’이 중심이라면, 제2의 물결시대는 ’만드는 것〔making〕’이 중심이었고, 제3의 물결시대는 ‘서비스하는〔serving〕, 생각하는〔thinking〕, 아는〔knowing〕, 경험하는〔experiencing〕’것 등이 중심이 되었다.

이 시대 문화의 심층기반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지식이라 할 수 있다. 미래사회의 헤게모니를 쥐고 새로운 부를 축적하고자 한다면 시간의 빠르기를 조정하는 문제와, 공간의 확장을 하는 문제와 누가 지식기반사회를 선도하고 활용하는가에 달렸다고 하겠다. 산업사회의 관료주의는 선진 지식기반시스템의 발전을 방해하고 혁신의 시도가 덜할 뿐아니라 시간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 기업이나 NGO가 가장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가 하면 교육이나 행정관료조직과 정치조직은 거북이 걸음을 하고 있어 재조정과 조화가 불가피하다.

다음은 장소와 공간경계의 상실이다. 이미 우리 사회도 공간개념이 무너지고 있다. 인터넷과 IT산업의 성장은 공간의 의미를 무색케 하여 누가 더 빨리 값싼 노동력으로 다른 사람과 경쟁하느냐에 달려 있다. 연간 국경을 넘는 사람이 5억 명으로 세계 인구의 8%나 된다고 하니 인터넷이 아니라도 삶의 공간이 확대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여기에다 지식경제라는 새로운 부의 창출시스템 이 벌써부터 설치고 있다. 하나 하나의 ‘데이터’가 모여서 ‘정보’가 되고, 그 정보는 정리되고 해석되어 ‘지식’이 된다. 이 지식이란 자원의 가치는 시간이 흐를수록 급신장 된다. 지식의 성격 자체가 원래 비 경쟁적이므로 많은 사람이 사용해도 감소하지 않고 아무리 많은 사람이라도 동시에 사용할 수 있으며 사용자가 많을수록 확대재생산 될 수 있다. 형태가 없지만 조종할 수 있고, 어떤 상품보다 이동이 편리하다. 요즈음 국내 대기업이 계속 메모리 용량이 큰 반도체를 개발하는 것을 보면 점점 더 작은 공간에 저장할 수도 있다. 부의 창출에서 지식의 중요성은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도약할 것이고 지속적으로 커지면서 변신을 거듭할 것이다.

앞으로 선진국의 경제는 어쩔 수 없이 두뇌중심의 지식경제로의 전환이 불가피할 것이고,. 따라서 범 지구차원의 두뇌은행(brain bank)은 부와 직결되므로 보다 많은 국가들이 접속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은 휘청거리고 있는 우리 경제도 눈앞의 문제에 급급해 해서는 안 된다. 부의 혁명을 촉발하는 세 가지 핵심 원동력인 시간, 공간, 지식과 우리 사이에서 발생하는 엄청난 변화를 논의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 장기적 안목에서 교육을 생각하고 인재를 육성하여 지식기반사회에서 생존의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김형춘 香岩 글. 월간반야 2006년 11월 제7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