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어른들의 가르침에 ‘삼인행에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라 했고, ‘선악이 개오사〔善惡 皆吾師〕’라고 하였다. 비단 친구에 한정하여 쓰이는 말은 아니지만 ‘세 사람이 어떤 일을 도모함에 있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거나 ‘선량함과 악함이 모두 다 나의 스승이 된다’는 뜻일 게다. 선량한 사람으로부터는 그 착한 마음 씀씀이나 행동거지를 본받고, 사악하고 나쁜 사람으로부터는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자세로 자신을 탁마하는 대상으로 삼으면 그 역시 스승이 된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좋은 친구를 갖는 것이 그렇지 못한 친구를 갖는 것보다 나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샤카족의 한 마을에 머무르시던 때에 시자인 아난다〔阿難〕가 “대덕이시여, 잘 생각해 보옵건대 우리가 좋은 벗을 갖고 좋은 동지들 속에 있다는 것은 이미 성스러운 이 도(道)의 절반을 성취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겨집니다. 이런 생각은 어떻겠나이까”라고 여쭈었다고 한다. 이 물음에 붓다께서는 그것은 절반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도의 전부라고 하시면서 “사람들은 나를 좋은 벗으로 삼음으로써 늙지 않으면 안될 몸이면서 늙음으로부터 자유로와 질 수 있고, 병들지 않으면 안될 몸이면서 병으로부터 자유로와 질 수 있으며, 또 죽지 않으면 안될 몸이면서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와 질 수 있다. 아난다여, 이것을 생각해도 좋은 벗을 가지고 좋은 동지들 속에 있다는 것이 이 도의 전부임을 알 수 있지 않느냐”고 하셨단다.
부처님께서는 그 제자에 대해 자기를 좋은 벗으로 자처하셨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여기서 ‘좋은 벗’이란 산스크리트어로는 ‘칼야나미타(kalyanamitta)’, 팔리어로는 ‘칼야나미트라(kalyanamitra)’라고 하는 것을 중국인들은 ‘선지식(善知識)’이나 ‘선친우(善親友)’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좋은 벗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셈이다. 좋은 친구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는다면 늙고 병들고 죽는 것과 같은 고통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보람되고 뜻깊은 일인가. 또 부처님께서는 좋은 벗을 갖고 있는 비구라면 그가 이윽고 성스러운 여덟 가지 바른길〔八正道〕을 배우고 닦아 그 공을 거둘 수 있게되리라고 기대해도 좋다고 하셨다.
우리는 평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조직 속에서 관계를 맺고 있다. 연말이 되면 이 모임 저 모임에서 모두 송년행사를 한다고 야단들이다. 그러나 그렇게 소란떨지 않고 지나면서도 생각나는 모임,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면 그건 우리 ‘반야암’ 식구들이다. 아무런 이해관계나 가식 없이 한 달에 한번씩 반가운 얼굴로 만났다가 아쉬움 속에서 헤어지니 말이다. 통도사 큰절의 산문을 들어서면서부터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세속을 등지고 모두가 한 생각이 되고, 소중한 도반이 되고, 급기야 법당에 들어가면 정말 ‘좋은 친구’가 된다. 무심히 흘러가는 세월 위에 또 하나의 점을 찍으면서 소중한 인연에 감사의 뜻을 표한다. 나무관세음보살.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4년 1월 제3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