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의 고뇌

특별히 잘하는 것도 내세울 것도 가진 것도 변변찮은 어중간한 보통사람이다. 뚜렷한 목표도 없고, 특별한 의욕도 없고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고민만 하면서 산다. 그냥 하루 하루를 어영부영 살아가다 무슨 일이 닥치면 또 적당히 헤쳐 가면 될 테니까. 성인 공자님도 ‘시중지도(時中之道)’라고 했다지 않은가. 그러다가 또 누가 문제를 제기하면 그때 적당히 구슬려서 넘어가고, 명쾌하게 잘라 놓으면 어느 한쪽에서 이의를 제기하면 곤란하니까. 딴은 자기 합리화를 위해서 잘 쓰는 변명의 말투인즉 ꡐ시공을 뛰어 넘는 사고를 하는 천재는 항상 외롭고 간혹은 만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내는 예가 많다ꡑ는 것이다. 보통의 범주 속에 사는 게 별난 사람보다는 남에게 경쟁의 대상도 안 되고 모나지 않아서 오히려 편하다. 그렇다고 남의 발길에 채이거나 따돌림을 받는 것은 보기 흉하니까 싫다.

세상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볼 때 그 사람 자체의 됨됨이만으로 평가하지 못하고 하는 일이나 가정환경, 사회적 지위나 외모와 차림새 등을 보고 자기 사고의 틀에 맞춰서 자기가 끼고 있는 색안경을 통해 그 사람을 평가한다. 또는 그 사람을 대하기 전에 갖고 있던 선입관으로 판단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나는 그런 위인도 못된다. 미운 사람보고도 반가운 척 웃고, 하고 싶지 않는 말도 꼭 해야 할 때도 있고, 지키지 못할 약속인 줄 뻔히 알면서 면전에서 거절을 못해 그렇게 하마고 약속도 남발한다. 누군가의 하찮은 말에도 상처받아 속상해 하면서도 나도 누군가에게 그냥 나오는 대로 생각 없이 지껄인다. 상대에게 상처를 준 줄도 모르고 살다가 뒷날 우연히 알고는 별수 없이 후회하며 산다. 여전히 자기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남의 눈치를 보면서 알량한 체면 때문에 적당히 살아간다.

남들은 불혹(不惑)의 나이를 지나면 바깥세상에서 보고 듣는 것에 유혹 받지 않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데 나는 불혹을 지난 지 스무 해가 다 되었는데도 오히려 더 흔들리는 것 같다. 이맘때면 이제껏 맺었던 인연도 정리해야 할 텐데 갈수록 산이다. 왜 이리도 옆을 돌아보아야 될 일도 많고 계산을 대야 할 일도 많은가. 이게 중생의 한계인가. 부처가 될 팔자는 아예 아니던가. 벌써 치열한 삶의 무대에서 내려와 그저 다른 사람의 삶을 관조하는 구경꾼으로 전락한 것일까. 그러나 어쩌랴. 이순(耳順)을 바라보면서 크게 이룬 것도 없지만 크게 후회하고 한탄할 일도 없으니 그저 인생이란 ‘그러려니’ 하며 살뿐이다.

헨리 제임스의 소설에 나오는 ‘불운을 깨울까 무서워 발끝으로 살짝 살짝 걸으며 살아 왔다’고 한 말은 나를 두고 한 것 같다.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느끼는 감정은 그저 안도감과 허탈감뿐이랄까. 그나마 커다란 실수 없이, 별다른 사고 없이 또 하루를 마무리했다는 안도감이 앞선다. 그에 뒤 따라 오늘 또 아무것도 제대로 한 것 없이 내 인생의 소중한 남은 하루를 무의미하게 허비했다는 허탈감이다. 그러나 어쩌랴. 내일은 좀 달라지겠지. 달이 바뀌면 변하겠지. 해가 바뀌면 철이 들겠지.

김형춘 香岩(반야거사회 회장) 글. 월간반야 2005년 8월 제57호

중국과 불교

인터넷에서 세계종교인구를 검색하여 보면 정말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구구각색이다. 물론 조사 기관에 따라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통계자료를 인용하였는지 차이가 나도 너무 심하다. 게다가 주로 기독교 관련 단체에서 발표한 자료가 많아서인지 아전인수 격으로 그들의 종교 인구를 부풀려 놓은 게 눈에 보인다.

유럽의 경우 교회나 성당이 텅텅 비어있는 곳이 많은데도 인구 전체를 기독교 인구로 잡는다든지, 우리나라도 자기들끼리 싸울 때는 ‘이단’이라고 열을 올리면서도 통계에는 모두 너그럽게 기독교에 포함시키고 있다. 세계종교지도에서도 차츰 변하고는 있지만 중국의 경우엔 전통 민속종교로 표시하다가 요즈음엔 대승불교로 표시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미군이 주둔하여 ‘미국에 의한 질서(미국의 힘에 의한 평화)’ 즉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에 편입되어 있다. 그러기에 정치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미국 쏠림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미국에 유학을 하고 미국 정관계에 인맥을 가져야 출세할 수 있고, 그들의 기업과 손을 잡아야 기업을 키울 수 있다.

학문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야 국내 대학 교수 신규임용에 서류라도 내어볼 수 있다. 미국 편향적 학문의 폐해를 이야기하면서도 쉬 고쳐지기 어려울 게다. 이러한 미국문화의 근저에 ‘기독교’가 있다. 대세가 이러니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를 믿어야 출세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올 법하다.

바야흐로 세계는 변하고 있다. 우리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국제사회의 역학구도는 시시각각으로 바뀌고 있다. 미국이 세계 경찰국가로서의 위상이 약화(?)됨과 맞물려 중국의 부상이 눈에 띤다. 중국은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항하여 여러 측면에서 거부반응을 보이는 데 그 중 하나가 기독교에 대한 태도다. 겉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 같으면 서도 눈에 보이지 않게 제동을 거는 것으로 들었다. 한반도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앞으로 점점 더 늘어날 것이 명약관화하니 기독교문화의 미국과 불교문화의 중국의 대결구도가 심상찮다.

중국인들에게 불교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제 지구상의 G2 국가로서 미국과 경쟁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은 그들의 ‘정체성’을 ‘불교’에서 찾으려는 것 같다. 본래 ‘유교’와 ‘도교’가 중국에서 발생하였지만 민속종교적인 색채가 짙을 뿐 아니라 보수적이고 퇴영적, 복고적인 경향이 있기에 민족과 국가를 넘어 세계화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반면에 불교는 보편주의적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특정의 민족이나 국가에 얽매이지 않고 포교와 전도에도 무리가 없다고 본 것이다. 특히 미국과의 대결구도에서 중국이 불교를 옹호하는 것은 기독교문명을 앞세운 ‘기독교 패권주의’의 미국에 맞서기 위한 전략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의 경우 삼국시대 불교가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이래 불교가 국교로까지 융성했던 것은 당시에는 적어도 동아시아에서 ‘중국에 의한 세계질서(중국의 힘에 의한 평화)’ 즉, ‘팍스 시니카(Pax Cinica)’가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미래학자들이 다시 ‘팍스시니카’를 강조하는 것이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다. 이와 때 맞춰 온라인상에서도 중국 불교의 약진이 눈에 띤다. 특히 블로그에 올려져 있는 불교음악은 거의 중국에서 온 것이라 한다.

중국정부가 불교에 대해 우호적인 이유는 비단 미국과의 대결구도 만은 아니고 그들이 추구하는 이념과도 맞아떨어진다는 점이다. 그 첫째는 불교가 ‘평등의 종교’라는 점이다. 부처님 당시부터 승단에 들어오는 사람에 대해 어떤 신분의 차별을 두지 않았고, 출생보다는 그 사람의 행위에 따라 신분이 결정된다고 하시지 않았던가.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중국정부로서는 이보다 더 나은 이념의 논리는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불교는 ‘계승의 종교’라는 점이다. 과거 문화유산의 계승이 국민통합을 위한 정체성으로 본 것이다. 중국은 곳곳에 과거 찬란했던 불교문화의 유적을 갖고 있으니 더할 나위 없는 자산이 될 것이다.

아울러 불교는 전근대적인 것이라고 하여 개혁이나 극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도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 중국은 곳곳의 불교문화유적을 다시 챙기고, 사찰을 중수하며 거액을 투자하여 불교행사를 치르면서 분위기 조성에 힘쓰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정부의 불교 정책에도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티베트와 티베트불교, 달라이라마 14세일 것이다. 앞으로 중국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지켜볼 일이다.

김형춘 창원문성대학 교수, 문학박사, 월간 반야 2012년 3월 136호

좋은 친구

옛 어른들의 가르침에 ‘삼인행에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라 했고, ‘선악이 개오사〔善惡 皆吾師〕’라고 하였다. 비단 친구에 한정하여 쓰이는 말은 아니지만 ‘세 사람이 어떤 일을 도모함에 있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거나 ‘선량함과 악함이 모두 다 나의 스승이 된다’는 뜻일 게다. 선량한 사람으로부터는 그 착한 마음 씀씀이나 행동거지를 본받고, 사악하고 나쁜 사람으로부터는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자세로 자신을 탁마하는 대상으로 삼으면 그 역시 스승이 된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좋은 친구를 갖는 것이 그렇지 못한 친구를 갖는 것보다 나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샤카족의 한 마을에 머무르시던 때에 시자인 아난다〔阿難〕가 “대덕이시여, 잘 생각해 보옵건대 우리가 좋은 벗을 갖고 좋은 동지들 속에 있다는 것은 이미 성스러운 이 도(道)의 절반을 성취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겨집니다. 이런 생각은 어떻겠나이까”라고 여쭈었다고 한다. 이 물음에 붓다께서는 그것은 절반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도의 전부라고 하시면서 “사람들은 나를 좋은 벗으로 삼음으로써 늙지 않으면 안될 몸이면서 늙음으로부터 자유로와 질 수 있고, 병들지 않으면 안될 몸이면서 병으로부터 자유로와 질 수 있으며, 또 죽지 않으면 안될 몸이면서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와 질 수 있다. 아난다여, 이것을 생각해도 좋은 벗을 가지고 좋은 동지들 속에 있다는 것이 이 도의 전부임을 알 수 있지 않느냐”고 하셨단다.

부처님께서는 그 제자에 대해 자기를 좋은 벗으로 자처하셨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여기서 ‘좋은 벗’이란 산스크리트어로는 ‘칼야나미타(kalyanamitta)’, 팔리어로는 ‘칼야나미트라(kalyanamitra)’라고 하는 것을 중국인들은 ‘선지식(善知識)’이나 ‘선친우(善親友)’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좋은 벗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셈이다. 좋은 친구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는다면 늙고 병들고 죽는 것과 같은 고통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보람되고 뜻깊은 일인가. 또 부처님께서는 좋은 벗을 갖고 있는 비구라면 그가 이윽고 성스러운 여덟 가지 바른길〔八正道〕을 배우고 닦아 그 공을 거둘 수 있게되리라고 기대해도 좋다고 하셨다.

우리는 평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조직 속에서 관계를 맺고 있다. 연말이 되면 이 모임 저 모임에서 모두 송년행사를 한다고 야단들이다. 그러나 그렇게 소란떨지 않고 지나면서도 생각나는 모임,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면 그건 우리 ‘반야암’ 식구들이다. 아무런 이해관계나 가식 없이 한 달에 한번씩 반가운 얼굴로 만났다가 아쉬움 속에서 헤어지니 말이다. 통도사 큰절의 산문을 들어서면서부터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세속을 등지고 모두가 한 생각이 되고, 소중한 도반이 되고, 급기야 법당에 들어가면 정말 ‘좋은 친구’가 된다. 무심히 흘러가는 세월 위에 또 하나의 점을 찍으면서 소중한 인연에 감사의 뜻을 표한다. 나무관세음보살.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4년 1월 제3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