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상승의 욕망

세계 어느 민족의 역사에서나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수의 이야기나, 난세에 천민 출신으로 공을 세워 귀족의 반열에 오른 인물의 일대기가 주류를 이룬다. 우리 역사에서도 안시성의 양만춘이나 을지문덕 장군이 그러했고 김유신이나 강감찬 장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그러했고 고려조의 무신 이의민이나 동의보감을 쓴 명의 허준 등이 그러했다.

인간의 욕망 중에서 가장 흔하고 보편적인 명예나 권세, 부를 얻는 것은 모두가 자기 개인이나 가문의 신분상승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사회계층 속의 신분상승은 안정된 사회에서나 선진 사회에서는 급작스레 이루어지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어지러운 난세나 후진 사회에서는 신분의 급상승이 가능한 것이다.

요즈음이라고 별로 다를 게 있을까. 옛날처럼 반상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옛날의 과거에 준하는 사법·행정·외무 고시를 통해 고급관리가 되면 세칭 출세를 하는 것이고, 대통령은 물론 국회의원이나 광역 단체장 등 선출직 공무원들이 당선만 되면 신분 상승이 되어 어깨에 ‘기부스’를 하게 된다. 또 사업을 하여 재산을 모으면 금력으로 권력을 사서 마구 휘두르는 것으로 신분이 상승되었음을 과시한다. 그런가 하면 금력을 바탕으로 고급 관리 또는 선출직 정치인들과 혼인을 맺어 신분 상승을 꾀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체육계나 연예계 등에서 인기가 오르면 부와 명예를 함께 누리게 되어 신종 상류층이 형성 되고 있다. 여기에서 연예계 비리가 싹트고, 국가대표 선수 선발에 의혹이 불거지고 히딩크 감독이 그 반사 이익을 본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의 신분을 급상승시키고자 하는 욕망에서부터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게다. 고시에 합격하고 의사가 되기 위해 일류 대학의 좋은 학과에 진학하기 위해 과열 입시지옥이 생겼고, 이로 인해 고등학교·중학교·초등학교 교육이 줄줄이 파행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국회의원 등 선출직 공무원은 몇 번을 떨어져 빚더미에 올라 앉았다가도 한번 당선만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되어 부와 권세와 명예를 누리게 되는 현실이니, 정치병에 걸린 사람들만 탓할 수 있는가. 자본주의 사회가 급기야는 황금만능에 이어 배금주의에 까지 이르렀으니 누가 기업윤리에 연연하며, 정경유착을 나무라고, 경제사범들의 뻔뻔스러움을 나무라겠는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만 벌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현실이 아닌가. 거기다가 나라에서 앞장서서 사행심을 부추기는 경마·경륜·복권 등을 조장하니, 일확천금을 꿈꾸는 무지한 백성들만 중독증세가 더해 가고 있다. 그러나 ‘한번만, 딱 한번만’ 내게 행운이 따라 준다면 모든 것이 해결되고 내 신분은 일약 상승되니까.

세속적인 우리의 모든 노력이 크게는 정치나 경제·문화·교육에 이르기까지 개인이나 가문의 신분 상승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까, 사회의 제반 문제가 해결되기는 커녕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제는 좀 차원을 달리 하여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히기보다는 정신적인 영원한 행복을 찾고 맛봄이 어떨까.

김형춘 글 / 월간반야 2002년 8월 (제21호)

신도교육

최근 들어 조계종 종단에서는 신도 교육에 부쩍 열을 올리고 있다. ‘신도 기본교육 교재 고불 및 신도교육 캠페인 선포식’도 있었다고 한다.

신도는 마땅히 신도로서의 자질을 갖추어 나가고 위계를 정해 사회에 이바지하며, 종단에 헌신하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신도상을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영원한 진리인 부처님의 말씀을 배우고 전법·홍포하는 교육의 길로 매진할 것을 선포한 것이다.

솔직히 그동안 기복신앙에 치우쳤던 신행 형태를 극복하고 교육을 통한 신도의 조직화를 꾀하는 일은 늦은 감이 있지만 다행스런 일이다. 이번의 신도교육 캠페인 선포를 계기로 종단 차원에서는 초심자들은 물론 신자들의 근기와 수행단계에 맞추어 신도교육 프로그램을 연구하여 정형화 하고 교재를 제공하는가 하면, 대대적으로 캠페인을 벌이고 신도교육을 독려하여 종단에서 인정하는 기관에서 기본교육을 이수하고, 이 과정을 이수한 불자를 조직화 하는 작업도 뒤따라야 한다.

최근에 와서 전국 직장·직능 별로 신행단체들이 조직화 되고, 이를 중심으로 신행과 포교가 점차 활기를 띄는 것도 반가운 일이다. 수년째 신행단체 일을 맡아오면서 한결같은 고민은 회원들의 ‘모래알 불심’을 어떻게 결집시키는가 하는 문제였다. 우리는 본래 ‘오는 사람 반기지도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는 것을 불문(佛門)의 불문율(不問律)처럼 여겨 왔다. 숱한 사람들이 와서는 이름하여 도반으로 같이 수행하여 관계를 맺었다가는 어느때 부터인가 보이지 않으면 그만이다.

누구도 일일이 챙겨서 다시 불러주지도, 동참하도록 권하지도 않는다. 그러다 또 때가 되고 인연이 닿으면 다시 나타났다가 멀어지곤 한다. 다른 종교와 세속적인 여느 모임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우리네 불교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여진다.

새로이 맞는 21세기는 종교로 인한 문명의 충돌을 우려하는 사람이 많다. 실제로 금세기 초부터 불안한 조짐이 보이기도 한다. 이럴수록 소극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기보다는 중생의 제도와 구원에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가질때가 된 것 같다.

1천 7백년 역사의 한국불교는 민족정신사의 주축을 이루어 왔고, 찬란한 전통문화를 꽃피워 왔다. 이제 근대화 과정의 혼란기를 거쳤으니 우리 불교도 당당한 위상을 견지하면서 붕괴된 우리의 정신문화를 다시 수습하고 부처님의 바른 법을 보다 분명히 펼쳐야 할 것이다.

김형춘 글 / 월간반야 2001년 12월 (제13호)

시장님이 누군지 모른다()

일전에 한 시민단체에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활동지표를 개발하기 위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청소년들의 지역사회 관심도를 알아보기 위해 현재 살고 있는 시의 시장 이름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에 80% 정도가 모르거나 관심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러한 설문조사 결과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게 나올 수 있겠지만 내 생각은 그래도 긍정적이다.

시장이 누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 어른들이 누구를 우리지역사회를 이끌어 갈 일꾼으로 누구를 뽑았느냐도 이들에겐 중요하지 않다. 단지 누가 청소년들이 미래 이 사회의 주역으로 자라는데 필요한 호연지기와 풍성한 정서와 건강한 신체를 가꾸는데 적합한 주변 환경과 여건을 만들어주느냐가 그들의 주된 관심의 대상이어야 한다.

우리보다 몇 세기 앞서 민주주의를 탄생시킨 영국 같은 나라에서도 청소년뿐 아니라 성인들의 상당수가 자기 나라의 수상 이름을 모른다고 한다. 실제 수상 이름을 아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정치 지향형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국무총리나 부총리, 장관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들은 예전처럼 많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서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아직도 우리사회에서는 정치의 영향력이 크긴 하지만 점차 줄어가고 있는 징조라고 볼 수 있다.

흔히 우리가 중국의 태평성대를 말할 때 예를 드는 요(堯) 임금이 천자의 자리를 이양하기 위해 백성들의 삶의 현장을 암행하다가 한 농부에게 요즈음 왕이 정치를 잘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 농부가 답하기를 “왕이 정치를 어떻게 하는지 알 필요도 없고, 우리 같은 농부는 농사만 잘 지으면 된다”는 답을 듣고는 안심하고 양위를 결심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을 보면 정치를 잘 할 경우엔 백성들이 그 통치자나 목민관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치지도자나 목민관이 자기의 재임 중 공적을 나타내기 위해, 또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무리한 시책을 펴거나 자극적인 방법으로 요란하게 행정을 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있는 듯 없는 듯 하면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덜어 주고 순리대로 이끌어 가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즈음의 우리 사회는 얼마나 규제가 심하길래 그 규제를 막기 위한 기구까지 만들어야 하니 이 또한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바야흐로 대통령을 뽑기 위한 정치의 계절이 다가온다. 요(堯) 임금이 아들 주(朱)를 단연(丹淵)의 제후로 봉해 놓고는, 효자 순(舜)에게 천하를 넘겨 준 것처럼 큰덕〔峻德〕을 가진 요 임금이나 도심(道心)을 가졌던 순 임금 같은 지도자가 어디 없을까.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2년 11월 (제2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