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불가역적(不可逆的) 상실

‘죽음’이라는 말을 글의 제목으로 내세우기가 조금은 껄끄러워 ‘생명의 불가역적 상실’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쓴 것이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 6월 초순 서울의 한 대학에서는 ‘죽음학’을 학문적으로 일궈 내겠다는 뜻으로 ‘한국죽음학회’가 창립기념학술대회를 가졌다고 한다. 과연 죽음이라는 미시의 영역이 학문으로 정립될 수 있는 것일까. 이날 학술대회에는 철학ㆍ종교학ㆍ신학ㆍ사회복지학ㆍ보건학 관련분야의 교수들이 나름대로 죽음에 대한 견해들을 쏟아 놓았다고 한다.

죽음학은 왜 필요하고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사실 죽음에 대한 글은 논리에 자신을 싣기 어렵고 논리를 뒷받침할 만한 실증을 확보할 수 없기에 어려움이 있다. 누가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하지만 죽음은 불가피하고 모두가 접하면서 느끼고 예상하고 상상하지 않는가. 인간에게 죽음은 생리현상이고 경제현상이며 사회적 현상이고 이 모두를 포함한 문화현상이다. 그러기에 이 학회의 회원들은 모든 죽음에 대한 담론의 기초를 제공해야 한다고 죽음에 대한 학회를 만든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서 자라고 성숙해지고 급기야는 노쇠하여 죽게 된다. 이렇게 삶과 죽음은 모든 인간의 운명이 지닌 정상적 궤도이다. 그런데도 일찍이 성인 공자는 제자인 계로의 죽음이 무어냐는 물음에 ꡒ사는 것을 제대로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ꡓ라고 하였다니 죽음의 의미는 쉽게 단정 지을 일이 아니다.

‘죽음’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생명활동이 정지되어 원 상태로 돌이킬 수 없는 상태’ 또는 ‘생물이 생명을 불가역적(不可逆的)으로 잃은 상태’라고 한다. ‘생명의 불가역적 상실’은 ‘인생무상(人生無常)’과도 이어지는 느낌이다. 의학이 발달하여 평균수명이 아무리 길어져도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의 죽음을 체험할 수는 없고, 단지 다른 사람의 죽음을 통해 간접적으로 죽음을 생각할 따름이다. 또한 그 죽음이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죽음에 대한 주체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은 죽음이 ‘삶의 부정(否定)이며 삶을 뒤집은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뜻을 묻는 것은 삶의 뜻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죽음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면 동시에 사람은 살아 있는 뜻을 파악하고 반성하여 본래의 자신과 그 삶의 목적을 주체적으로 스스로에게 물어볼 것이다. 그리하여 삶과 죽음의 문제를 전체적ㆍ통일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생사관(生死觀)’을 일체화 시켜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죽음이란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깨달음을 통해 실상을 초월하는 보다 높은 차원의 진리를 체득함으로써 극복된다고 하셨다. 우리의 궁극적 인식인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을 바르게 인식하여, 죽음을 마음의 문제로 귀결시키고 나아가 ‘적정(寂靜)’ 즉 ‘열반(涅槃)’의 경지에 이를 때 저절로 해결되리라 믿는다.

지난달에는 우리 가까이 계시던 ‘석거사’께서 유명을 달리 하셨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유족들에게 이 지면을 빌어 깊은 슬픔의 뜻을 표한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김형춘 香岩 (반야거사회 회장) 글. 월간반야 2005년 7월 제56호

상화하택(上火下澤)의 해

올 한해 우리 모두는 불과 물처럼 서로 상극이었다. 정(正)과 반(反)만 있을 뿐 합(合)이 없었다. 한국사회의 소모적 분열과 갈등은 여전했나 보다. 2005년 한국사회를 풀이하는 사자성어(四字成語)로 ‘상화하택(上火下澤)’이 꼽혔다. 교수신문이 올 한 해동안 교수신문에 기고했던 필진과 각 일간지 및 지역신문의 칼럼니스트 교수 2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한국의 정치ㆍ경제ㆍ사회를 통털어 풀이할 수 있는 사자성어로 ‘上火下澤’이 38.5%의 지지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주역에 나오는 이 말은 ‘위에는 불, 아래에는 못’이라는 뜻이다. 서로 이반하고 분열하는 현상이나 서로 상생하지 못한 채 비생산적인 논쟁과 대립, 분열만이 있었다는 뜻이다.

지난해 이맘 때 쯤 이었던가. ‘광복 60주년의 기대’를 하면서 ‘패를 지어 상대를 공격한다’는 의미의 ‘당동벌이(黨同伐異)’가 사자성어로 꼽힌 것을 탄식하면서 새해에는 제발 이런 성어가 나오지 않기를 그렇게도 바랐는데 또 헛수고로 돌아갔다. ‘오리무중(五里霧中)’, ‘이합집산(離合集散)’, ‘우왕좌왕(右往左往)’하다가 끝내는 ‘당동벌이(黨同伐異)’로 이어지더니, 급기야 올해는 갈라지고 말았는가.

나라 운영을 방치하며 벌이는 정쟁, 행정복합도시 건설을 둘러싼 비생산적인 논쟁과 지역갈등, 해방 60년이 되었는데도 끝나지 않은 이념 색깔논쟁 등 상생은 커녕 분열로 치닫기만 했다. 이 가운데 사회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고, 농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는가 하면 비정규직 노동자는 더욱 확산되고 있으며, 북녘을 향해 손 흔드는 사람들의 눈에는 나라 안의 도시빈민층은 아예 눈 밖인 것 같다.

세칭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란 사람들의 위선이 어느 해보다 많이 드러났음인지 ‘양두구육(羊頭狗肉 ; 양의 머리를 가게 앞에 달아 놓고 안에서는 개고기를 판다)’과 지도자들의 정제되지 않은 언어 구사 탓인지 ‘설망어검(舌芒於劍 ; 혀는 칼보다 날카롭다)’이라는 말과, ‘추모멱자(吹毛覓疵 ; 살갗의 털을 뒤져서 흠집을 찾아낸다)’는 말도 나오고, ‘노이무공(勞而無功) ; 힘을 써도 공이 없어 헛수고만 하다)’이라는 성어도 제시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분위기로는 상생은 빛이 바랬고 통합은 물 건너 갔는가. 지난 해 초 닭의 해〔乙酉年〕가 시작될 때는 ‘줄탁동시’라 하여 튼튼한 병아리를 출생시키기 위하여 안과 밖에서 서로 힘을 모아 달걀의 껍질을 쪼아 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가졌는데 이마져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새해 병술년(丙戌年)에 또 기대를 해야 하는가. 제발 ‘개판’은 되지 말아야 할 텐데. ‘이전투구(泥田鬪狗)’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아야 할 텐데.

다시 한번 더 기대를 걸어보자. 내년 이맘때의 사자성어는 ‘포동존이(抱同存異 ; 같은 뜻을 지닌 이를 포용하되 다른 뜻을 지닌 이도 인정하여 주다)’나 ‘해원상생(解寃相生) ; 원한을 풀고 더불어 살다)’이 꼽혔다는 뉴스가 나오길.

김형춘 (반야거사회 회장) 글. 월간반야 2006년 1월 제62호

상대방의 입장에서

학문을 통해서는 진리를 추구하고, 종교는 지고(至高)의 선(善)을 통해 성(聖)의 경지를 목표로 하며, 문학을 비롯한 예술은 이름다움〔美〕을 추구하여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해 준다. 문학의 장르에 따라서는 전문적인 글꾼이 쓴 작품이 아닌데도 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받는 글들이 종종 있다. 대개는 그들이 하는 일이 보통사람들과 좀 다르다. 의사로서 삶과 죽음의 경지를 넘나드는 상황을 자주 목도한 사람이거나, 승려나 수녀 등 교역자로서 범인들과 다른 삶의 공간에서 수행하는 경우 등 특별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삶의 체험에서 우러난 이야기를 기록한 게 세인들의 시선을 끈다.

법정(法頂) 스님의 <무소유(無所有)>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지인으로부터 받은 난(蘭) 화분 하나 때문에 얽매어 고민하다 결국 버리고 나서 ‘무소유’의 참뜻을 깨달아 집착을 버리고 본연의 일상으로 돌아가신 체험담을 소박한 필체로 쓰신 글이다. 또 하나, 며칠 전 조계종의 포교지 <직장불교>에서 포교원장 혜총 스님의 글에서 읽은 내용이다. 꽃을 키우는 사람은 마음씨가 나쁜 사람이 없다는 ‘운허’스님의 말씀을 듣고는 90개에 달하는 분재를 키웠는데, 어느 날 자운 스님을 모시고 출타 후 돌아와 보니 꽃이 모두 말라죽었더라고 한다. 그때까지 아무 말씀도 않으셨던 스님께서 ‘네가 꽃을 사랑하느냐?’ ‘꽃도 너를 사랑하느냐?’하시면서 자기 입장에서 뿐 아니라 상대의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라는 꾸중을 들으셨다고 했다. 법정 스님의 ‘난’도, 혜총 스님의 ‘분재’도 자기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리라.

‘배려’는 ‘마음을 쓰고 걱정해준다’는 뜻이다. 순전히 상대를 위한 것이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다. 배려는 받기 전에 주는 것이며 사소하지만 위대한 것이라고 했다. 연 전에 읽은 책 <배려>(한상복 지음)에서 인용한 글에 나오는 이야기다. 앞을 못 보는 사람이 밤에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한 손에는 등불을 들고 길을 가고 있었단다. 그와 마주친 사람이 ‘당신은 정말 어리석군요. 앞을 보지도 못하면서 등불은 왜 들고 다닙니까?’했더니 그 맹인이 말하기를 ‘당신이 나와 부딪히지 않게 하려고요. 이 등불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이런 게 배려의 참 모습이리라.

인류의 영원한 보금자리인 지구촌엔 바람 잘 날 없이 분쟁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지구촌의 화약고 중동을 비롯하여 미얀마, 태국, 티벳, 아프리카 등 곳곳에서 인간의 고귀한 생명을 담보로 한 투쟁이 멈출 줄 모른다. 문제는 이러한 싸움도 종교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인간의 생명과 영혼을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종교가 분쟁의 중심에 서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종교가 남을 배려하지 못한다면 어디서 배려의 참 뜻을 찾을 것인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지혜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구된다. 나와 남의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자. 상대의 민족을, 상대방의 종교를, 상대국의 역사를, 남의 가정을, 상대의 기업을, 나와 마주하는 사람의 처지를, 내가 대하는 사물의 입장이 되어 잠깐이라도 생각해보자.

아파트 베란다에서 십여 년 동안 기르던 키 50센티 정도의 은행나무 분재를 5년 전쯤 제멋대로 살아가라고 텃밭으로 옮겨 주었다. 올 봄에 가서 쳐다보니 족히 4미터는 넘어 보였다. 그간 내가 너에게 죄를 많이 지었구나. 용서해 다오. 자유자재로 제 멋대로 클 수 있는 나무를 내 기분대로 가위로 자르고 철사로 동여매고, 겨우 죽지 않고 살 정도로 거름이나 물을 주면서 연명시켜놓고 아침저녁으로 보면서 좋아라 했던 나를 얼마나 원망했을까. 그래 지금부터라도 너의 입장에서 보아 줄 테니 마음껏 자라거라.

응당 매임과 머무름 없는 청정한 마음을 내어야 하건만, 어떻게 부주색성향미촉법생심(不住色聲香味觸法生心)하여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 而生其心)’할 수 있을까.

김형춘 香岩 (반야거사회회장·창원전문대교수)글. 월간반야 2008년 5월 제9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