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재민과 북한주민

지난 밤 텔레비전 뉴스에서 이번 여름 수재민을 돕기 위한 국민성금이1,259억원 이라고 자랑스레 소식을 전하는가 하면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고 전했다. 신문도 연일 성금 기탁자 명단과 금액을 보도하고, 방송도 뉴스 끝에는 성금을 낸 사람들을 일일이 알려준다. 이웃이 어려움을 겪을 때에 우리 옛말처럼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여럿이 힘을 합쳐 한 사람을 돕는 격으로 보면 대단히 흐뭇한 일이고, 미풍양속이라고 다른 민족에게 자랑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다른 나라 사람들은 일단은 긍정적으로 찬사를 보내는 듯하면서도(IMF 때의 금모으기 등) 고개를 갸우뚱한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참으로 정치하기 좋은 나라’라는 것이다. 천재지변 등 자연재난을 당하든지, IMF 같은 인재를 당하든지 하면 곧바로 언론을 앞세워 국민정서와 민족감정에 호소하는 것이다. 본래 정이 많은 민족이라 앞뒤 가리지 않고 저금통을 털고, 주머니를 털고, 장롱을 뒤진다. 웬만한 재해나 위기는 국민성금으로 해결되고 위정자나 담당 공무원을 비롯한 관계자들의 실정이나 과실도 따라서 묻혀버리게 마련이다. 적당히 두루뭉실하게 넘어 가고 국민들은 이 사실을 금방 잊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이제 우리도 엄연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 세계 200여 국가 중에서 경제력이나 교역량에서 10위 권에 들어 있고, IT산업을 비롯한 첨단분야에서도 선두권을 유지하는가 하면 국민 교육수준을 보면 다른 나라에 뒤쳐질 이유가 없다. 이런 나라에서 재앙이 나면 추경예산과 국민성금으로 땜질식 처방이나 해서야 되겠는가. 정부와 지방자치 단체에서 해마다 적립하여야 할 재해 기금은 한푼도 없다니 무슨 말인가.

수재와 태풍 후에 재해지역을 취재한 기사를 보면서 얼마나 가슴아파 했는가. 강원도 어느 산골에서는 ‘산불에 당하고 물에 당하고…’, ‘성한 구석 한 곳 없는…’등 처참한 모습 투성이가 아니었는가. 우리 선조들의 가르침대로 통치자가 ‘치산치수(治山治水)’라도 제대로 했더라면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거기다가 한술 더 떠서 지금 우리 이웃은 이렇게 처참하게 당하고 가슴아파 하는데, 정부는 북한동포를 돕고 대북관계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인상을 주니 더욱 한심스럽다는 것이다. ‘수재의연금’으로는 수재민을 돕고, ‘국고’로는 북한주민을 돕는 격이 되어 버렸다. 당장 끼니 때우기도 어려운 수재민을 지척에 두고, 북한 동포를 돕는다고 쌀 30만톤을 북한에 보내는 선적작업이 언론에 보도되고 있으니 분통이 터질 수밖에. 쌀 30만톤이면 얼마나 될까. 10톤짜리 트럭으로 3천대니 경부고속도로에 늘어서면 족히 부산에서 서울까지는 될게다. 그 양이 문제가 아니다. 북에 대한 지원도 중요하다. 거시적인 대북 지원사업이 통일비용을 얼마나 줄여 줄 것인지도 안다. 그러나 우리를 서운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 정책의 우선순위가 되는가 하는 것이다. 현 시점에서 내 나라 내 이웃이 중요한가. 아니면 북한주민이 더 소중한가.

이번 기회에 우리도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얼마나 자국민의 보호와 지역주민의 권익을 위해 정책을 펴고 행정을 하는가를 생각해 볼 일이다. 국민이 제 나라에서 적극적인 보호를 받지 못한다면 지구상에서 어디 가서 하소연하겠는가. 최근 미군에 의해 무참히 희생된 우리 여학생 문제도 예외는 아니다.

말로만 국민을 위하고 국민을 두려워하고, 서민 복지향상에 노력한다고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왜 수재민을 비롯한 우리 국민들이 국가나 자치단체, 관계 기관을 상대로 소송까지 제기하면서 항변하고 있는 지를 알아야 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내 나라를 등지고 이민간 동포들이 다시 되돌아오고 싶은 나라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형춘 글 / 월간반야 2002년 10월 (제23호)

수심결사(修心結社)를 기대하며

한 시대의 역사과정에서 그 사회의 마지막 버팀목을 찾으라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종교와 교육을 꼽는다. 이즈음 우리 사회는 차마 매스컴의 뉴스를 보고 듣기 민망할 정도로 정치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사람들의 비리나 의혹에서부터 교육계와 종교계까지 만신창이다.

아무리 사회가 흔들리고 가치질서가 혼탁하여도 종교계와 스님들의 추한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사원 경내의 골프 연습장이 우리를 놀라게 하고, 해외 원정도박이 우리를 분노케 하며, 작은 암자에서 도둑맞은 수십억원어치의 금품이 우리를 아연실색케 하며, 문화재 보수비를 횡령했다는 뉴스는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

얼마전 모 일간지의 인터넷판에서 서울대학교가 선정한 ꡐ권장도서 100권ꡑ의 목록을 보았다. 그 중 동서양의 사상서 40권 가운데 불교와 관련된 책이 딱 2권뿐이었다. 지눌(知訥) 스님의 『보조법어(普照法語)』와 원시불교 소승의 경전인 『아함경(阿含經)』이었다. 뭐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권의 책 중에 이 시대의 사회상이나 불교계의 모습을 보면 관심을 끄는 것은 단연코 『보조법어』이며 저자인 지눌스님이다.

목우자(牧牛子) 지눌스님의 시호는 불일보조(佛日普照)로 어릴 때 출가하여 25세에 승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출세를 단념하고 평양 보제사의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여하고 창평 청원사(淸源寺)에서 육조의 『단경(壇經)』을 읽고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그 뒤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에서 『대장경』을 열독하고 선교통합(禪敎統合)의 필요성을 깨우치고는 공산(公山)의 거조사(居祖寺)에 머물면서 정혜사(定慧寺)를 조직하고 ‘근수정혜결사문(勤修定慧結社文)’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불교쇄신운동을 벌였다고 한다.

중생을 떠나서는 부처가 존재할 수 없다고 하면서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하고 ‘선(禪)으로서 체(體)를 삼고, 교(敎)로써 용(用)을 삼아’ 선교(禪敎)의 합일점을 추구했다. 용은 체를 바탕으로 해서 있게 되므로 혜(慧)가 정(定)을 떠나지 않고, 체(體)는 용(用)을 가져오게 하므로 정(定)은 혜(慧)를 떠나지 않는다고 『보조법어』에서 밝히고 있다.

스님의 이 정혜결사(定慧結社)는 당시 극히 세속화ㆍ미신화 된 ‘호국기복불교ㆍ우상불교’에서 현실적으로 안심입명(安心立命)하고 구세제중(救世濟衆)하는 정법불교의 복귀운동이며, 명리의 도구화된 ‘형식불교ㆍ가면불교’에서 진실한 출세간의 길을 밟아 성불도생(成佛度生)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수행불교’의 재건운동이며, 퇴폐하고 변질되어버린 ‘궁중불교ㆍ관권불교’에서 참신하고 생명있는 ‘민간불교ㆍ대중불교’의 건설에 참 의미를 두고 있었다.

보조국사께서는 이러한 역사적 사명에서 구시대적 불교의 방향을 전환하려는 한편 참다운 ‘수행불교ㆍ정법불교ㆍ민간불교’를 실현하기 위해 ‘근수정혜결사(勤修定慧結社)’를 주도하신 것이었다. ‘정혜결사’는 한 마디로 한국불교의 새로워지려는 몸짓이었으며, 무엇보다 모든 사람들이 마음 닦는 불교를 정립하고자 한 것이었다.

왜 하필 이 시기에 보조법문이 눈에 띄었을까. 부처님의 바른 법을 바로 세우는 ‘정법결사, 수심결사’를 다시 생각해 볼 때가 아닐까.

김형춘 (반야거사회 회장) 글. 월간반야 2005년 6월 제55호

수령(守令)의 칠사(七事)

세월이란 기다리는 자에겐 한없이 더디고 무심한 사람에겐 참으로 빠른 것 같다. 벌써 세간엔 1년 앞으로 다가온 지방선거에 관한 이야기가 언론을 필두로 서서히 열기를 더해간다.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지난 선거 때 제시한 공약을 점검하는 매니패스트 활동을 소개하여 그간의 업적을 평가하는가 하면 자천타천의 인물들이 거명되기도 한다. 언제부터인지 한국인들의 정치에 관한 관심은 부와 명예와 권력을 얻는 첩경으로 인식되어 너도나도 정치에 꿈을 꾸는 것 같다. 위로는 북악 밑의 푸른집에서부터 여의도 주변을 맴도는 사람이 줄잡아 수만 명은 족히 될 테고, 지방에서도 내년 6월 초엔 광역시ㆍ도지사, 광역의원, 교육감, 교육위원, 시장, 시의원, 군수, 군의원의 8가지 선거가 동시에 이루어지니 이들 자리에 목을 매는 사람 또한 얼마나 많겠는가.

다들 나름대로 자질을 갖추고 일전불사의 준비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들이 원하는 자리에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제대로 알고 덤비기나 하는지 걱정이다. 눈앞의 부(富)와 권력과 명예에만 눈이 어두워 정작 목민관의 사명이나 정치의 요체를 알고나 있는지 말이다.

조선시대 지방 수령(守令 ; 관찰사, 목사, 부사, 군수)은 임지로 떠날 때 임금 앞에서 교지를 받고 지방행정의 요체인 ‘수령 칠사(守令 七事)’를 외었다고 한다. 그 첫째가 농잠의 흥성이요〔農桑盛〕, 둘째가 호구의 증가요〔戶口增〕, 셋째가 학교의 발달이며〔學校興〕, 넷째가 군정의 정돈이요〔軍政修〕, 다섯째가 부역의 균등이고〔賦役均〕, 여섯째가 송사의 간략함이며〔詞訟簡〕, 마지막이 간활의 멈춤〔奸猾息〕이라고 하였다

현대사회라고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다. 누가 뭐래도 지역경제를 살리는 것이 으뜸이요, 인구가 늘어나야 한다. 산업이 발달하고 생활환경이 좋아지면 자연히 인구가 유입될 것이기 때문이다. 거짓으로 위장전입을 하여 인구를 늘리고 지방교부금을 많이 받아내려 노력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물론 교육여건도 좋아야 한다. 좋은 학군의 집 값이 올라가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다산(茶山) 정약용이 쓴 「목민심서」의 72개조를 굳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정치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더 나아가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재산과 생명을 내놓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작금의 지방자치단체들은 하나같이 경제를 살린답시고 이벤트성 행사에 열을 올리고 있다. 모두를 싸잡아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슨 ‘엑스포’ , ‘국제 ооо’. ‘оо축제’, ‘세계 оо대회’ 등 고을마다 행사에 목민관들은 목을 맨다. 유권자가 모이는 곳에는 목민관과 정치지망생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행사들이 그 지역 공무원들이나 관변단체 등 그 분야에 전문적 지식이나 기술을 가진 사람들에 의한 기획과 집행이 아니라는데 실패의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럴듯하게 계획서를 만들고 용역비를 들여 성공 가능성을 제시하고는 국비나 도비, 지방비 – 사실은 국민의 혈세 -를 끌어들여 잔치를 하고 몇몇 인사들이 생색을 내는 것으로 행사는 끝이 난다. 제대로 된 평가회를 거쳐 진정 지역경제를 위하고 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기여하였는지는 뒷전이다.

일찍이 부처님께서는 「우바새경」에서 “지혜로운 사람이 모든 것을 보시하는 것은 즐거움을 받기 위함도 착한 명성의 유포를 위함도 아니며, 삼악도의 괴로움을 두려워함도 아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보시는 연민(憐愍) 때문이며, 남을 안락(安樂)하게 해 주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설하셨다. 모름지기 정치를 하고 목민관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참된 ‘보시’의 공덕을 쌓는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김형춘 교수님 글. 월간 반야 2009년 8월 10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