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번트 신드롬(savant syndrome)

나의 지인들 중에는 자폐증 자녀를 두고 고민하면서 아무래도 집에 그냥 둘 수 없어 마땅히 아이 맡길만한 곳을 찾아 드러내놓고 말은 못하면서도 전국적으로 수소문을 펴는 이가 있었다. 또 어떤 친구는 이곳저곳에 위탁해 보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아 마지못해 집에 데리고 있는 이도 있었다. 가끔씩 들르는 복지시설의 원장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이곳은 주로 선천성뇌성마비 아이들을 수용하고 치료도 해주면서 재활교육까지 하는 곳이다. 주로 보호자의 부탁으로 양육하고 있으니 가끔 명절 때는 집에 보내기도 한단다. 본인이 집에 가서 가족들과 설이나 추석을 지내고 싶다하면 가족에게 연락하여 집에 데려가서 2,3일 쉬었다가 오는데 한번 다녀온 아이들은 다음 명절에는 절대 집에 가지 않겠다고 한단다. 모처럼 가족 친지들이 모이는 명절에 집에 갔지만 자기는 골방 구석에 감금(?)하다시피 해놓고 음식만 넣어주고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띌까봐 즐거운 명절의 분위기를 깰까봐 두려워(?)하는 가족들의 분위기를 보고 와서 다시는 명절에 집에 가지 않겠다고 한다는 것이다. 이 시대 우리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의식의 한 단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요즈음 지상파 방송 중 KBS의 ‘KBS 스페샬’, SBS의 ‘스타 킹’ , EBS의 ‘다큐프라임’ 등에서 ‘서번트 신드롬(savant syndrome)’ – 서번트 증후군- 이나 이와 유사한 내용의 프로그램이 방영되면서 누리꾼이나 일반인들의 관심이 대단한 것 같다. 자폐증 환자나 교통사고 등 장애를 입은 사람, 맹인이나 청각 장애자 등에서 인간 뇌의 신비로운 능력을 발견한 것이다. 대개 이들에겐 왼쪽 뇌에 문제가 있는데 반해 천재적 능력은 오른쪽 뇌가 담당한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의 자정적 균형감각을 유지하기 위한 본능적 의지 때문에 왼쪽 뇌의 부족 분을 오른쪽 뇌의 능력을 극대화시켜서 평범한 사람은 할 수도 없는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자폐증을 보인 영국의 화가 ’스티븐 윌셔‘의 이야기나, 어릴 때 나무에서 떨어져 뇌 손상을 입은 ’알론조‘이야기, 우리나라의 뇌수종 시각장애 7살 ’지민‘이의 이야기는 우리를 놀라게 한다. 6개월만에 태어난 지민이는 아기 때 뇌수종을 앓았고 시각장애로 악보를 볼 수도 없었지만 1년 남짓 피아노를 배웠는데, 그 후론 어떤 연주든 한번 들으면 그대로 기억해 피아노를 연주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자폐증 환자가 다 서번트 증후군을 가진 것은 아니다.

이 분야 연구의 권위자인 미국 위스콘신대학의 ’대럴드 트레퍼트(Darold Treffert)교수는 자폐증 환자 10명 중 1,2명 꼴로 천재성을 가진 사람이 나타난다고 하니 결코 적은 수는 아니다. 지금껏 우리 사회는 자폐증을 비롯한 장애인 자녀를 둔 것을 부모 스스로가 부끄럽게 생각하여 사회와 격리시켜온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많은 천재적 재능을 가진 사람의 천재성을 사장해 버린 셈이다.

이즈음의 교육 추세는 어떤 분야에서든지 ‘남보다 다른, 남보다 뛰어난, 남이 할 수 없는,…’ 그런 재능을 발견하여 개발해 주는 것이 강조된다. 모든 인간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음악적, 신체 운동적, 논리 수학적, 언어적, 공간적, 대인 관계적, 자기 이해적, 자연 탐구적 지능’을 가지고 있는데 이 8가지 지능이 합해져서 독특한 방식을 가진 한 인간을 형성한다는 ‘하워드 가드너(Haward Gardner)’의 ’다중지능이론‘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조물주가 인간을 만들어 낼 때도 ‘총체적 인간 지능 – 능력’은 비슷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이처럼 천재성을 부여한 것 자체가 고통을 뛰어넘게 하는 신의 선물이 아닐까.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인간 뇌의 신비함만큼이나 인간의 능력 또한 얼마나 잠재되어 있을까. 문제는 남들보다 뛰어난 지능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지능 중에서 다른 지능보다 뛰어난 것을 찾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다.

샹그리라(Shangri-La)를 찾아서

지구상의 어느 곳에 사는 사람들의 정신세계가 가장 맑을까. 가장 순수하고 편안하게 사는 사람들은 대체 어디쯤 살고 있을까.

‘샹그리라’는 영국의 ‘제임스 힐튼’이 쓴 소설〈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에 나오는 가상의 지명이다. 이후 영화로 제작되면서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세계인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소설의 내용인즉 1931년 어느 봄날 인도의 바스쿨이라는 지방에서 식민정부인 영국에 대항하여 일련의 폭동이 일어난다. 갑자기 일어난 폭동을 피하기 위해 현지의 영국 영사를 포함한 네 명의 외국인이 소형 비행기를 타고 가다 티베트와 중국 국경의 쿤륜(Kunlun)산맥 부근에서 연료가 떨어져서 추락한다.

조종사는 사망하고 탑승한 네 사람은 가까스로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 생명을 건지는데 이곳은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고, 외지인의 접근이 철저히 차단되어 있는 곳이었다. 쿤룬산맥의 서쪽 끝자락에 숨겨진 곳, 신비롭고 평화로운 계곡, 높은 설산과 대초원, 강과 협곡, 원시림, 다양한 동식물, 티베트종교 등으로 어우러진 곳이 ‘샹그리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런 낙원이 가까이 있다고 하니 자연히 주변의 티베트나 미얀마 등의 나라에선 샹그리라를 찾아서 혈안이 되었고, 저마다 그럴싸한 곳을 지정하여 ‘샹그리라’를 찾았다고 홍보에 열을 올렸다. 지금 ‘샹그리라’라고 믿고 찾은 이곳은 원래 티베트 땅이었는데 1950년대 중국이 강제 병합하여 1980년대부터 국가차원에서 인적, 물적 자원을 투입하여 티베트, 몽골, 신장위구르자치구 등 서남쪽의 땅이 원래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서남공정”을 치밀하게 진행해온 곳이었다.

이에 중국 정부는 샹그리라가 중국 영토 안에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학자들로 하여금 조사단을 구성하여 소설과 영화에 묘사된 곳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운남성 서북부의 티베트 자치주에 있는 ‘쭝띠엔(中甸)’이 샹그리라와 일치하는 곳이라고 확인하고는 2001년 이곳을 ‘샹그리라’로 공식 선포하고 지명도 쭝띠엔에서 샹그리라로 바꿨다.

원래 ‘쭝띠엔’은 해발 3386m, 티베트 민족인 ‘장족(將族)’이 살아왔고, 고지대라 산소도 한국의 56%에 불과하여 여행자들 중엔 고산증에 시달리는 사람도 많다고 했다. ‘샹그리라’는 티베트 불교 경전에 나오는 ‘샹바라(香巴拉)’가 쭝띠엔의 방언으로 ‘불국정토(佛國淨土)’, ‘피안(彼岸)의 세계’, ‘이상향理想鄕’을 뜻한다고 한다. 또한 샹그리라의 한역표기인 ‘샹그리라(香格里拉)’는 영어로부터 유래한 것이지만 원래는 ‘장족’ 언어에서 ‘샹香’은 ‘마음’, ‘그(格)’는 ‘-의’, ‘리(里)’는 ‘태양’, ‘라(拉)’는 ‘달’로서 ‘마음속의 해와 달’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며, ‘샹그’는 ‘흰 달빛’, ‘리라’는 ‘태양’을 의미하여 쭝띠엔현의 고성(古城) 이름인 ‘일월성(日月城)’을 가리킨다고도 한다.

실제 쭝띠엔은 양쯔강의 물줄기를 형성하는 3개의 지류가 합쳐지는 곳에 있는 강과 협곡, 주변의 금광(金鑛), 풍요로운 들과 삼림, 그리고 신비스런 티베트풍의 사원이 있다. 황홀한 자연과 고색창연한 옛 도시, 세상과 격리된 듯한 지형, 거리에서 만나는 원주민들의 순박하고 천진한 모습에서 마치 시간을 잊고 사는 사람들처럼 느꼈다면 과장된 표현일까. 이곳에 ‘부처님께서 놀다 가신 낙원’이라 불리는 ‘송찬림사(松贊林寺)’라는 티베트 사원이 무척 인상적이다. 샹그리라에 있는 티벳탄 문화의 대표로 5백년 역사를 가졌다고 한다.

달라이라마 5세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그 규모나 모양에서 ‘작은 포탈라궁’이라 불려 진다고 한다. 사원이 위치한 곳의 고도가 3600m이상 되니 외지인들은 숨이 차서 빨리 걸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분위기가 마음의 평온과 신비함이 공존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곳이기도 했다. 어쩌면 도연명의〈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무릉도원(武陵桃源)’과 흡사한 이미지를 주는 곳이 ‘샹그리라’가 아닌가 싶었다.

명예나 이익을 찾는 것을 아침 이슬처럼 생각하고, 괴로움과 부귀영화마저 저녁연기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 그런 이상향인 ‘샹그리라’가 과연 ‘쭝띠엔’이 틀림없을까. 벌써 이곳도 한족(漢族)문화에 희석되고 관광화가 눈에 띄게 나타나지만 순박한 원주민들의 모습과 문화가 어느 정도 남아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

김형춘 창원문성대학 교수, 문학박사, 월간 반야 2012년 2월 135호

생태학(Ecology)이 미래를 연다

지금으로부터 꼭 4년 전 8월. ‘반야시론’에서 필자는 ‘인간을 위한 생태주의’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생태계의 파괴가 ‘자연은 인간 없이도 계속 존재할 수 있지만 인간은 자연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에 미치면 정녕 위기에 처한 것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한 기억이 난다.

오랫동안 일반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생태학이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생물학 가운데 중요한 분야의 하나로 부각되었다. 인구팽창ㆍ식량문제ㆍ환경오염, 그리고 그들과 관련된 사회적ㆍ정치적 문제들이 대부분 생태학적 문제와 연관됨이 분명해졌다.

생태학이란 말은 생물과 그를 에워싼 환경을 다룬 것이다. 생물과 그들의 환경 사이의 상호관계 및 생물 상호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자연의 경제학 또는 생태계 생물학 등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오늘날 생태학은 어떤 특정 지역에서 상호작용하는 생물 및 환경으로 구성되는 기능적 단위인 생태계의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생태계는 영양소가 순환되고 에너지가 흐르는 비 생물요인과 생물요인을 모두 포함한다. 이러한 순환과 흐름을 수행하기 위하여 생태계는 토양ㆍ물ㆍ영양염류 사이에 밀접한 상호관계가 유지되어야 하며, 생산자ㆍ소비자ㆍ분해자를 구성원으로 가져야 한다. 또한 생태계는 먹이연쇄라고 하는 일련의 먹고 먹히는 관계, 이용과 전환의 관계를 통해 에너지의 흐름 및 물질의 순환을 유지함으로써 기능을 발휘한다.

얼마 전 캐나다를 여행했을 때 안내자로부터 들은 이야기 가 생각난다. 록키와 빙하를 보기 위해 원시림인 국립공원을 지났다. 이곳의 숲은 자연적으로 사태가 나서 쓰러지든, 바람이 불어서 부러지든, 수령이 오래되어 말라죽든 간에 일체 인위적으로 치우거나 손대지 않는다고 했다. 왜냐하면 자연 그대로 두고 생태계의 변화를 관찰하고 복원되는 것을 연구하기 위함이라 했다. 영양소가 순환하고 에너지가 흐르며, 먹이연쇄가 일어나고 천이가 이루어짐을 살피는 것이다.

이처럼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학자들이 모이면 그저 환경파괴를 고발하고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며 개발을 성토하는데 급급했던 생태학의 연구가 이즈음 급박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태학과 환경과학이 21세기 학문의 중심에 들어서고 있다. 지금 세계적인 미래학 포럼은 앞으로 20~30년 간 세계시장을 주도할 산업으로 ‘환경산업’과 ‘에너지산업’을 꼽는데 거의 의견일치를 보고 있다. 앞으로 10~15년 내로 IT시장은 그 규모가 크게 줄어들 것이고 대부분의 제조업은 나노과학의 영역으로 재편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특히 지구온난화에 따른 세계기후변화가 적어도 21세기 전반부의 산업과 학문을 주도하리라고 보는 것이다.

지난 6월에 내한하여 수 차례 강연과 대담 등을 가진 세계적인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IT 다음은 생태학 … 복지ㆍ건강이 다가올 시대의 화두”라고 하면서 생태학을 비롯하여 복지와 건강에 관련된 분야는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필요할 뿐 아니라 우리를 먹여 살릴 차세대 주력산업으로서 더없이 중요하다고 했다.

지금 우리사회도 생태학(Eco)이 우리의 미래라는데 이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IT와 BT가 생태학, 건강과학, 사회복지학 등과 융합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대학에도 ‘에코 과학부’가 신설되지 않았는가. 학문하는 사람 뿐 아니다. 기업도 사회도 빨리 변해야 한다. 이러한 생태학의 본격적 연구와 이 연구를 바탕으로 한 차세대산업이 어쩌면 너무나 독선적이고 인간중심적이며 물질주의에 사로잡힌 현실에 쐐기를 박고, 뭇 생명의 존귀함에 대한 바른 가르침을 주신 부처님의 자비를 크게 베풀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김형춘 香岩 (반야거사회 회장·창원전문대교수) 글. 월간반야 2007년 8월 제8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