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자만이 인도를 꿈꿀 수 있다』는 작가 임헌갑님의 이야기나, 『인도불적답사기(印度 佛跡踏査記)』에서 윤호진스님의 말씀과, 문수화 보살님의 『천축일기(天竺日記)』, 수미산 여행사의 『인도성지순례』등의 자료를 떠나기 전에 읽어보고, 가면서 읽어보고, 돌아와서 또 읽어보았지만 확실한 정답은 인도를 떠나오기 사흘 전 이역 만리 네팔의 룸비니 대성 석가사에서 정말 운 좋게도 호진 큰스님을 친견하고는 떼를 써서 듣게된 법문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한 달 동안 인도를 여행하면 소설을 쓰고, 1년을 다녀오면 겨우 수필 한 편을 쓰고, 인도에 머물러 살면 아무런 글도 쓰지 못한다고 하셨다. 정말 인도란 그런 곳인가. 보고 듣고 알면 알아갈수록 이해하기 힘든 나라 인도, 그렇다고 현실 속에서 보고 듣고 부딪치고도 느낌이 없다면 그게 어디 사람인가. 긴 글을 쓰면 소설이 되고 거짓말이 될 테니 ‘반야시론’ 난을 통해 4대 성지 중 부처님의 성도지를 둘러본 느낌을 이번 달에, 그리고 차창에 비친 인도 사회를 다음 달에 정말 간략하게 몇 자 써 볼 생각이다.
보팔에서 산치대탑을 보고 야간열차로 무려 16시간(2시간 연발에다 밤새 쉬엄쉬엄 갔으니)이나 수양(?)을 하고는 고도 바라나시에 도착하여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을 보고는 버스로 녹야원을 거쳐 성도지 보드가야로 향했다. 바라나시에서 보드가야로 가는 길은 최근 급성장하는 BRICs(브라질ㆍ러시아ㆍ인도ㆍ중국 등)의 중심국가 인도를 실감케 했다. 온 도로를 꽉 메운 트럭들의 행렬, 단 몇 분이라도 빨리 달리려는 차량들의 경적, 지금도 눈만 감으면 인도 차량들의 경적과 유적지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면 몰려드는 구걸행각 떼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는다.
우즈벨라 마을 근처의 보리수나무 아래서 선정에 들어 7일만에 정각을 이루신 곳, 보드가야 대탑과 보리수, 무칠란다 연못을 차마 떠날 수 없어 석양에 물든 마하보디대탑(Maha Bodhi Temple)을 우러르며 부처님의 체취를 느끼고는 숙소로 돌아왔으나 차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 서둘러 대탑을 다시 찾아 예불을 올리고 3시간 정도 자유시간을 허락 받아 금강보좌 옆 보리수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108배를 하곤 좌선에 들어 2천 5백여 년 전 부처님의 흉내를 내며 두어 시간을 지냈다. 지금은 그믐이 가까워 달도 없지만 카월(인도력 2월) 보름날 저녁 깊은 선정에 잠기면서 초저녁에 천안통이 열려 세상의 모든 중생들이 업의 과보에 따라 고통ㆍ변화하는 모습을 보고, 한밤중에 숙명통을 얻어 4성제를 깨닫고 8정도를 추구해 들어간다. 그리고는 인간의 괴로움의 근본인 무명을 간파하고 12인연을 거쳐 고통이 생겨남을 밝힌다. 다음날 새벽 동쪽 하늘에 샛별이 떠오르고 있을 때 홀연히 깨달음을 얻고 더 없는 정각을 이룬다. 대리석 바닥에 앉아 이런 부처님의 깨달으신 과정을 생각하며 금강보좌를 보고 있노라니 더없이 숙연해지고 눈물이 고인다. 갑자기 무릎 앞에 떨어진 보리수 잎을 주우며 시계를 보고는 일어서서 전탑을 쓰다듬으며 한 바퀴를 돌면서 “부처님, 부처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하고 중얼거리며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발자국과 텅 빈 보좌만 무명의 중생을 달래주는 것 같았다.
지금껏 몇 차례 시도하다 떠난 발걸음이지만 호진 스님의 말씀대로 ‘첫 번째’ 순례가 가장 인상적이라고 하니까 내 이 감흥을 어떻게 두고두고 간직할까를 고민해야 하겠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 머리와 가슴에 간직했던 부처님과 불교가 성지를 순례하면서 체화(體化)(?)되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소중한 소득이라고나 할까. 끝으로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삶의 목표를 설정하고 살아감에 있어 무엇을 얼마나 이루었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추구하는 과정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함이 중요함도 알았다. 역시 떠나는 자만이 부처님을 꿈꿀 수 있었다.
김형춘 香岩 (반야거사회 회장․창원전문대교수) 글. 월간반야 2008년 3월 제8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