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신성인(殺身成仁)

중국의 천지창조에 나오는 ‘반고(盤古)’의 신화는 삼국시대(AD3세기 경)에 씌어진 서정(徐整)의 ‘삼오역기(三五曆記)’라는 책에 실려있다. 아직 천지개벽(天地開闢)이 되지 않아 하늘과 땅이 나뉘어지지 않은 때였다. 흔히 혼돈(混沌) 또는 혼돈(渾沌)의 불분명한 상태였다. 이때 ‘반고’는 1만 8천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달걀 같은 알속에서 잠만 자다가 깨어나 어느 날부터 하루에 한길씩 키가 자라 그 체력으로 하늘과 땅이 나누어지게 버티기를 다시 1만8천년, 그 성장은 극점에 도달했고 키는 9만리나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9만리…’라든지, ‘9만리 장천 …’하는 말은 하늘과 땅 사이가 ‘반고’의 키와 같이 9만리라는 뜻이리라.

이렇게 하늘과 땅의 질서를 바로잡은 반고는 드디어 지쳐 죽음을 맞으니, 그는 자기의 두 눈으로 해와 달을 만들고, 한숨으로 풍운(風雲)을 만들었으며, 신체는 산악(山岳)으로, 피는 강과 바다로, 혈관과 근육은 길이 되고, 살은 논과 밭으로, 머리털과 수염은 별이 되고, 피부와 털은 초목으로, 치골정수(齒骨精水)는 금석주옥(金石珠玉)으로, 땀은 비와 이슬이 되어 이 세상을 기름지고 아름답게 만들어 놓았으니 이야말로 ‘살신성인(殺身成仁)’이 아닌가.

한 인간의 삶에 대해서는 그가 죽고 난 뒤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어느 정도 객관적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이지만 이즈음 우리 사회에서는 지난 3월 입적하신 ‘법정’스님의 삶과 죽음에 대한 논의가 언론과 네티즌들 사이에 요란하다. 특히 ‘무소유(無所有)’가 화두의 중심에 있다. 이 세상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빈손으로 떠난 것이다. 입적하기 전날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 달라.” 고 당부하셨고,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된다.”는 지혜를 일깨워 주고 가셨단다. 평소 장례절차도 “관과 수의를 따로 마련하지 말고,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해 달라.” 하였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도 말고 탑도 세우지 마라. 이 모든 것이 번거롭고 부질없으니 괜한 수고를 하지 마라.” 하셨단다.

언젠가 한번은 돌아갈 길, 모든 것을 훌훌 털고 육신마저 버리고 우리 곁을 떠나신 스님의 모습은 수행과 법문, 남기신 글 그대로 맑고 향기로웠다. 다시금 오래 전의 빛 바랜 「무소유」를 꺼내드는데 고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 책이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고.

그런데 왜일까. 자꾸만 아쉬운 생각이 드는 것은 역시 속물 근성 때문일까. 그냥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가셨다면 반듯한 영결식도 하고, 격식에 맞추어 다비식도 하였더라면 어떠했을까. “그동안 풀어놓은 말 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주기를 간곡히 부탁한다.”고 하셨단다. 우리 불교계를 위하여, 무지몽매한 중생들을 위하여 스님께서 생각을 바꿀 수는 없었을까.

일찍이 현대 한국불교의 중흥과 정화를 위해 혼신의 힘을 쓰셨고, 이 땅에 선불교와 조계종 종단에 확실한 힘을 실어주셨던 ‘성철’ 큰스님께서 1993년 11월 초순 입적하셨을 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살아 계실 때에도 한국불교의 상징적 존재이셨지만 입적하신 뒤에도 세인들에게 더 많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주셨기에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참모습을 보여주셨다고 믿어왔다. 그런 훌륭하신 조사스님들이 이 땅에 많이 계시겠지만 요즈음처럼 우리 불교가 안팎으로 어려울 때면 아쉬운 생각이 든다.

법정스님의 수행과 일상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법문과 문필활동을 통해서, 가까이서 모신 스님들의 전언을 통해서 본다면 우리 불교계를 위해서,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위해서 하실 일이 많을 것 같은데 말이다. 스님의 극락왕생을 빌 뿐이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론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뜻이다”(법정 스님의 ‘무소유’ 중에서).

김형춘 교수님 글. 월간 반야 2010년 4월 113호

사막에서의 일주일

“들으면 머리에서 잊혀지고, 보면 마음에 새겨지고, 만져보면 몸으로 이해한다.” 매년 한두 차례 우리 여행팀을 안내해주는 여행사의 일정표 첫머리를 장식하는 글귀다.

올해 여름 여행의 목적지는 ‘비단길[絲綢之路, 실크로드; Silk Route, Silk Road]’이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비단같이 아름답고 고운 길인 줄로 착각할까 두렵다. 정작 가보면 끝없는 사막과 군데군데 자리 잡은 오아시스 마을이 전부다. 우리나라에서 하지를 갓 지나고 갔으니 북위 45도를 넘나드는 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이곳의 일기예보도 매일 기온이 섭씨 35도에서 45도 정도였다.

실크로드. 지금부터 1천5백여 년 전, 비단 무역을 계기로 중국과 서역 각국의 정치‧경제‧문화를 이어준 육상과 해상의 교통로를 총칭하는 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가고자 했던 이 실크로드는 인류의 동경과 이상과 욕망을 속속들이 보여주는 개척사의 흔적이기도 하다.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벤’이 처음으로 ‘Silk Road’라 명명한 이 길은 중국 중원지방에서 시작하여 허시후이랑[河西回廊]을 가로질러 타클라마칸사막의 남쪽과 북쪽을 따라 파미르고원, 중앙아시아 초원, 이란고원을 지나 지중해의 동안과 북안에 이른다.

당시 동양문화의 중심인 중국 ‘장안(長安, 시안; 西安)’과 서양의 중심인 ‘로마’를 연결시킨 동서양의 교역로이자 정치 문화의 혈관이었다. 이 길은 크게 동쪽의 중원에서 ‘돈황(敦煌)’까지와, 중앙 부분인 돈황에서 파미르고원동쪽 구간, 신라의 ‘혜초’스님이 “죽은이의 뼈를 이정표삼아 넘었다”고 한 ‘쿤제랍패스’ 서쪽 구간으로 나누는데 이 여름 우리의 목적지는 실크로드의 중앙부분인 셈이다.

부산에서 북경까지 2시간, 북경에서 신강성의 ‘우루무치’까지 비행기로 5시간. 우루무치[烏魯木齊]에서 시작한 관광은 천산(天山), 트루판(吐魯番), 선선(鄯善), 하밀(哈密), 돈황(敦煌), 양관(陽關)으로 이어졌다. 사막과 사막 가운데 있는 오아시스마을에서 1주일을 지낸 셈이다. 지구상에서 바다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내륙이라 평생 바다 구경을 못해보고 죽어간 사람이 많다고 한다.

사막이라 하면 우리는 해수욕장이나 강가의 곱고 가는 모래밭을 연상하겠지만 ‘명사산’이나 ‘쿠무타크 사막공원’을 제외하곤 자갈과 모래와 흙이 뒤섞여 있다. 이곳 사람들은 이런 사막을 ‘거비사막’우리가 알고 있는 ‘고비사막’은 ‘지역’의 개념이지만이라 했다.

이런 척박한 사막에 길이 열린 것은 중국 전한(前漢, BC206―AD25) 때의 일이라고 한다. 한무제(漢武帝)는 대월지, 오손과 같은 나라와 손잡고 북방 변경지대의 흉노를 제압하고 서역으로 가는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장건(張騫)’을 두 차례에 걸쳐 중앙아시아로 파견하여 서방 각국과 사절을 교환하고 문물의 왕래가 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실크로드의 관문 ‘양관(陽關)’의 박물관 앞에 서 있는 ‘장건’의 동상이 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누가 왜 이 길을 열었는가도 중요하지만 동아시아에 불교를 전래하고 불교문화를 꽃피운 과정에서 ‘실크로드’의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 확실한 증거가 ‘화염산 천불동’과 ‘고창 고성’에 있고, 그 백미(白眉)가 ‘돈황 막고굴천불동’이었다.

‘막고굴’은 돈황현 동남 25km의 명사산에 있지만 이곳 역시 도시에서 한 발짝만 나가도 자갈과 모래로 된 불모의 사막 지대다. ‘돈황석굴’은 왕모래가 진흙 등과 섞여 이루어진 역암이어서 불상을 조각할 수도 없고 그림을 그릴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벽면에 흙을 발라 벽화를 그렸고, 공간에 따라 강바닥에서 채취한 흙을 이겨 불상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16km 길이의 절벽 면에 492개의 굴이 남아 있다. 이 굴속에 채색된 소상 2400점, 벽화가 4500평방미터가 있으니 가히 불교예술의 정수를 담은 세계적 보고인 셈이다.

수천의 석굴, 불상, 벽화가 사암, 퇴적암 등의 동굴 속에서 진리를 말해주고 역사를 들려주고 아름다움을 전해주고 있었다. 화가나 조각가이기 이전에 수행자가 되어 무아의 경지에서 혼을 불사른 선인들의 모습이 줄지어 떠올라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천 개가 넘는 굴속에 새겨진 작품들이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기법, 다른 재료로 만들어져 이 또한 불교미술의 경연장 같았다.

앞서 들렀던 화염산의 천불동에서 차례로 들렀던 39번굴, 33번, 31번, 27번 등에서 벽화나 불상 어느 것 하나도 훼손되지 않고 온전히 남은 게 없어 얼마나 속상해 했던가. 이슬람교도들에 의한 훼손에다 홍위병들이 황토로 덧칠을 하여 철저히 파손된 불교문화가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하였는데 이 곳 막고굴을 보면서 다소나마 위안이 되었다.

그 옛날 이 사막을 가로질러 오간 대상들이나 사신, 군사들이 막고굴을 지나면서 예배하고 쉬어가면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얼마나 위안을 받고 피로를 푼 뒤 모랫길로 떠났을까. 그 중에 한분, 신라의 ‘혜초’스님도 이 길을 걸어 인도까지 목숨을 건 구법 나들이를 하시고 ‘왕오천축국전’을 남기신 것이 바로 이곳 17굴에서 발견되지 않았던가.

지금은 텅 비어 희미한 벽화 흔적을 보면서 합장을 하고 나왔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일주일 동안 헤매면서 인간 뿐 아니라 생명체의 끈질김, 진리의 영속성, 예술의 영원성을 다시금 되뇐 것 같다.

김형춘 창원문성대학 교수, 문학박사, 월간 반야 2012년 8월 141호

사는 집의 이름을 지으며

인간의 알고자 하는 욕구는 그 실체를 파악하기 전에 먼저 그 사물에다 이름부터 붙여놓고 본다. 먼 우주공간의 별에서부터 우리 주변의 수많은 사물들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범인으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사유의 세계에서 직관에 이르기까지 마음의 움직임 하나하나에도 이름을 붙여야만 직성이 풀리는가 보다. 말로서 표현이 되어야만 생각이 구체화되고 이름으로써 정리되어야만 생각이 일정한 꼴을 갖추고 이해가 되니까 명명(命名)부터 하는 것이리라.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을 구별하여 생물(生物)과 무생물(無生物)로, 다시 살아있는 것은 식물(植物)과 동물(動物)로 나누는 등 때로는 한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있지만 그렇게 구분하여 이름을 붙이는 작업만 해 온 스웨덴의 ‘린네(Carolus Linnaeus)’와 같은 학자도 있지 않은가.

가끔 주위의 문인들이나 서화가들의 작업실이나 자택을 방문할 때면 대문간이나 마루 위 등에 걸린 편액(扁額)에 집의 이름을 붙여놓은 것을 볼 때나, 저서의 서문 말미에 서재(書齋)의 이름이 적힌 것을 보면서 언젠가 나도 우리집에 이름을 붙여볼까 하는 생각을 해왔다.

그러던 차에 얼마 전 어머니의 49재(齋)에 맞춰 졸저를 내면서 서문의 말미에 “무학산 기슭 향림헌(香林軒) 어머님 방에서” 라고 써버렸다. 일단 저질러놓고 본 것이다. ‘향림(香林)’은 40여 년 전 어머니께서 고향의 자그만 암자(庵子)에 다니실 적에 얻은 불명(佛名)이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 내외가 지안 스님을 뫼시고 반야암(般若庵)에 다니면서 스님으로부터 받은 법명(法名)이 ‘향암(香岩)’과 ‘보림화(寶林華)’이다.

나의 법명 앞글자인 ‘향(香)’과 아내의 법명 두 번째 글자인 ‘림(林)’자를 따 온 것과 어머님의 불명이신 ‘향림(香林)’이 일치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스님께서는 어머님의 불명을 어떻게 아시고 우리 내외에게 한자씩 나누어 작명을 하셨을까. 내외는 쾌재를 부르며 “향림(香林)”까지는 쉽게 합의를 할 수 있었다. 물론 뒤에 큰스님의 추인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러나 고민은 마지막 글자, ‘집’에 해당하는 글자를 고르는 것이 문제였다. 일단은 “향림헌(香林軒)”으로 서문은 탈고를 하고 계속 고민해 보기로 했다.

앞의 두 글자를 한자(漢字)로 하였으니 ‘집’에 해당하는 한자의 글자를 찾아보았다. ‘집 家(가), 집 齋(재), 집 宇(우), 집 院(원), 집 舍(사), 집 軒(헌), 정자 亭(정), 곳집 府(부), 집 閣(각), 집 屋(옥), 집 堂(당), 집 殿(전), 집 宮(궁), 집 戶(호), 집 臺(대), 집 宅(택), 객사 舘(관)’ 등 부지기수였다. 이들 중에서 앞의 두 글자와 소리와 의미를 따져보아 잘 어울리는 ‘堂(당)’과 ‘軒(헌)’을 두고 고민하다 ‘軒(헌)’으로 정하였다.

10여 년 전 이 지역에서 서예가로 활동하고 있는 후배로부터 연구실 분위기에 걸맞게 세로로 세우는 액자 한 쌍을 선물 받았는데 미관상으론 어울리지만 내용이 과분하여 나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볼 적마다 늘 고민을 해 왔다. 하나는 “長生不老神仙府(장생불로 신선부)”요, 다른 하나는 “與天同壽道人家(여천동수 도인가)”로 대를 이루는 것이었다.

‘오래오래 살면서도 늙지 않는 신선의 마을에, 하늘과 더불어 수를 누리는 도인의 집’이라는 뜻인 것 같다. 어디 나에게 비할 바이겠는가 마는 미루어 생각하건대 꾸준히 나를 갈고 닦아 이에 버금하는 수준의 인간이라도 되길 바라는 후배의 간절한 바람이라고 감히 해석하면서 감사할 따름이다.

‘향림헌(香林軒)’, 지금껏 이순의 나이에도 남들에게 좋은 냄새는커녕 인간미도 제대로 풍겨보지 못했는데 이제부터라도 향내 나는 풀숲이 되어 세파에 찌든 이웃들의 얼굴이 조금이라도 펴지게 노력하자는 다짐의 뜻이리라. 임진壬辰 새해를 맞으면서 이 자그만 소망을 품고 두 손을 모은다.

김형춘 창원문성대학 교수, 문학박사, 월간 반야 2012년 1월 13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