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철을 맞아 만개하여 그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고는 시들어 지는 꽃을 보면서도 ‘곱고 아름답게’ 시들어 떨어지기를 바란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오륙년 전 쯤 집에서 분재로 키우던 진홍색 영산홍을 텃밭에 옮겨 심었다.
은행나무, 팽나무, 소사나무, 소나무에 이어 자연에 가까운 텃밭으로 시집을 보낸 것이다. 집에 있을 때에도 영산홍은 꽃이 피면 돌아가신 노모의 사랑을 독차지하였었는데, 밭에 옮긴 뒤에도 이 꽃이 피면 주변의 무수한 꽃들이 무색할 정도로 이웃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곤 했다. 키도 그동안 많이 자라서 1.5m 정도 되고, 크기도 직경이 1.5m 정도 되는데 3단의 비대칭형으로 수형도 꽤나 괜찮은 편인데다 꽃 색깔은 그야말로 짙은 붉은색이다. 어쩌면 소름이 끼칠 정도의 진홍색이라고나 할까. 이 꽃이 만개할 때쯤이면 우리 텃밭 앞집 주인더러 누가 꽃구경을 오거든 관람료를 좀 받아달라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
그런데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이런 꽃도 1주일을 채 넘기지 못하고 꽃잎이 시들고 색깔은 적갈색으로 변하다가 거무튀튀하게 말라간다. 그 모습도 보기가 좋지 않은데 더한 것은 잎이 피면서 잔가지 사이가 좁아서 시든 꽃잎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하도 보기가 흉해서 손으로 시든 꽃잎을 털고 있노라니 멀찍이서 보고 있던 가족도 같은 느낌이었다며 웃었다.
이즈음 지는 꽃을 바라보는 것만큼 서글픈 것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것 같은 권력을 누리던 고관대작들이 줄줄이 감옥으로 가는 모습들이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는 것으로 모자라 부당하게 뇌물을 받아 금고를 채웠다니 사필귀정이라고나 할까.
인격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사람이 높은 자리를 탐하고,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에게 권력을 주면 반드시 탈이 나게 마련이다. 공직에 나아가는 사람이 부(富)와 권력(權力)과 명예(名譽)를 다 누리려고 하니 탈이 날 수밖에 없다. 사람의 앞날 일을 알 수는 없으나 이제 감옥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다시 명예를 회복하고 이승에서의 삶을 잘 마무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대자연도 ‘부처님 오신날’을 봉축하기 위해 온갖 장엄을 다해주는데, 올해의 ‘초파일’은 한갓 중생도 아닌 몇몇 스님들로 인해 봉축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부처님의 제자임을 자처하면서, 부처님께서 가신 길을 기꺼이 따르려고 다짐한 이 땅의 숱한 불제자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참담함을 안겨주고 있다.
가히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고,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 나설 자신도 없다. 신문이나 TV 화면을 바라볼 용기도 나지 않는다.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이나 평소 불교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던 사람들이나 단체들은 때를 만난 듯 난리다.
평소에도 어느 종단에 관계없이 승적을 가졌는지 여부도 따지지 않고, 먹물들인 옷만 입고 다녀도 ‘스님’으로 여기고, ‘불교’라는 이름으로 그 행적이 수행자답지 않으면 마구 비방하던 사람들이 ‘얼씨구나’하고 때를 만난 듯이 공격을 하고 있다. 조계종 종단에서, 더구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스님도 아닌 중견의 간부들의 상상하기도 싫은 파렴치한 행적이 공개되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언젠가 겨울 산을 걸으면서 봄부터 가을까지 그렇게 아름답던 단풍나무를 보면서 왜 겨울이 되었으면 그 곱던 잎이 낙엽 되어 떨어져버리지 않고 칙칙한 색깔로 추하게 매달려 있느냐고 원망한 적이 있었다. 봄에 피는 꽃도 꽃눈이 싹이 트고 꽃봉오리가 자라면서 그 아름다움이 더해지고, 꽃잎이 한두 잎 피어날 때의 그 아름다움에서부터 활짝 피면서 절정에 이르는 것이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계속 보고 누리고 싶은 것은 인간의 끝없는 지나친 욕심일까.
그러나 인간의 꽃인 ‘인화(人花)’는 자연계의 꽃과 달라야 한다. 지는 꽃이 이름다워야 한다. 승속(僧俗)에 관계없이 곱게 늙어야 하고, 추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병이 들어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없을 때야 어찌 하겠는가마는. 인간사회의 지는 꽃은 자연계의 지는 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추한 모습을 보이지 말고 아름답게 시들어 떨어졌으면 좋겠다.
김형춘 창원문성대학 교수, 문학박사, 월간 반야 2012년 6월 13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