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의 역사과정에서 그 사회의 마지막 버팀목을 찾으라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종교와 교육을 꼽는다. 이즈음 우리 사회는 차마 매스컴의 뉴스를 보고 듣기 민망할 정도로 정치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사람들의 비리나 의혹에서부터 교육계와 종교계까지 만신창이다.
아무리 사회가 흔들리고 가치질서가 혼탁하여도 종교계와 스님들의 추한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사원 경내의 골프 연습장이 우리를 놀라게 하고, 해외 원정도박이 우리를 분노케 하며, 작은 암자에서 도둑맞은 수십억원어치의 금품이 우리를 아연실색케 하며, 문화재 보수비를 횡령했다는 뉴스는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
얼마전 모 일간지의 인터넷판에서 서울대학교가 선정한 ꡐ권장도서 100권ꡑ의 목록을 보았다. 그 중 동서양의 사상서 40권 가운데 불교와 관련된 책이 딱 2권뿐이었다. 지눌(知訥) 스님의 『보조법어(普照法語)』와 원시불교 소승의 경전인 『아함경(阿含經)』이었다. 뭐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권의 책 중에 이 시대의 사회상이나 불교계의 모습을 보면 관심을 끄는 것은 단연코 『보조법어』이며 저자인 지눌스님이다.
목우자(牧牛子) 지눌스님의 시호는 불일보조(佛日普照)로 어릴 때 출가하여 25세에 승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출세를 단념하고 평양 보제사의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여하고 창평 청원사(淸源寺)에서 육조의 『단경(壇經)』을 읽고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그 뒤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에서 『대장경』을 열독하고 선교통합(禪敎統合)의 필요성을 깨우치고는 공산(公山)의 거조사(居祖寺)에 머물면서 정혜사(定慧寺)를 조직하고 ‘근수정혜결사문(勤修定慧結社文)’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불교쇄신운동을 벌였다고 한다.
중생을 떠나서는 부처가 존재할 수 없다고 하면서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하고 ‘선(禪)으로서 체(體)를 삼고, 교(敎)로써 용(用)을 삼아’ 선교(禪敎)의 합일점을 추구했다. 용은 체를 바탕으로 해서 있게 되므로 혜(慧)가 정(定)을 떠나지 않고, 체(體)는 용(用)을 가져오게 하므로 정(定)은 혜(慧)를 떠나지 않는다고 『보조법어』에서 밝히고 있다.
스님의 이 정혜결사(定慧結社)는 당시 극히 세속화ㆍ미신화 된 ‘호국기복불교ㆍ우상불교’에서 현실적으로 안심입명(安心立命)하고 구세제중(救世濟衆)하는 정법불교의 복귀운동이며, 명리의 도구화된 ‘형식불교ㆍ가면불교’에서 진실한 출세간의 길을 밟아 성불도생(成佛度生)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수행불교’의 재건운동이며, 퇴폐하고 변질되어버린 ‘궁중불교ㆍ관권불교’에서 참신하고 생명있는 ‘민간불교ㆍ대중불교’의 건설에 참 의미를 두고 있었다.
보조국사께서는 이러한 역사적 사명에서 구시대적 불교의 방향을 전환하려는 한편 참다운 ‘수행불교ㆍ정법불교ㆍ민간불교’를 실현하기 위해 ‘근수정혜결사(勤修定慧結社)’를 주도하신 것이었다. ‘정혜결사’는 한 마디로 한국불교의 새로워지려는 몸짓이었으며, 무엇보다 모든 사람들이 마음 닦는 불교를 정립하고자 한 것이었다.
왜 하필 이 시기에 보조법문이 눈에 띄었을까. 부처님의 바른 법을 바로 세우는 ‘정법결사, 수심결사’를 다시 생각해 볼 때가 아닐까.
김형춘 (반야거사회 회장) 글. 월간반야 2005년 6월 제5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