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의 말

예나 지금이나 인간사회에서의 삶의 성패는 이승에 와서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 하는 것과, 이 사람들과의 만남을 ‘어떤 관계로 승화시키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원만하게 이어주는데는 그 도구라 할 수 있는 말이 주된 역할을 하는데, 이 말은 사람뿐만 아니라 주문(呪文, 呪術文)을 통해 신과도 관계를 맺게 하였고 이것이 발달하여 문학의 기원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이러한 말[言語]을 잘 이용하는 사람들은 종종 남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 집단의 지도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아니 대개의 경우 큰 조직의 지도자들은 말로써 그 구성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물론 그 말의 이면에는 생각이 깃들어 있으니까 내면의 뜻이 말을 통해 상대방에 전달되어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러니까 지도자와 말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고, 한 사회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말을 잘 해야 되고 그러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기도 한다.

요즈음 한국사회도 지도자의 말 때문에 말이 많다. 한때는 대통령의 말이 너무 솔직하고 간단명료하여 지도자로서의 말이 ‘정제(精製)’되지 않았다고 시비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쉬운 말과 꾸미지 않은 말이 특징이었다. 쉬운 말과 진솔한 표현이 대통령의 화법의 중심이었다. 가성을 쓰지 않고 구어체(말하듯이)로 연설하여 한글세대다운 대통령이라는 평도 있었다.

사실 말하기에서 가장 주요한 요체는 맞춤법과 표준어에 맞게 ‘바른말을 쓰는 것’과, 난해한 한자어나 외국어 외래어보다는 ‘쉬운 우리말을 찾아 쓰는 것’과, 은어나 속어 비어 등을 버리고 ‘곱고 아름다운 토박이말을 가려 쓰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우리의 지도자는 말하기에서는 별로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우리 대통령의 화법이 달라졌다. 갑자기 말이 어려워졌다. 간단명료하던 화법이 복잡 다기해 지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을 계속하고 있다. ‘권력을 통째로 내놓는 것도 검토하겠다’는 등 보통사람의 상식적인 수준으로 이해가 안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수십 년 한국어를 강의해 온 필자도 그 말의 참뜻을 이해할 수 없으니 답답하다.

말하기의 기본은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보다 잘 표현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보다 잘 이해하게 하는 것이다. 쉬운 말은 모든 사람이 이해하기 쉽고, 진실을 바탕으로 하여 설득력을 가진다. 듣는 이로 하여금 탈 권위적이어서 친밀감을 느끼는가 하면 생산적이고 경쟁력을 높여준다. 그러나 어려운 말은 말에 복선이 깔려 있고 다른 노림수가 있을 수 있다. 권위적이고 고압적이며, 가식적이고 독선적이어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개를 돌리게 한다.

이제 돌려진 고개가 다시 바로 돌아오도록 대통령의 화법이 본래대로 돌아오면 어떨까.

김형춘 (반야거사회 회장 /창원 문성고 교장) 글. 월간반야 2005년 10월 제 58호

지는 꽃도 아름다웠으면

제 철을 맞아 만개하여 그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고는 시들어 지는 꽃을 보면서도 ‘곱고 아름답게’ 시들어 떨어지기를 바란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오륙년 전 쯤 집에서 분재로 키우던 진홍색 영산홍을 텃밭에 옮겨 심었다.

은행나무, 팽나무, 소사나무, 소나무에 이어 자연에 가까운 텃밭으로 시집을 보낸 것이다. 집에 있을 때에도 영산홍은 꽃이 피면 돌아가신 노모의 사랑을 독차지하였었는데, 밭에 옮긴 뒤에도 이 꽃이 피면 주변의 무수한 꽃들이 무색할 정도로 이웃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곤 했다. 키도 그동안 많이 자라서 1.5m 정도 되고, 크기도 직경이 1.5m 정도 되는데 3단의 비대칭형으로 수형도 꽤나 괜찮은 편인데다 꽃 색깔은 그야말로 짙은 붉은색이다. 어쩌면 소름이 끼칠 정도의 진홍색이라고나 할까. 이 꽃이 만개할 때쯤이면 우리 텃밭 앞집 주인더러 누가 꽃구경을 오거든 관람료를 좀 받아달라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

그런데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이런 꽃도 1주일을 채 넘기지 못하고 꽃잎이 시들고 색깔은 적갈색으로 변하다가 거무튀튀하게 말라간다. 그 모습도 보기가 좋지 않은데 더한 것은 잎이 피면서 잔가지 사이가 좁아서 시든 꽃잎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하도 보기가 흉해서 손으로 시든 꽃잎을 털고 있노라니 멀찍이서 보고 있던 가족도 같은 느낌이었다며 웃었다.

이즈음 지는 꽃을 바라보는 것만큼 서글픈 것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것 같은 권력을 누리던 고관대작들이 줄줄이 감옥으로 가는 모습들이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는 것으로 모자라 부당하게 뇌물을 받아 금고를 채웠다니 사필귀정이라고나 할까.

인격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사람이 높은 자리를 탐하고,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에게 권력을 주면 반드시 탈이 나게 마련이다. 공직에 나아가는 사람이 부(富)와 권력(權力)과 명예(名譽)를 다 누리려고 하니 탈이 날 수밖에 없다. 사람의 앞날 일을 알 수는 없으나 이제 감옥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다시 명예를 회복하고 이승에서의 삶을 잘 마무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대자연도 ‘부처님 오신날’을 봉축하기 위해 온갖 장엄을 다해주는데, 올해의 ‘초파일’은 한갓 중생도 아닌 몇몇 스님들로 인해 봉축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부처님의 제자임을 자처하면서, 부처님께서 가신 길을 기꺼이 따르려고 다짐한 이 땅의 숱한 불제자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참담함을 안겨주고 있다.

가히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고,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 나설 자신도 없다. 신문이나 TV 화면을 바라볼 용기도 나지 않는다.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이나 평소 불교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던 사람들이나 단체들은 때를 만난 듯 난리다.

평소에도 어느 종단에 관계없이 승적을 가졌는지 여부도 따지지 않고, 먹물들인 옷만 입고 다녀도 ‘스님’으로 여기고, ‘불교’라는 이름으로 그 행적이 수행자답지 않으면 마구 비방하던 사람들이 ‘얼씨구나’하고 때를 만난 듯이 공격을 하고 있다. 조계종 종단에서, 더구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스님도 아닌 중견의 간부들의 상상하기도 싫은 파렴치한 행적이 공개되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언젠가 겨울 산을 걸으면서 봄부터 가을까지 그렇게 아름답던 단풍나무를 보면서 왜 겨울이 되었으면 그 곱던 잎이 낙엽 되어 떨어져버리지 않고 칙칙한 색깔로 추하게 매달려 있느냐고 원망한 적이 있었다. 봄에 피는 꽃도 꽃눈이 싹이 트고 꽃봉오리가 자라면서 그 아름다움이 더해지고, 꽃잎이 한두 잎 피어날 때의 그 아름다움에서부터 활짝 피면서 절정에 이르는 것이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계속 보고 누리고 싶은 것은 인간의 끝없는 지나친 욕심일까.

그러나 인간의 꽃인 ‘인화(人花)’는 자연계의 꽃과 달라야 한다. 지는 꽃이 이름다워야 한다. 승속(僧俗)에 관계없이 곱게 늙어야 하고, 추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병이 들어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없을 때야 어찌 하겠는가마는. 인간사회의 지는 꽃은 자연계의 지는 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추한 모습을 보이지 말고 아름답게 시들어 떨어졌으면 좋겠다.

김형춘 창원문성대학 교수, 문학박사, 월간 반야 2012년 6월 139호

지금 이 땅에 부처님이 계신다면

불기 2547년 부처님 오신 달이다. 부처님께서는 ‘여래가 가신지 2천5백년 뒤〔後五百歲〕에도 계를 받아 지니고 복을 닦는 자가 있어서 〔有持戒修福者〕 능히 이와 같은 말과 글귀(무릇 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현상이 참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곧 여래를 보리라)에 신심을 내어 이것을 진실하게 여기리라〔於此章句 能生信心 以此爲實〕’고 하셨건만 그 사람들의 수효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고 허망한 상을 좇는 사람만 늘어가는 것 같다.

세속적인 표현이지만 나라가 어려우면 충성스런 신하가 생각나고, 집안이 어려우면 어진 아내가 그립다는 말처럼 이 시대 우리 사회가 하도 딱해 보여서 생각하다 못해서 ‘지금 이 땅에 부처님께서 계신다면’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얼마 전 취임 두 달을 맞은 대통령이 어느 일간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불안’하다는 솔직한 표현을 하였다고 한다. 사실 어려운 시기에 처한 나랏일을 맡았으니 보통사람이라면 잠을 제대로 못 이루는 게 당연한 일일 것이다. 북한의 핵문제ㆍ이라크 파병문제ㆍ난마처럼 얽힌 정치문제ㆍ노동조합을 비롯한 이익집단들의 대정부 투쟁ㆍIMF 때보다 더 어렵다고 하는 실물경제ㆍ점점 더 어려워지는 교육현안ㆍ사회적 이념과 가치관의 혼재로 인한 사회불안 등 생각만 해도 어지럽다.

우선 대통령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는다면 명예와 권세의 무상함을 깨닫고 이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왕자의 자리도, 부모님의 은혜도, 처자의 사랑도 버렸듯이 조금만 마음을 비우면 정법대로 왕도정치를 한다면 금방 머리가 가벼워질텐데 말이다. 또한 가장 큰 쟁점인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풀어주는 문제다. 무릇 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다고 했다.

인연 따라 살면서 잠시 보관했다가 남의 손에 넘겨줄 물질이라면 많이 갖고 적게 갖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되는가. 많이 가져도 고민이고 적게 가져도 고민이라면 바둥거리며, 다투고, 얼굴을 붉히는가 하면, 때로는 원수가 되면서 까지 많이 보관하면서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부처님의 지혜를 빌어 국민 교화에 힘을 기울이면 어떨까.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 베푸는 삶, 보시하는 삶의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해 준다면 집단이기주의자들이 날마다 관공서 앞에서 시위를 하는 모습도 사라질 것이다. 지금도 측근들이 사정당국에 붙들려가서 마음이 불편하겠지만 도덕성의 파괴는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지름길이다. 부처님의 가르치심대로 사회지도자나 공직자, 적어도 대통령의 측근들만이라도 기본적 계율을 지키게 하면 공직이나 사회 전체로 파급되어 한결 나아질 게다. 살생도, 도적질도, 사음도, 거짓말도 ….

대지는 날로 푸름을 더해가건만 우리 사회는 날로 회색빛깔이 더 짙어 가는 것 같다. 희망을 갖고 밝고 높은 서원을 세워 정진 또 정진하여야 할텐데.

김형춘 글 / 월간반야 2003년 5월 (제3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