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측통행 (右側通行)

‘군자(君子)는 대로행(大路行)이라.’ 우리네 옛 어른들은 군자는 큰길로 다녀야지 좁은 골목길이나 후미진 뒷길로는 다니질 않는다고 했다.

영국 사람들은 인도(人道)와 차도(車道)가 구분되어 있지 않은 – ‘보ㆍ차 비분리도로(步車非分離道路)’ – 에서는 ‘우측’통행을 한다. 이유인즉 자칭 ‘신사(gentleman)’ 라 하여 여성과 동행할 때엔 여성을 자신의 오른쪽에 서게 하므로 다니는 차나 마차로부터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우측통행을 한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미국 사람들은 ’보ㆍ차비분리도로‘에서 ’좌측‘통행을 한다. 그들은 서부 개척 시대 언제 어느 곳에서 적의 공격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허리춤에 찬 권총을 재빨리 뽑아 대응사격을 하려면 길의 왼쪽을 걸어야 오른손으로 총을 쉽게 뽑을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런데 왜 우리는 ‘군자대로행’을 주장했을까.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면 도로 중앙에 인도를 닦고 다녀야 옳았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우리네 선비들은 행동거지가 당당하고 떳떳하여 부끄럼이 없으며, 도포자락을 휘날리고 여덟 팔자(八字) 걸음을 걷기 위해선 대로가 제격이었으리라. ‘대로행(大路行)’을 하기 위해선 차도 한가운데 인도(人道)- 보행자 도로-를 만들어 ‘중도통행(中道通行)’을 했으면 좌측통행이니 우측통행이니 하는 시비가 없지 않았을까.

우리나라의 통행방법의 역사는 1백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5년 12월 대한제국의 경무청령으로 ‘보행자와 차마(車馬)의 우측통행원칙’이 규정된 이래, 1921년 조선총독부령으로 ‘사람과 차량을 좌측통행’으로 변경하였고, 1946년 미군정청법으로 ‘차량만 우측통행’으로 변경하고 보행자의 통행은 그대로 좌측통행으로 하였으며, 1961년 도로교통법으로 ‘보ㆍ차비분리도로’에서 보행자는 좌측통행으로 명시하여 이 원칙이 지금까지 시행되고 있고, 1994년 경찰청 권고사항으로 ‘횡단보도에서 우측통행’이 시행되고 있다.

이 시점에서 통행문화가 다시 사회적 관심으로 대두되고 있는 것은 ‘일제의 좌측통행 잔재 청산과 교통안전 도모’라고 하지만 현실적 보행환경과 보행실태를 보면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학교에서는 복도 통행 때 좌측통행을 교육하고, 공항이나 지하철 게이트 회전문 등 각종 시설물은 대부분 우측보행에 편리하게 설치하며, 법령은 보ㆍ차비분리도로에서 좌측으로 통행하게 하고, 횡단보도에서는 우측통행을 유도하고 있다.

시민들의 보행실태는 선호 방향 없이 자유롭게 다니다가 지하철 환승 통로 등에선 좌측통행을 한다고 한다. 현 정부에서는 교통안전 측면이나 인체심리, 보행편의 문제 등을 들어 ‘우측통행’이 바람직하다 하여 통행방법을 바꾸려고 시행 절차를 밟고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적용되고 있는 ‘도로교통법’엔 ‘보행자는 보도와 차도가 구분되지 아니한 도로에서는 도로의 좌측 또는 길 가장자리 구역으로 통행하여야 한다.’는 규정이 유일하였고, 나머지 도로에서는 보도와 차도가 구분되어 있으니 특별히 규제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통행의 편의와 효율성을 높이고 보행습관을 유도하기 위해 일부 공공시설의 보행통로에 화살표와 같은 유도표지를 설치하여 좌측통행을 유도해 왔다.

그러나 실제 보행의 경우 통행목적과 보행환경이 워낙 다양해서 획일적인 보행원칙을 강제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고, 오랜 세월 익숙해진 통행방법이 규정을 바꾼다고 쉬 지켜질지도 의문이다. 문제는 어느 날 갑자기 도로교통법을 바꾸고 권유하는 것보다 법제화는 최소화하고 사회전체의 효율성을 고려하여 점진적으로 보행문화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통행시설을 개선하고 교통안내 표지를 단순ㆍ효과적으로 설치하고, 각종 시설물의 이용방법도 일원화하는가 하면, 무엇보다 중요한 보행습관을 바꾸기 위한 홍보와 교육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어느 쪽으로 다니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무엇을 하기 위하여 어디로 가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김형춘 교수님 글. 월간 반야 2009년 11월 108호

우리말과 글에 대한 사랑

조선조의 대표적인 이야기꾼이요 정치가였던 서포 김만중은 ‘사람의 마음이 입으로 나오면 말이 되고, 말에 가락이 붙으면 가시문부(歌詩文賦)가 된다’고 하여 생각과 말이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오늘날의 여러 서양의 언어학자와 철학자들도 한결같이 ‘언어는 인간정신을 그대로 본떠 놓은 것’ , 또는 ‘말이 없으면 이성도 없고 따라서 세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말과 사람의 마음과는 같은 것의 안팎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처럼 말과 생각이 밀접한 관계에 있다면 우리의 겨레말과 겨레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겨레란 피와 문화를 함께하는 모임이며, 피는 겨레가 함께 탄 것이고 문화는 겨레가 함께 애지은(창조한)것인데 겨레의 말은 곧 그 겨레가 함께 애지은 문화의 한가지로 모든 문화의 바탕인 것입니다. 이 말로써 애지은 문화에는 겨레의 얼이 그대로 깃들어 있음은 물론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세대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이시대 우리들 모두가 공감하는 가치관이 없다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역사가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우리는 고유의 전통적인 가치관의 갈등과 파괴의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전통적인 가치관은 붕괴되고 새로운 가치관은 채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 의식의 오염과 붕괴는 이 시기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이땅에 한자가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되었고, 뒤이어 영어·일본어·러시아어 등에서 시작하여 일제 침략기를 거치고 동족상잔의 6·25를 맞아 우리 한반도는 세계언어의 전시장이 되다시피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겨레얼의 오염의 역사는 우리말글 오염의 역사라고 보아도 좋겠습니다. 우리말이 오염되면서부터 우리얼이 오염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말과 생각이 깊은 관계가 있다면 겨레말과 겨레얼이 깊은 관계가 있음은 물론이요, 나아가 국어와 국민정신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 겨레의 가장 큰 현실적 고민이 가치관의 부재라는 이른바 국민의식의 오염이라면 우리의 지상과제는 국민정신의 순화라고 하겠습니다. 이 국민정신의 순화는 여러가지 해결 방법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국어를 순화하는 것입니다. 우리말과 글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바로 우리얼을 가꾸고 지키는 지름길이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내나라 말글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국민정신을 순화시키기 위하여 우리말글에 대한 애착을 갖자는 것입니다.

최근에 특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이버공간의 언어는 이러한 측면에서 더욱 걱정스럽습니다. 상대방이 앞에 있을 때의 말하고 듣는 것과 상대방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함부로 한다는 것도 문제지만,

표준어도 정서법도 무시한 언어행위는 반드시 고쳐야 합니다.

이러한 말글의 이면에 우리의 정신세계가 도사리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김형춘 글 / 월간반야 2001년 4월 (제5호)

우리 역사는 발전하는가

요즈음 서민들은 다들 죽겠다고 아우성이다. 경제가 어렵다는 이야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데 정부가 내놓은 처방이 잘 듣지 않는 모양이다. 며칠 전에 만난 외국 화장품 수입업을 하는 친구도 자기들의 주고객이 중 상류층인데도 상당히 영향이 있다고 한다. 이런 경제적 상황과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나라 안은 온통 시위중이다. 쌀 개방을 반대하는 농민 단체들은 연일 과격한 모습을 보이고, 국가 보안법 폐지를 두고 여야의 연장선에서 불은 계속 번져간다. 과거 친일 행위자들을 가려내어 청산을 하겠다고 칼을 뽑아든 정부 여당에 야당 당수는 모든 것을 걸고 투쟁하겠다고 한다. 행정수도가 언제쯤 이전될지 모르지만 국론은 갈기갈기 찢어져 가고 있다. 어쩌면 집권층에서 국민을 이간질하고 싸움을 붙이는 것처럼 보인다. 조그만 반도국가가 남북으로 나뉜 것도 서러운데 그 안에서 또 분열되는 모습을 보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지금 우리의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가. 아니면 순환과 몰락을 향해 가고 있는가. 어떤 역사 학자들의 사상과 논리가 이 시대 우리 역사를 판단하는데 도움이 될까. 19세기 전반을 살았던 독일의 철학자 헤겔(Hegel)은 변증법과 이성주의를 강조하였다. 세계를 현실과 이성의 일치라고 본 그는 절대적이고도 유일한 방법인 변증법에 의하여 전개되는 세계를 이성적으로 추구하였다. 18세기 칸트(Kant)로 대표되는 계몽사상의 한계를 통찰하고 ‘역사’가 지니는 의미에 중점을 두어 19세기 후반 이후 국가주의,역사주의의 길을 열었다고 생각된다. 현실이란 인간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역사과정은 오히려 그 자신의 법칙에 의해 필연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의 철학의 전체를 일관하는 방법이 모든 사물의 전개를 정(正), 반(反), 합(合)의 3단계로 나누는 변증법이었으니 우리의 현대사도 그간의 ‘우향우(右向右)’ 편중에서, ‘좌향좌(左向左)’로 갔다가 언젠가 다시 ‘합(合)’의 단계인 ‘중도(中道)’로 돌아오면서 계속 발전할 것인가.

아니면 20세기를 살면서 역사의 발전에서 ‘순환과 몰락’을 강조한 영국의 토인비(Toynbee)의 주장을 따를 것인가. 그는 ‘역사의 연구’를 통해 문명의 발생에서 소멸까지의 과정을 5단계로 비교연구 하면서 문명의 발달과 몰락에는 규칙적인 주기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문명의 성장이란 문명을 선도하는 창조적 소수자가 그 문명이 직면한 문제를 창조적으로 해결해 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역사를 경제적 영향력이 아닌 정신적 영향력에 의해 구체화된다고 하는 것을 믿는다면 지금의 우리 역사는 어려운 상황으로 가는 것인가.

과학을 비롯한 물질문명이 발전하여 생활이 편리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편리해진 것과 인간의 행복을 향한 삶의 질이 향상된 것은 다르다. 물질보다는 정신문화에 바탕을 둔 종교나 철학, 예술의 바탕 위에 새로운 역사를 써야할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국민이 불안하지 않게 이해와 설득이 이루어진 후에 모든 정책을 펴는 게 좋겠다. 우리의 역사는 계속 발전하고 있다는 신념을 갖도록.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4년 10월 제4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