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과 실패

이즈음 우리는 일찍이 인류역사에서 찾아보지 못했던 치밀하면서도 대담했던 그래서 그 피해가 전쟁에 버금할 정도인 테러참사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테러가 지구촌 자본주주의 상징인 세계무역센터와 초강대국으로 세계의 경찰를 자처하는 미국 군사력의 상징인 펜타곤에 가해졌다는 것만으로도 그 의미는 달리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내노라 하는 지식인들의 해석으로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문명의 충돌’이다. 야만에 의한 문명의 파괴다. 야성에 의한 지성의 파괴다.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의 표출이다. 특정 종교의 극단주의적 소행이다. 사회적 동물의 자살 공격이라는 등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문제는 왜 이들이 이런 어마어마한 일을 저질렀느냐 하는 것이다. 이미 ‘문명의 충돌’로 바람을 일으킨 저자 ‘사무엘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고 독일의 한 시사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어쨌든 이러한 전쟁과 테러들의 인간 살상 행위는 탐진치(貪瞋痴) 삼독의 전형적인 표현인 것만은 틀림없다. 자기든 종족이든 특정 종교를 위함이든 간에 그들의 순수하지 못한 야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고, 대중의 증오와 선동에 휘말린 분노의 표현이자, 무지와 어리석음의 극치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또한 이들이 이런 무지막지한 일을 왜 저질렀느냐 하는 것과, 왜 하필 미국이라는 대형(大兄)의 나라가 공격을 받고 양키의 코가 납작해질 정도로 자존심의 손상을 입었느냐 하는 것이다. 그들 테러리스트들은 자신의 죽음으로 민족을 해방시킬 수 있었는가. 자신들의 종교의 포교에 도움이 되었던가. 자신과 동료들의 죽음 뒤에 다만 더 많은 적과 불특정 다수를 죽였다는 산술적 계산에 만족하는가. 그들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은 것인가. 이제부터 시작될 것으로 예상되는 보복을 통해 자기 동료들의 무참한 희생은 어떻게 계산되어야 하는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미국 또한 그들의 방어망과 자존심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이유에 고심하고 있을 것이다. ‘가진 자의 오만과 횡포’가 낳은 당연한 귀결(?)로 보려는 시각을 그들은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지. 행여나 전세계를 무대로 자국의 이익만을 탐하지는 않았는지. 세계 테러의 진원지인 이슬람을 상대로 몹쓸 짓을 하지는 않았는지. 이슬람인들이 종교나 인종, 민족문제를 고민할 때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을 두둔하지나 않았는지. 여차하면 힘으로 무력으로 약소민족·국가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지나 않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이제 이슬람인들도 ‘이슬람’의 어원대로 평화와 신에 대한 복종, 평화의 추구와 비폭력 절충과 화해를 강조하여 인간의 인간에 대한 끝없는 살의와 증오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고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아울러 전 세계인들도 모든 인류가 더불어 같이 살 세상을 만들기에 고민해야 한다. 모두가 탐진치 삼독을 버리고, 인간에 대한 존엄과 신뢰와 사랑을 갖도록 중생제도에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

김형춘 글 / 월간반야 2001년 9월 (제10호)

선거와 여론조사

인간 행동의 기초가 되는 대부분의 지식은 수치나 통계로 계량화되어 나타내기 어려운 애매한 암묵적 지식이 대부분이다. 통계를 생산해 내기 위해서는 사실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고, 그런 지식은 각계 각층 각처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다.

그런데 이즈음엔 개인과 개인의 대화에서부터 나아가 정부가 국민을 설득시키고 자기들이 기대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사안에 걸맞은 통계수치를 제시하지 않으면 아예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현 정권에서는 통계강국을 내걸고 국가 차원에서 통계인프라를 강화하려고 애쓰고 있다. 이런 강화 노력 못지 않게 반대의 목소리도 만만찮다. 민간통계에 대한 간섭과 통제의 위험성을 제기하며 정부통계는 국가권력자의 귀와 눈이 되어 시장경제를 수정하려 한다는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지방선거 철이 되어 가장 호황을 누리는 업종 중의 하나가 여론조사기관이라고 한다. 물론 한철 장사지만. 이 여론조사 또한 통계에 바탕하여 이루어지는데 긍정적인 면도 있겠지만 아전인수격의 합리를 가장한 불합리의 원흉이라 할 수 있다. 어쩌다 공휴일이나 저녁나절에 집에서 조용히 좀 쉴 때에 걸려오는 여론조사의 전화를 받고 달가와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 여론조사가 긍정적으로 역할을 하여 올바른 지역 일꾼을 뽑는데 기여한다면 굳이 짜증낼 필요도 없이 적극적으로 협조하여야 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얼마전 모 정당에서 지방선거에 출마할 공천대상자를 인물에 대한 평가가 아닌 여론조사로 가리겠다고 했을 때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도 있었다.

엊그제 시골에 다녀오다 어느 마을 앞 선거 유세장을 지나게 되었는데 나와 아무 관계는 없었지만 그냥 그 앞을 차로 지나치기가 미안하기도 하고 호기심도 일어서 멀찍이 차를 세우고 10여분을 기다리면서 한 후보의 유세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기가 당선되면 어떻게 하겠노라고 자기의 주장을 펼치더니 몇장짜리 유인물을 내어들고는 여론조사 결과라면서 자기에게 유리한 통계수치를 발표하고는 상대 후보가 여론조사 결과를 조작했다고 열변을 토했다. 그러면서 그 서류를 확인해보라는 것이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여론조사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누가 막대한 돈을 들여 이 여론조사를 의뢰했는가. 여론조사기관에서는 어떤 의도로, 어떤 설문을 작성하고, 어떻게 대상자의 전화번호를 선정하였고, 어떤 방법으로 결과의 통계처리를 하였으며, 누가 이를 확인했는가. 그럴듯하게 여론조사 결과를 내어놓고는 여론조사 기간, 대상, 결과, 오차범위의 한계를 제시하니 그냥 아무런 비판도 없이 이 문건을 믿어야만 하는가.

정작 중요한 것은 통계수치가 아니다. 진정한 시민 유권자의 여론이 중요하고 개개인의 정치에 대한 암묵적 지식이 중요하다. 아직은 우리 국민의 정치와 선거문화에 대한 자신은 없지만 적어도 통계적 지식이 악용되는 선거는 이제 바뀌어져야 한다. 선거철만 되면 각종 언론사나 연구소에서 앞다투어 여론조사를 실시하여 그 결과를 갖고 유권자를 우롱하고 상대 후보를 공격하는 작태는 이제 사라져야 할 때가 되었다. 어떻게 하면 보다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정책이나 합리적 대안이 제시되고, 이를 바탕으로 일을 할 확실한 인물을 내세우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김형춘 (반야거사회 회장, 창원전문대 교수) 글. 월간반야 2006년 6월 제67호

선거 문화

몇 달간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6.2 지방선거도 거대한 폭풍우가 지나간 듯 고요만 남겼다. 서민들은 다들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정치권은 책임이니 논공행상이니 하면서 전당대회 준비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 선거는 당초엔 여당의 압승으로 싱겁게 끝나리라던 예상을 완전히 뒤집고 갖가지 이변을 속출하면서 야당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선거 결과에 대한 분석도 갖가지였지만 현 정권에 대한 유권자들의 준엄한 심판이라는 의미 외에 새로운 리더들의 출현이라는 주목할만한 현상도 함께 만들어냈다.

지금까지의 우리나라 선거는 후보자 개인의 ‘인물’ 됨됨이를 비교하는 인물론과, 각 정당의 정강 정책인 공약의 대결이 이슈로 떠오르는 게 보통이었다. 거기다 심심찮게 이념 논쟁이 끊이질 않았는데 속되게 표현하면 ‘색깔론’이고, 바르게 표현하면 진보와 보수의 대결이었다. 대개 지구촌의 정치 선진국들도 인물과 정책, 그리고 보수와 혁신 대결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의 우리나라 지방선거는 어떠했을까. 한마디로 인물과 정책, 이념보다는 현 정권에 대한 견제와 균형의 심리가 더 크게 작용한 것 같다. 집권 여당의 국정 운영 미숙과 세종시, 4대강 사업 등에서 보여준 독선적 행태에 대한 따끔한 충고가 아닌가 싶다. 아울러 천안함 사건에 대해 정부와 여당이 보여준 태도가 오히려 역작용, 역풍으로 작용한 것 같다. 우리 국민들은 어떤 의도를 가진 ‘꼼수’ 정치를 먼저 읽고 알아볼 정도로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에 막후 조력자로 나섰던 미국인 ‘데이비드 모리’는 “투표행위의 핵심적인 동인은 두려움이다.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준 다음 대안을 내놓는 것이다. 정치 캠페인의 승리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찾고, 희망을 불어넣는 것이 비결”이라고 「알파독」에서 설파했다. 이번 선거의 마지막 2,3일 동안에 은밀하게 그러면서도 강하게 먹혀 들어간 구호가 있다면 ‘1번 – 전쟁 VS 2번 – 평화’ 였던 것 같다. 천안함 사태에서 보여준 집권 여당의 남북한 대결구도를 통한 ‘전쟁의 두려움’을, 지난 정권 10년 간의 남북화해정책에서 보여준 ‘평화’를 이슈로 내건 것이다. 유럽 재정위기와 천안함 사태가 겹쳐 유럽계가 중심이 된 외국자금은 한국을 빠져나가기 바빴고, 천안함 사태 조사 결과가 발표된 이후 ‘전쟁불사’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증시는 폭락했고 환율은 요동쳤으니 말이다.

여기다 외국발(?) 악성 루머가 인터넷을 타고 들어와 2, 30대들에게 전쟁에 대한 불안심리를 키워주고, 이들의 부모들에게까지 전쟁바이러스는 전파되어 간 것이다. 이에 이기적인(?) 젊은 세대들이 대거 투표장에 나간데다 유권자의 중심 축이라고 할 수 있는 40대 마저도 현 정권을 믿지 못한 것이 결정적인 패인이었다고 분석하는 사람들이 많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선거는 민주사회에서는 잔치 분위기여야 한다. 그러자면 정정당당한 파인플레이여야 한다. 그런데 이번 선거는 ‘묻지마 선거’라든지 ‘돌풍 선거’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정당 공천과 무관한 교육감이나 교육의원 선거까지 이 돌풍 속에 휘말려 ‘인물 됨됨이’나 ‘공약’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비명횡사’한 후보도 많았다고 한다.

이처럼 부정적인 면과 함께 ‘선거 혁명을 통한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을 열었다’고 희망적인 예언을 하기도 한다. 40대와 50대의 젊은 이미지에 걸맞은 정치인들의 대거 등장으로 자연스럽게 차세대 리더군들이 형성되고 새로운 정치문화와 판도를 짜 주길 기대하는 분위기도 있다. 바라건대 진정한 차세대 지도자가 되려면 성장과정이나 교육받은 과정 뿐 아니라 사회생활을 통해서 얼마나 ‘정직하고 성실한’ 삶을 살았는지 반드시 검증을 거쳐야만 할 것이고, 또한 이런 지도자를 만들어내는 선거 역시 ‘이변’이나 ‘돌풍’이 아닌 ‘예측 가능한 민주주의의 잔치’가 되어야 한다.

김형춘 교수님 글. 월간 반야 2010년 7월 11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