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가까이 주말이면 오르내리는 텃밭이 있다. 원래 생긴 모습 그대로 두고 나무나 풀만 뽑아버리고는 이것저것 가져다 심고 가꾼다. 어디다가 무엇을 심겠다는 계획도 없고, 장차 어떻게 자라서 어떤 모습을 할 것이라는 그림도 그려보지 않았다. 4백여 평의 풀밭에 저절로 난 뽕나무도 있었고, 칡과 찔레덩굴에다 산딸기도 있었다. 가시덤불에다 그야말로 쑥밭이었다. 이 가운데 나무나 잡초가 좀 적은 곳을 가려서 이곳저곳 밭을 일구기 시작했다. 땅을 파고 밭을 일구는 것은 주로 내 몫이고, 씨앗을 넣는 것은 노모께서 알아서 하시고, 김을 매는 것은 아내의 몫이다. 10년을 풀과 싸웠건만 번번이 지고 말았다.
지난해부터는 작심을 하고 풀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빈터엔 온통 가시나무와 황금편백 차나무 등 나무를 심고 그 아래엔 풀이 자랄 수 없도록 부직포를 덮었다. 드나드는 통로를 제외하고는 온통 검정 부직포를 깔아서 풀의 기세를 꺾어놓았건만 글쎄 올해는 풀과 우리 가족 중 누가 이길런지.
경사진 밭의 아래쪽엔 흙과 거름기가 흘러내려 자연히 땅이 기름져서 채소나 콩, 토란, 옥수수 등 작물이 비교적 잘 자랐다. 내친김에 아래쪽이라도 평평하게 땅을 고르게 해 보자는데 의견을 모으고 밭 가운데를 가로질러 축대를 쌓기로 하였다. 중장비를 동원하고 석축 쌓는 전문가를 초빙하고 도와줄 인부를 구해 휴일 하루를 몽땅 축대 쌓는 일을 했다. 전에도 석축 쌓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그저 건성으로 보았는데, 이날은 주인이 되어 유심히 보기도 했지만 많은 것을 느꼈다.
돌이 놓여질 자리를 닦는 일이며, 한 트럭 분량의 돌 가운데서 적합한 돌을 고르는 일이며, 돌을 와이어(쇠줄)로 매어 장비로 들어올리기 위해 묶는 일이나, 장비로 운반해 와서 적소에 돌을 놓는 모습이며, 큰돌과 작은 돌이 조화를 이룸과, 석축전문가의 손끝 하나 하나의 움직임에 따라 중장비도 돕는 일꾼도 한치 오차 없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온 밭에 함부로 파헤쳐져 나뒹굴고 있는 돌과 흙이었다. 축대를 쌓아가면서 쓰여지는 돌들은 반듯반듯하고 면이 고르고 각이 지고 예쁜 돌만은 아니었다. 정말 모양도 제 맘대로 생기고 크기도 조그만 돌이 적재적소에 들어가서 큰돌을 받치기도 하고, 돌과 돌 사이를 연결시켜주면서 제 역할을 확실히 해 주는 것을 보았다. 하잘 것 없는 돌 조각이, 하찮은 흙 한줌이 저 석축을 단단히 지탱하여 준다고 생각하니 그들의 존재 가치가 새삼스러웠다.
어릴 적 어른들의 어깨 너머로 쉬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가 되살아났다. 집 앞의 논은 장남을 주고, 뒤뜰의 밭은 둘째에게 주고, 소는 키워 막내 대학 등록금 마련하고, 돼지는 영감 회갑 잔치 때 쓰고, 닭은 사위가 오면 잡고 … 하면서 제각각 몫을 정해 두는 것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다 제 나름대로 쓰임새가 있기 마련이다. 조물주는 이름 없는 풀이나 나무를 만들지 않았고, 쓸모 없는 물건을 만들지 않았다. 이 세상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다 제 나름의 존재가치를 지니고 있고 소중할 뿐이다.
온 산과 들이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화려하게 장엄을 하고 있다. 어디 아름답지 않은 꽃이 있던가. 어여쁘지 않은 새싹이 있던가. 사랑스럽지 않은 새잎이 있던가. 귀엽지 않은 어린애가 있던가. 삼독과 오욕에 물들지 않은 순수함으로 돌아가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자.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돌멩이 하나, 모래 알갱이 하나, 흙 한 줌, 흙 속의 벌레 한 마리… 어느 한 가지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있으랴.
香岩 김형춘 (반야거사회 회장·창원전문대 교수) 글. 월간반야 2009년 5월 제10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