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佛法)과 불법(不法)

요즈음 우리 사회의 핫이슈는 단연코 언론사 세무사찰이다. 싸움의 발단이 어디에 있었건간에 이 사건은 정부와 해당 언론사, 여당과 야당, 방송과 신문, 신문과 신문 등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비화되어있다. 언제쯤이나 결말이 날지도 예측이 쉽지 않다. 이 정권의 임기가 끝나고 차기 정권에 가서야 매듭이 지어질지, 아니면 차차기 정권에까지 이어질지 누구도 모른다.

문제는 ‘조세법’이란 법이고, 이 법을 올바로 집행하기 위한 ‘세무사찰’이다. 한쪽의 주장은 ‘법집행의 형평성’에 근거한 공정한 법집행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고, 다른 한쪽에선 법의 집행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다. 이에 근거하여 ‘언론 자유’를 탄압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다른 편에서는 언론 자유를 탄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검찰 수사는 진행되고 있고, 앞으로 결말은 법원의 판결과 초법적인 통수권자의 결단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같은 보통사람들의 생각은 높은 사람들과는 다르다. 높은 사람들은 여론조사나 선거의 표에 관심이 있지만 우리들 소시민은 우리의 생계를 걱정하면서 나라의 앞날을 염려한다. 여론 조사에서 언론사 세무사찰에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다는 수치는 여당에서 인용하고, 이 정권의 인기도 하락의 여론 조사 수치는 야당이 인용한다. 진절머리나는 정쟁을 언제까지 계속할지는 정치하는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지만 이미 민심은 당신들을 불신한지 오래다. 국면전환을 위해 애쓰는 모습들도 보이지만 그마저 쉽지 않은 것 같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법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법은 위정자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지면, 우리 소시민에겐 어떤 존재일까. 시인 괴테는 법학을 가장 고등속임수로 보아 ‘악마의 학문’이라고 했던가.

얼마전 산사의 주지를 맡고 계시는 한 비구니 스님의 얘기를 들었다. 우리나라의 사찰은 대개 산에 있고, 우리네 산들은 그린벨트거나 국립공원 또는 도립·군립 공원이거나 아니면 상수원 보호구역이나 절대녹지, 문화재 보호구역 등 다양하고도 요란한 법으로 묶여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그런 별난 지역의 사찰에서 나무 한 그루를 베거나, 길을 넓히거나, 집을 짓거나 고치거나, 채마밭을 조성할 때 등에는 법을 어기지 않고는 손을 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 왈 “우리는 불법으로 삽니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이 ‘불법’이라는 낱말이 무엇을 뜻하는지가 문제다. 산사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사시니까 당연히 ‘佛法’이라고 보아야겠지만, 조금이라도 도량에 손을 댈라치면 현행의 실정법을 어기지 않고는 불가능하기에 ‘不法’이라고 하신게 옳을지도 모른다.

사찰의 행정을 오래 맡은 주지스님들 가운데 그 ‘불법(不法)’ 때문에 벌금형 따위의 범법자가 안된 분이 드물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참으로 서글프기까지 했다. 언제쯤 이 땅에서 스님들이 ‘不法’을 걱정하지 않고 ‘佛法’을 펼 수 있을까.

지난 봄 전국교사불자회 임원회에서 우리 회장님께서 앞으로 십년후엔 이 땅이 불국토가 될 것이라는 분명한 예언을 하셨는데, 그날이 빨리 오길 기다리면서 ‘不法’ 아닌 ‘佛法’을, ‘正法’을 펴는데 조그만 힘이라도 보태야겠다.

김형춘 글 / 월간반야 2001년 8월 (제9호)

불기 2550년 부처님 오신날 봉축사

무한한 자비와 광명으로 온 세상을 감싸주시는 부처님!

만 생명을 고통에서 구하시려고 이 세상에 탄강하신 거룩한 날을 맞이하여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께서 오신 뜻을 깊이 새기고 찬탄하며 삼가 공경의 예를 올립니다.

가고 옴에 걸림이 없으시고, 나고 죽는 생사에 매임이 없으시며, 언제 어디에나 계시는 부처님! 깨달음을 얻어 만 생명을 관하시고, 큰 지혜와 큰 자비로 이끌어 주시기 위해 부처님께서 도솔천에서 이 사바세계에 오신지 2550년. ‘하늘과 땅 위에 나 홀로 존귀하니 온 세상 고통받는 이들을 내 마땅히 편안하게 하리라’ 고 외치심으로부터 고행 성도하시어 만인을 평등하고 모두를 화합하게 하시고 뭇중생을 고난에서 벗어나게 하신 부처님.

부처님께서 오신 이 날은 비단 부처님의 탄강에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거룩하신 부처님의 탄신이 없었더라면 출가도 없었을 것이요, 출가를 통하여 처절한 구도의 길을 걷고 깨친 성도 또한 없었을 것이며, 성도 이후 깨친 만큼 우리 사회와 인류에 베풀어줌이 없었다면 우리 불교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마지막 열반에 드실 때까지도 가르침을 멈추지 않으셨기에 더더욱 공경과 찬탄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오신날은 ‘불교의 축제일’이 되어 ‘부처님 오신날〔誕辰日〕’에다 ‘부처님 출가재일(出家齋日)’과 ‘부처님의 성도재일(成道齋日)’, 그리고 ‘부처님 열반재일(涅槃齋日)’까지를 합친 의미가 있다고 본다면 이 행사를 좀더 성대히 정성을 다해 준비하지 못함이 오히려 죄스러울 따름입니다.

여래(如來)께서는 진리〔如〕를 따라 오시기〔來〕에, 만법의 근원을〔眞如〕따라 출현하셨기에〔來〕 여래라 이름하셨으니 ‘태어나셨다’기보다는 ‘오셨고’, 오신 뜻도 또한 다겁생래로 지은 업 때문에 생사에 얽매여 끝없는 윤회를 계속하는 우리 중생을 구제하시기 위함이시었으니 그 은공을 무엇에다 비기겠습니까.

인류의 큰 스승이신 부처님!

이제 저희 사부대중은 부처님의 가르치심대로 사람으로 태어나서 부처님의 법을 만나는 인연을 얻었으니 부지런히 수행 정진하겠습니다. 자신을 갈고 닦아 인격을 완성하고, 자비를 실천하여 중생을 제도하며, 법음을 널리 펴어 중생을 구제하고, 진리를 가르쳐서 정의를 실천하는 불자로서의 사명과 책임을 다할 것을 다짐하오니 부디 굳건한 신념과 강인한 의지를 북돋아 주시옵소서.

때는 바야흐로 만물이 생동하여 활발하게 생명력을 키워가는 계절입니다. 부처님 오신날을 계기로 우리 불자들도 공덕의 씨앗, 깨달음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어 봅시다. 더 늦기 전에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다시없는 기회를 잘 활용합시다. 수행과 보살행을 통해 참다운 공덕의 탑을 쌓아갑시다.

끝으로 지난 7년 동안 우리의 정신적 의거처인 ‘반야암’을 이처럼 훌륭한 도량으로 가꾸어 주시고, 무지한 중생들을 불철주야 이끌어주신 ‘요산(樂山) 지안(志安)’ 큰스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리며, 오늘 봉축법요식에 참여하신 내빈 불자 여러분께 부처님의 가피가 늘 함께하시길 빕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불기 2550년 4월 초파일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6년 5월 제66호

부처님! 어디에 계시옵니까.

『떠나는 자만이 인도를 꿈꿀 수 있다』는 작가 임헌갑님의 이야기나, 『인도불적답사기(印度 佛跡踏査記)』에서 윤호진스님의 말씀과, 문수화 보살님의 『천축일기(天竺日記)』, 수미산 여행사의 『인도성지순례』등의 자료를 떠나기 전에 읽어보고, 가면서 읽어보고, 돌아와서 또 읽어보았지만 확실한 정답은 인도를 떠나오기 사흘 전 이역 만리 네팔의 룸비니 대성 석가사에서 정말 운 좋게도 호진 큰스님을 친견하고는 떼를 써서 듣게된 법문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한 달 동안 인도를 여행하면 소설을 쓰고, 1년을 다녀오면 겨우 수필 한 편을 쓰고, 인도에 머물러 살면 아무런 글도 쓰지 못한다고 하셨다. 정말 인도란 그런 곳인가. 보고 듣고 알면 알아갈수록 이해하기 힘든 나라 인도, 그렇다고 현실 속에서 보고 듣고 부딪치고도 느낌이 없다면 그게 어디 사람인가. 긴 글을 쓰면 소설이 되고 거짓말이 될 테니 ‘반야시론’ 난을 통해 4대 성지 중 부처님의 성도지를 둘러본 느낌을 이번 달에, 그리고 차창에 비친 인도 사회를 다음 달에 정말 간략하게 몇 자 써 볼 생각이다.

보팔에서 산치대탑을 보고 야간열차로 무려 16시간(2시간 연발에다 밤새 쉬엄쉬엄 갔으니)이나 수양(?)을 하고는 고도 바라나시에 도착하여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을 보고는 버스로 녹야원을 거쳐 성도지 보드가야로 향했다. 바라나시에서 보드가야로 가는 길은 최근 급성장하는 BRICs(브라질ㆍ러시아ㆍ인도ㆍ중국 등)의 중심국가 인도를 실감케 했다. 온 도로를 꽉 메운 트럭들의 행렬, 단 몇 분이라도 빨리 달리려는 차량들의 경적, 지금도 눈만 감으면 인도 차량들의 경적과 유적지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면 몰려드는 구걸행각 떼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는다.

우즈벨라 마을 근처의 보리수나무 아래서 선정에 들어 7일만에 정각을 이루신 곳, 보드가야 대탑과 보리수, 무칠란다 연못을 차마 떠날 수 없어 석양에 물든 마하보디대탑(Maha Bodhi Temple)을 우러르며 부처님의 체취를 느끼고는 숙소로 돌아왔으나 차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 서둘러 대탑을 다시 찾아 예불을 올리고 3시간 정도 자유시간을 허락 받아 금강보좌 옆 보리수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108배를 하곤 좌선에 들어 2천 5백여 년 전 부처님의 흉내를 내며 두어 시간을 지냈다. 지금은 그믐이 가까워 달도 없지만 카월(인도력 2월) 보름날 저녁 깊은 선정에 잠기면서 초저녁에 천안통이 열려 세상의 모든 중생들이 업의 과보에 따라 고통ㆍ변화하는 모습을 보고, 한밤중에 숙명통을 얻어 4성제를 깨닫고 8정도를 추구해 들어간다. 그리고는 인간의 괴로움의 근본인 무명을 간파하고 12인연을 거쳐 고통이 생겨남을 밝힌다. 다음날 새벽 동쪽 하늘에 샛별이 떠오르고 있을 때 홀연히 깨달음을 얻고 더 없는 정각을 이룬다. 대리석 바닥에 앉아 이런 부처님의 깨달으신 과정을 생각하며 금강보좌를 보고 있노라니 더없이 숙연해지고 눈물이 고인다. 갑자기 무릎 앞에 떨어진 보리수 잎을 주우며 시계를 보고는 일어서서 전탑을 쓰다듬으며 한 바퀴를 돌면서 “부처님, 부처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하고 중얼거리며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발자국과 텅 빈 보좌만 무명의 중생을 달래주는 것 같았다.

지금껏 몇 차례 시도하다 떠난 발걸음이지만 호진 스님의 말씀대로 ‘첫 번째’ 순례가 가장 인상적이라고 하니까 내 이 감흥을 어떻게 두고두고 간직할까를 고민해야 하겠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 머리와 가슴에 간직했던 부처님과 불교가 성지를 순례하면서 체화(體化)(?)되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소중한 소득이라고나 할까. 끝으로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삶의 목표를 설정하고 살아감에 있어 무엇을 얼마나 이루었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추구하는 과정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함이 중요함도 알았다. 역시 떠나는 자만이 부처님을 꿈꿀 수 있었다.

김형춘 香岩 (반야거사회 회장․창원전문대교수) 글. 월간반야 2008년 3월 제8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