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오신날 봉축사

사생의 어진 어버이이시고, 삼계의 큰스승이신 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에 오신 날을 축하하기 위해 온 산과 들은 화사한 꽃과 초록빛 초목으로 눈부시게 장엄하였습니다.

오늘은 인천(人天)의 스승이시고 성인 중에 성인이신 부처님께서 지혜와 자비의 광명으로 미혹한 중생의 근본무명을 밝히고, 만유 중생을 고해에서 건져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지금 우리는 부처님 오신 날을 봉축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여 기쁜 마음을 함께 나누면서 신심을 일깨우고 새로운 서원을 세우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사부대중 여러분!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란 탄생게송은 부처님께서 “뭇 생명의 존귀성과 더불어 서로 돕고 사는 이상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지혜의 등불로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뜻일 것입니다. 불편한 중생을 편안하게 하고, 무지한 중생을 지혜롭게 하고, 병든 중생은 건강하게 하고, 고통받는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무명의 업보 속에서 생사에 유전하고 있는 중생의 고통과 슬픔을 부처님의 대자대비하신 본원력에 의지하여 치유하고, 나아가 불국정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염원을 고이 간직하고서 우리는 부처님의 오심과 그 공덕을 받들어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불자 여러분!

오늘 우리들이 이렇게 부처님 오신 날을 기리는 뜻은 거룩하신 부처님의 힘에 의지하여 참다운 삶의 가치를 추구하며 무량한 복덕을 구족하고자, 불법을 수지하고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떳떳한 불자가 되기 위함입니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 먼저 업력에 이끌려 생사 윤회 속에 나고 죽기를 거듭하는 중생의 생명이 아니라, 부처님과 같은 생명이 되고자 서원하면서 ‘내가 지금껏 쌓아온 수행을 스스로 반성’해보자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삶이 죄업이었는지 공덕이었는지를 말입니다. 그런 연후에 내 생명 가치를 부처님과 같은 생명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참된 마음으로 ‘수행과 공덕’을 쌓는 보살행을 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부처님처럼 모든 중생과 세간을 연민히 여기는 자비를 통해, 사회정의의 실현과 고통받는 이웃의 아픔을 덜어주는 일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입니다. 이 시대 우리 사회의 중심화두인 ‘상생과 나눔’을 생각하며 내 작은 힘이라도 보태어 그들의 슬픔을 덜어주는 자비를 실천해야 합니다.

또한 많은 중생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자신의 이익과 안락을 희생할 각오가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 이타행이요, 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보살행 입니다.

이처럼 쉼 없는 자기 수행과 자비와 보살행으로 나를 닦고 중생을 제도합시다. 중생계의 삭막함과 살벌함과는 달리 자연계는 신록의 싱그러운 향기가 더해지는 가운데 우리 부처님 오신 날을 봉축하는 마음마다 공덕의 물결이 넘치고 광명의 세계가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끝으로 오늘 이 봉축법요식에 참여하신 모든 사부대중 불자 여러분께 부처님의 가피가 있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불기 2548년 4월 초파일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4년 6월 제43호

부부사이의 부름말〔呼稱語〕

언어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외솔 최현배 선생께서는 겨레란 피와 문화를 함께 하는 모임인데 피는 그 겨레가 함께 탄 것이요, 문화는 그 겨레가 함께 애지은(창조한) 것이라 하였다. 그러기에 언어는 그 겨레의 문화를 대표하며 모든 문화의 기초가 된다. 그들의 언어에는 스스로 만들어 낸 문화는 물론 삶의 터전인 자연경관이나 기후, 이웃하는 민족의 문화까지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에스키모인들에겐 ‘눈〔雪〕’을 나타내는 말이 열 가지나 된다고 한다. 내리는 눈이 다르고 쌓이는 눈이 다르고, 쌓여 있는 눈이 다를 것이다. 또한 이들의 언어에는 다양한 색상을 나타내는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희다’와 검다‘ 이외에는 다른 색깔을 나타내는 말이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리라.

남방의 스님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장 심도 있게 이해하고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집대성한 것이라고 자랑하는 책 중의 하나가 「아비담마」다. 이 아비담마의 주제는 ‘내 안에서 벌어지는 물(物)ㆍ심(心)의 현상’이다. 이 속에는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마음 81가지와 출세간의 마음 중 유익한 마음 4가지와 선악을 판단할 수 없는 무기(無記)의 마음 4가지를 포함하여 모두 89가지의 마음을 정리하고 있다. 우리말에는 ‘마음ㆍ뜻ㆍ생각…’ 등으로, 중국의 한자에는 ‘심(心)ㆍ의(意)ㆍ지(志)ㆍ상(想)ㆍ식(識)…’등의 말이 있지만 수적으로 비교가 되지 않는다. 가히 부처님의 영적 세계와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정신세계의 풍요함(?)을 나타내는 단적인 증거라고나 할까.

우리말에도 색상을 나타내는 말이나 사물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 등은 대단히 발달하고 어휘의 수도 풍부하다. 그 중 하나가 언어예절에 관계된 말이다. 유난히 존대법이 발달하여 높임말과 낮춤말이 까다로워 외국인들이 우리말을 배울 때에 애를 먹는다. 부름말〔呼稱語〕과 가리킴말〔指稱語〕도 많다.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겐 ‘유우(You)’ 하나면 족할텐데 참으로 복잡다단하다. 자기에 대한 칭호도 ’저, 제, 나, 우리, 저희, 할애비, 할미, 애비, 에미,…‘등에다 자기의 직책이나 직위를 붙이면 ’짐, 본 의원(?)…‘에 이르기까지 정말로 다양하다. 그 밖에 부모, 아들, 딸, 사회생활에서 잘 아는 사람, 잘 모르는 사람에 대한 칭호도 제각각이다. 여기다 여자가 시집을 가고, 남자가 장가를 가서 생기는 가족관계 용어도 비례하여 늘어난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칭호가 있으면서도 아예 부름말이 없거나 발달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그게 바로 부부간의 부름말과 처남의 아내와 시누이의 남편에 대한 부름말이다. 요즈음은 처남의 아내인 경우엔 ‘아주머니, 아지매, 처남댁 ’등으로 부르는데 ‘처남댁’은 가리키는말이지 부름말로는 적당하지 않은 것 같다. 시누이의 남편도 ‘아재, 서방님, o o (사는 곳, 택호)서방님’ 따위로 부르면 크게 어색하지 않다. 그런데 옛날엔 이들 사이도 남녀간의 내외하는 사이로 보아 부름말이 발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예부터 부름말이 없도록 되어있었다고 한다. 서로 말할 것이 있으면 가까이 다가가서 귓속말로 소곤소곤해야 되었다. 남들이나 어른들이 보는데서 부부가 큰소리로 부르거나 대화를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부부 사이의 말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도록(?) 나지막하게 해야 했다. 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부부 사이의 부름말이 꼭 필요한데도 적당한 말이 없다. ‘여보’라는 말도 ‘여보시오, 여보게, 여보(당신이)…’ 하는 등 반드시 부부간의 부름말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쓰이는 ‘자기’라는 말도 본래 ‘재귀대명사’로서의 의미는 본인을 가리키는 것이 주된 뜻이었다. 그렇다고 직접 이름을 부르기도 그렇고, 아이들의 이름은 더더구나 옳지 않다.

본시 둔해서 그런지 좋은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부부간의 좋은 부름말이 없을까.

김형춘 香岩 (반야거사회장, 창원전문대교수) 글. 월간반야 2006년 12월 제73호

복지사회를 그리며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영토가 넓은 나라, 석유와 구리 등 지하자원의 매장량이 손꼽히는 나라, 초원과 빙하와 폭포와 만년설이 관광객을 연중 손짓하는 나라, 인구밀도가 약 3.3명/㎢ 으로 도심을 벗어나면 주민을 구경하기가 쉽지 않은 나라, 65세 이상이면 모든 국민이 연금을 받고 모든 국민의 의료 서비스를 국가가 책임지는 나라, 그러기에 술과 담배의 판매나 음주장소, 흡연 장소가 극히 제약을 받는 나라, 공항이나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 이라 불릴 정도의 노인 천국이라는 인상을 받는 나라가 캐나다이다.

온도계의 수은주는 우리나라의 한 여름과 비슷한데 땀이 나지 않는 나라, 국내 여행을 하면서도 시계를 몇 번 고쳐야 하는 나라, 항공회사의 구조조정에서 젊은 사람들을 내어 보내고 나이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은 나라, 국립공원 안에서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도록 취사장과 땔감을 쌓아 놓은 나라, 외국의 이민을 받아들이면서 돈이나 기술이나 사업능력 등 국익에 보탬이 되면 어떤 종족이든지 환영하는 나라이다.

그 중 내가 가장 의아해 한 것은 두 항공사를 합병하여 ‘에어캐나다’라는 국영에 준하는 회사를 만들면서 노동조합의 요구로 젊은 사람들을 내보내고 나이 많은 사람들을 남게 했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오사카에서 캐나다로 갈 때부터 기내의 승무원들을 보고 왜 저런(?) 사람들을 고용 하는가 의아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밴쿠버공항에서부터 일하는 항공사 직원들은 거의 노인들뿐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이해가 되었다. 젊은 사람들은 이 직장을 그만두고 나가서 다시 기술을 익히든지 하여 다른 직장에서 또는 다른 직업에 쉽게 적응할 수 있겠지만 나이든 사람들은 이 직장에서 그만두면 아마 다시 직장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IMF이후 구조조정에서 원칙은 오직하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나이순으로 목이 달아나지 않았는가. 하기야 우리사회는 청년실업의 문제가 더 큰 고민이긴 하지만. 언제 우리 사회도 노인들이 편안히 연금을 받으며 노후를 즐길 수 있을까. 누구나 경제적인 고민을 하지 않고 병을 치료 받을 수 있을까.

이즈음 집안일로 고향엘 가끔씩 다녀온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30호 가까이 되던 마을이 이젠 절반으로 줄었다. 문제는 그 가운데서도 절반이 노인 혼자 또는 노부부가 사는 집이다. 대부분이 노인인 이 마을에서 몸이 건강한 사람 또한 별로 없다. 다들 노인성 질환이나 성인병으로 고생하며 산다. 그러면서도 다들 어쩔 수 없이 농사일을 한다. 새벽에 눈 뜨면 들로 나가고 어두워야 들어온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들 노인세대는 일제 침략기를 전후해서 태어났고, 광복 후의 어려움과 전쟁을 겪은 세대이고,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미친 듯이 일하고 나니 이제 남은 것은 질병과 늙음과 외로움뿐이라는 점이다. 누가 이들을 어떻게 보상해줄 수 있을까. 이즈음 나라꼴을 보면 크게 기대하기도 힘들 것 같고. 그러나 어쩌랴. 복지사회를 향한 우리의 기대를 꺾을 수는 더욱 없고. 바깥을 향한 우리의 관심보다는 안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이웃. 노인세대에 좀 더 정책적인 배려가 있어야 하겠다.

김형춘 香岩(반야거사회 회장, 문성고등학교 교장) 글. 월간반야 2005년 9월 제5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