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잔고

내 인생의 시간 잔고(殘高)는 얼마나 될까. 나는 앞으로 이승에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모르긴 해도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시간의 잔고는 아무도 모른다. 시간은 오는 것이 아니라 가는 것. 요즈음 장년층이나 노년층에서 즐겨 부르는 유행가에 ‘고장난 벽시계’(?)를 들은 적이 있다. 벽시계는 고장이 나서 멈추기도 하는데 이놈의 세월은 고장도 나지 않는다고.

중생은 자기에게 주어진 나머지 시간은 모르면서 통장의 예금 잔고는 부지런히 챙기고, 투자한 주식의 가치를 시시각각으로 확인하고, 자기 소유의 부동산 가격이 얼마나 올랐는지 확인하는 재미로 산다. 쌩 떽쥐베리가 어린왕자의 입을 빌어 현대인들은 ‘꽃향기를 맡아본 적도 없고, 밤하늘의 별을 쳐다본 적도 없으며, 누구를 사랑해 본 적도 없이 단지 더하기(?) 밖에 할 줄 모른다’고 통렬히 꼬집은 의미가 이해될 듯도 하다. 삶의 어떤 의미보다도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고 이를 통해 쾌락을 맛보면서 사는 게 중생이라고 말이다.

얼마 전 ‘반야불교학당’에선 10개월에 만에 ‘지안(志安)’ 큰스님의 ‘원각경(圓覺經)’를 마치고 책거리가 있었다. 천성이 게으르고 아둔한데다가 졸음마저 겹쳐서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니 머릿속에 남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 스님께 부끄러운 마음뿐이었다. 그동안 무얼 배웠느냐고 묻는 아내의 질문에 답도 못하고 다시 첫 시간에 읽은 ‘원각경 해제’를 읽으면서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단무명 현불성(斷無明顯佛性)”이라 하여 ‘무명의 정체를 밝히면서 무명을 끊는 방법을 설해놓은 경’이라고 하였다. 우리의 자성 가운데 미진수와 같은 청정공덕을 본래 갖추고 있는 바, 모두 청정한 원각을 원만히 비춤에 의해 무명을 영원히 끊고 불도를 이룬다고 하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중생의 삶은 모두 ‘환(幻)’이요, 무명(無明)은 ‘공화(空花)’를 보는 것과 같으니 허망하게 생사윤회(生死輪廻)를 거듭한다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어리석은 사람이 낯선 곳에 가서 동서남북의 방향을 모르는 것과 같으니, 사대(四大)를 잘못 알아 자기의 몸이라 하고, 육진(六塵)의 그림자를 잘못 알아 자기의 마음이라 하는 것과 같다 하였다.

‘신영복’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나오는 이야기다. 오늘날처럼 문화와 교통이 발달하기 이전에 첩첩산중(疊疊山中)의 산골 마을에서 평생을 살아온 노인에게 ‘해가 어디서 떠서 어디로 지느냐’고 물으면 그는 당연히 ‘해는 산에서 떠서 산으로 진다’고 할 것이다. 또한 태평양 같은 큰 바다 가운데 있는 절해고도(絶海孤島)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하면 그는 ‘해는 바다에서 떠서 바다로 진다’고 할 것이다. 만주 벌판이나 미국 서부의 대평원(大平原) 한가운데서 평생을 살아온 농부에게 ‘해가 어디서 떠서 어디로 지느냐’고 물으면 그 역시 ‘해는 지평선에서 떠서 지평선으로 진다’고 할 것이다.

세 사람 다 자기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事實)’이다. 그러나 이들의 답은 ‘진리(眞理)’는 아니다. 이들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은 모두 ‘환幻’이요, 이들의 삶은 ‘무명(無明)’ 그대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시간의 잔고는 여유가 없다. 무명의 정체를 밝히고 무명을 끊는 노력이 시급하다. 깨어있는 삶을 찾아 깨어있는 시간을 갖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우리가 수행하지 않으면 생사 속에서 항상 환화(幻化)에 묻혀 살 것이니 이 허환(虛幻)을 벗어날 길을 찾아야 한다.

생의 나머지 시간을 ‘환幻’에서 깨어나는데 써보자. ‘무명(無明)’을 끊는데 전력투구하자.

김형춘 창원문성대학 교수, 문학박사, 월간 반야 2011년 7월 128호

스님은 중생의 정화조

이 여름을 더욱 뜨겁게 달구는 화두는 단연코 월드컵이요 축구다. 이 2002년 한국 일본 월드컵의 개막전이 벌어질 서울의 ‘상암구장’이 서울뿐만 아니라 한국의 대표적인 쓰레기 매립장인 ‘난지도’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이 상암구장이 있는 월드컵 공원에 육칠십 년대 근20년 간 우리나라를 통치해 온 고 박정희 대통령의 기념관이 들어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기념관의 건립 여부, 기념관의 건립 장소, 국고 지원 여부 등 숱한 논쟁이 아직도 마무리되지 않았고, 재임시 업적의 공과를 두고도 계속하여 시비는 일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절대 권력을 앞세워 국가적 공공사업이나 공익을 위해서 도로를 닦고, 공장을 건설하고, 댐을 막고, 항만을 건설하는 등의 과정에서 누구도 감히 나서서 반대의 목소리를 내질 못했는데, 80년대 이후 민주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부터는 각종 사업장마다 각계각층에서 다양한 저항의 목소리와 행동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경제 성장에 따른 삶의 질의 향상과 국민의 의식의 변화에다 각계각층의 집단이기주의가 이에 편승하여 나타나는데 그 중의 하나가 혐오시설에 대한 ‘님비현상’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지방자치단체의 가장 큰 고민으로 대두되고 있는 문제의 하나다. 하수 처리장ㆍ분뇨처리장ㆍ쓰레기 매립장ㆍ소각장ㆍ장례식장ㆍ화장장ㆍ병원 영안실은 물론 심지어 장애인 복지시설마저도 자기 동네 이웃은 절대로 안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런 시설은 어디로 가야 할까. 이런 시설은 없어도 되는 것일까.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시설의 원인제공자는 사람이고 그 지역에 깃들여 살아가는 주민들이다. 생활하수나 공장하수도 그렇고, 각종 쓰레기는 물론, 분뇨나 사람의 시신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주변 가까운 일가친지 가운데 선천적인 또는 후천적인 장애인이 없는 사람이 있는가, 아니 앞으로 자기 자신도 장애인이 안 된다는 보장을 받은 사람이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이 시설을 거부할 수 있는 명분이 무엇인가.

생각을 조금만 바꾸어 보자. 우리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이러한 시설이 따지고 보면 반대로 우리의 환경을 깨끗하게 하는 정화시설이 아닌가. 오폐수나 분뇨를 깨끗이 정화하여 강이나 바다로 흘려보내고, 쓰레기를 땅 속에 묻어 세월이 흐르면 흙으로 변하게 하고, 가연성의 쓰레기는 태워 없애고, 사람의 시신도 깨끗이 소독하여 냉동 보관하였다가 화장하는 것보다 더 위생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이 있을까. 혐오(嫌惡)시설이 아니라 정화(淨化)시설인 셈이다. 겉보기가 중요하다면 난지도 쓰레기 더미 위의 상암축구경기장을 본받아 아름답고 깨끗하게 조성하면 되지 않겠는가. 문제는 좀더 완벽하게 정화될 수 있도록 모두가 지혜를 모으고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더 많은 투자에 인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얼마전 초파일 법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들었던 어느 보살님의 말씀이 새삼 떠오른다. 세속의 오욕에 물든 중생들이 산사를 찾아 스님께서 손수 가꾸어 놓으신 도량의 향기를 맡고, 부처님의 미소를 접하면서 스님의 법문을 듣노라면 어느새 세간사는 말끔히 잊어버리게 된단다. 세파에 찌든 중생의 정신세계를 깨끗이 정화해 주시는 스님이야말로 중생의 정화조라고.

김형춘 글 / 월간반야 2002년 6월 (제19호)

순리와 상식

옛 성현의 말씀에 ‘하늘의 뜻을 따르는 자는 살아남을 것이요,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자는 망하리라(順天者存 逆天者亡)’고 하였다. 이게 어찌 꼭 하늘의 뜻이라고만 하겠는가. 사물의 이치에 순응하라는 삶의 지혜를 강조한 말씀이리라.

이처럼 ‘이치에 순응하는 것’을 우리는 ‘순리(順理)’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순리대로 살아야 한다거나 순리대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순리대로 사는 것일까. 먼저 사람으로서의 ‘도리(道理)’를 다하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윤리와 도덕에 충실한 삶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매한 인격과 심오한 학식에 바탕을 둔 삶이 아니다. 한 인간으로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상식에 입각한 삶을 요구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천리(天理)’를 따르는 것이 이치에 순응하는 것이라고 본다. ‘천리’란 하늘의 이치이기도 하지만 자연계의 이치라고 하겠다. 우리가 인지하는 자연계의 모든 현상에는 원리나 법칙을 벗어난 것이 단 한가지도 없다. 바람이 불고, 구름이 떠가고, 눈보라가 치고, 나뭇잎이 떨어지고, 꽃이 피고, 열매가 익어가는 등 그 어느 하나도 자연계의 법칙을 벗어난 것은 없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보라. 쏟아지는 폭우를 막아 보라. 자연의 이치를 거역하며 산다는 것이 진실로 가능한지를.

끝으로, 신의 ‘섭리(攝理)’를 따르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발견하는 것 중에 중요한 하나가 인간능력의 한계를 깨닫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영원과 한계상황에 부딪쳤을 때에 능력의 한계를 깨닫고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종교에 귀의하는 경우 또한 많다. 신의 섭리란 신이 이 세계를 지배·소유하면서 인간 구제의 목적으로 영원한 계획에 의하여 인도하는 질서를 말함이니, 영원의 차원에서 이 질서를 거역할 수 있는 명분 또한 찾기 어렵다.

그러나 도리(道理)도, 천리(天理)도, 섭리(攝理)도 가장 인간적인 바탕 위에서 상식의 한계에서 따를 수 있으리라.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1년 1월 (제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