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사람 지시라

누가 부당한 명령을 내렸는지 모르지만 한동안 공무원들이 민간인을 사찰했다고 온통 세상이 벌집 쑤셔놓은 듯 했다. 그러더니 남 나무랄 것 없이 앞 정권에서도 해오던 관행이라 맞불을 지르는 등 국기(國基)가 흔들릴 정도로 공직자들의 처신이 문제가 되고 있다.

예로부터 우리사회엔 유교적인 사상에 바탕을 둔 정치제도나 가부장적인 가족제도에서 상명하복(上命下服), 명령복종(命令服從) 등이 자연스럽게 여겨져 왔다. 특히 조직의 특성이 강조되는 공직사회와 군인, 경찰을 비롯한 일반 기업에서도 상사의 뜻에 거슬리는 행위는 일단 자기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기에 이번의 총리실 민간인 사찰도 관행처럼 이어져 온 것이리라.

지금 사법 당국에서는 부당한 명령을 내린 주체인 몸통을 찾는 수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그 결과에 대해서 우리 보통사람들은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수사의 한계를 예단하는 사람들의 점치기가 이번에도 십중팔구는 들어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 나라의 국법(國法)에 어긋나고 백성들의 삶에 해악을 끼치는 명령을 내리는 상관(上官)은 물론 그 부당한 명령을 그대로 받아 시행한 공무원은 잘못이 없을까 하는 점이다. 부당한 명령을 내리는 것도 범법(犯法)이지만 그 명령을 받아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시행한 것도 범법임에는 틀림없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큰 전란의 하나인 7년전쟁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32세에 늦깎이로 무과에 급제한 후 14년 동안을 두만강변의 변방 오지에서 말단 수비장교로 근무했다. 그때를 회고하면서 “윗사람의 지시라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불의(不義)한 직속상관과의 불화로 파면과 불이익을 수차례 당했다.”고 했다. 어떤 다른 조직보다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군인의 신분이면서도 충무공은 부당한 명령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즈음 우리나라 정치판의 핵으로 급부상한 안철수 교수는 2004년 말에 내놓은 저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에서 가장 강조한 내용인즉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원칙을 지키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원칙을 지켜서 이익을본다면 누가 원칙을 지키지 않겠는가. 반칙을 해서 손해를 본다면 누가 반칙을 하겠는가.

그런데 반칙을 해서 이익을 볼 수 있다면 생각이 달라진다. 그 이익의 정도를 따져서 타산이 맞다면(?) 해 볼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회 비리의 함정이 되고 모든 사회악이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손해를 감수하면서라도 원칙을 지켜라’는 말에는 내심으로 옳다는 판단이 가면서도 실행에 옮기는 것은 쉽지 않다. 이때야말로 양심과 이성의 소리를 듣고 사회정의에 대한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다산(茶山)은 「목민심서(牧民心書)」의 ‘수법(守法)’조항에서 “눈앞의 이익에 유혹되어서도 안 되고, 위세에 굴해서도 안되는 것이 목민관의 도리이다. 비록 상사가 닦달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음이 있어야 한다(不爲利誘 不爲威屈 守之道也 雖上司督之 有所不受).”고 주장한 바 있다. 물론 다산도 ‘예제(禮際)’ 조항에선 ‘상명하복上命下服’의 대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상사의 뜻을 거역하기가 어려움은 마찬가지다. 그럴 경우를 생각해서 유능한 정치 지도자나 CEO들은 정책이나 방침에 대해 반대하고 비판할 기구를 설치하거나 기회를 주곤 한 것을 볼 수 있다. 그 한 예가 조선왕조의 삼사(三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제도다. 우리 역사의 성군(聖君) 세종(世宗) 때엔 대표적인 반대론자 허조(許稠)가 있었다.

황희 정승에 가려 영의정에 오르진 못했지만 좌의정을 지낸 예조의 관리였다. 그는 사사건건 세종의 정책을 논리적으로 반대했다. 뒷날 세종은 “허조는 무던히도 나를 반대한 신하였다. 법전을 이두(吏讀)로 번역하기를 명했을 때, 부민고소금지법을 폐지하려할 때, 파저강 전투 준비, 수령 육기제 실시 등 수많은 사안들에서 사사건건 나의 정책을 비판했다”고 피력한 바 있다.

야사(野史)에 전해지는 바지만 중요한 정책을 어전회의에서 결정하려는 데 하필 허조가 집안 사정으로 회의에 불참하게 되자 세종은 그 회의를 다음날 허조가 참석할 때에 하자고 미루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였다. 또 기억할만한 사건은 ‘사찰 소유 토지 몰수’와 관련한 회의에서 신하들 중 유일하게 좌의정 허조 한사람이 반대하여 세종은 허조의 의견을 중히 여겨 ‘토지 몰수’를 보류하였다고 한다.

치자(治者)나 상사上士도 모름지기 공법(公法)에 어긋나고 민생에 해악을 끼치는 명령을 내려서는 안 되지만 모름지기 소수의 반대 목소리와 비판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아울러 윗사람의 뜻이라고 무조건 받아들이는 공직자도 이젠 사라져야 한다. “NO”라고 용기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때다.

김형춘 창원문성대학 교수, 문학박사, 월간 반야 2012년 5월 138호

위학지서(爲學之序)

오래 전 일이다. 30대 중반의 늙은 학생이 무작정 물어 물어 서당을 찾아갔다. 훈장님은 조선조 마지막 유림의 제자답게 근엄 하시면서도 인자함 그대로였다. 첫날 배운 내용은 ‘위학지서(爲學之序)’라는 글이었다. 배움의 차례라고나 할까. 학문의 순서라고나 할까. 매우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박학지(博學之)’하고, 심문지(審問之)하며, 신사지(愼思之)하고, 명변지(明辨之) 연후에 독행지(篤行之)하라’고 하셨다. 공부하는 동안에도 가끔씩 이 글귀를 음미해 왔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숱한 문제들과 부딪칠 때 마다 항상 나는 이 차례를 ‘문제해결의 순서’라고 생각하고 매사에 적용해 왔다. 어떤 문제든지 직면하면 먼저 이 문제에 관한 가능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자세히 모르거나 의심나는 부분은 누구를 가리지 않고 묻고 자문을 구한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생각하고 또 생각한 연후에 나름대로 판단을 내린다. 스스로 고민하여 내린 판단에 대해선 지체 없이 소신껏 행동으로 옮기면서 살아왔다. 어쩌면 내 삶은 이러한 과정의 연속인 셈이다. 문제가 크건 작건, 쉬운 것이든 어려운 것이든 이 공식에 대입하여 풀어낸 셈이다. 그리고는 문제를 제대로 풀었는지 잘못 풀었는지 결과를 보면서 어느 과정에서 내가 소홀히 했는지, 적절한 대처를 하였는지 스스로 평가를 해 본다. 짧은 시간 안에 평가 결과가 나올 수도 있지만 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어쩌면 내가 이세상 사람이 아닐 때에 평가가 나올 수도 있겠지.

그런데 지금쯤 느낌이 오는 게 하나 있다. 이 위학지서의 맨 첫 과정인 ‘박학지(博學之) 하고’ 하는 말이다. 어떤 문제든 간에 해결의 가장 긴요한 열쇠는 그 문제에 대한 ‘정확하고 풍부한 자료’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든다. 요즈음 세상처럼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때도 일찍이 없었고, 앞으로의 정보 홍수는 더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그러나 막상 어떤 문제에 부딪치고 보면 그 문제 해결에 적합한 정보를 찾는다는 것은 의외로 쉽지 않다. 오히려 정보가 많아서 탈이다.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될 만한 ‘자료(data)’를 찾고, 필요한 자료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문제해결의 가능성은 높아질 것이다. 다음 단계는 자료의 가공이라 하겠다. 이 자료가 분석되고 정리되고 적용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정보(information)’가 되는 것이다. 다시 이 ‘정보’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 ‘지식(knowledge)’이 되고, 지식이 추상화되어 ‘지혜(wisdom)’가 된다면 지나친 논리의 비약일까.

물론 ‘박학(博學)’이 정확하고 풍부한 자료를 찾는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이 자료를 찾기 위해 적접 또는 간접으로 숱한 체험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쩌면 육식(六識)을 낳은 육근(六根)을 통해 스스로의 지적영역을 일단 넓혀 놓아야 한다는 말이다.

요즈음 우리 주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정치나 경제, 심지어 언론까지도 아전인수격으로 제 발등 불끄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면 좀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든다. 정보가 없는 것도 아니고 모자라는 것도 아닐텐데. 이럴 때 선인들의 지혜인 ‘위학지서(爲學之序)’를 권해보고 싶다.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3년 12월 제37호

원시에로의 회귀

출퇴근길의 가로수나 연구실에서 내려다본 교정의 나무들이 생기를 발하는 계절이다. 최근 두세 달 동안 칩거 아닌 칩거를 하고 꼭 6년만에 연구실로 돌아왔다. 뭔가 신변정리가 깔끔하게 되지 않아 아침 9시에 출근하여 오후 5시까지 우두커니 앉아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좋게 표현하면 무념무상의 경지로 가는 수행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니면 멍청하게 시간만 허비하는 바보스런 모습의 연속이었다. 전임지의 사무실에서 옮겨온 짐들은 그대로 묶여진 채 여기저기 쌓여 있고, 6년 전에 쓰던 집기나 책들도 어지러이 널려 있는 그대로다. 지금까지 아침저녁으로 보던 신문도 없고, 그 흔한 TV도 없다. 컴퓨터를 켜보니 6년이나 지난 고물이라 그런지 인터넷도 안 된다. 현실과 문명을 철저하게 등지고 조용히 내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20일 정도를 그렇게 보냈다. 오히려 편안함을 느꼈다.

주말에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텃밭으로 향한다. 지난 겨울동안 완전히 잊고 지냈던 곳이다. 잡초들이 말라 누렇게 된 풀밭(?)에는 지난 가을에 따지 않고 버려두었던 박이 썩어가고, 고추를 따고 그대로 둔 말라버린 고추나무, 뿌리만 남겨두고 말라 부러진 채로 뿌리를 덮고 있는 도라지 줄기, 줄기 끝 부분에 달린 들깨만 낫으로 베고 남은 들깨의 그루터기, 노인네가 가난했던 옛날의 향수를 맛보기 위해 그대로 두자고 해서 없애버리지 못했던 돼지감자의 마른 줄기들, 여느 잡초밭과 다름없이 말라버린 땅두릅밭, 언뜻 보기에는 약해 보이지만 비록 잎과 줄기는 말라도 혹한의 추위와 강풍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제 모습을 지키고 있는 말라버린 고사리 잎새들, 제때에 가지치기를 해주지 않아서 흉하게 키만 자란 비라칸사스 울타리의 빨간 열매들, 마치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집에 돌아온 기분이 든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엄두가 나질 않는다. 온통 말라버린 풀밭이라 불을 질러버리면 좋으련만. 겨울 가뭄으로 건조할 대로 건조해진 대지에 불기운이 가면 감당할 수도 없을 테고. 하는 수 없이 손과 낫으로 말라버린 고추와 들깨, 돼지감자와 고사리, 그리고 잡초의 덤불을 걷어내고 그루터기를 뽑아내니 비로소 이곳이 텃밭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늦가을에 이웃에서 몇 포기 얻어다 심은 양파 모종이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기에 퇴비를 뿌리고 북을 돋아 주고, 고추와 들깨를 심었던 곳에는 콩을 심기 위해 퇴비를 하고 이랑을 지어 쪼아두었다. 벌써 꽃이 만개한 매화와 꽃을 피울 준비가 한창인 앵두나무의 보기 싫은 가지를 쳐주고, 비라칸사스 가시에 찔리고 할퀴면서 울타리의 가지치기를 해놓으니 이발을 한 사람처럼 주위가 훤해졌다. 애기사과와 단풍나무는 겨울이 되어도 마른 잎을 그대로 달고 있으니 좀은 추해 보인다. 봄이 오기 전에 떨어져서 거름이 되어주는 것이 순리일텐데. 흙을 밟고 대지를 호흡하고 땀을 흘리는 것이 이처럼 편안할 수 있을까.

지난 겨울의 추위에 얼어 죽었는지 산미나리는 자취를 감추었고, 풀섶에서 쑥과 냉이가 모습을 드러낸다. 길거리나 장터에서 보이는 대로 구해다 심는 야생화밭에는 할미꽃이 제일 먼저 올라왔다. 노인네는 아직 채 올라오지도 않은 머위를 뿌리채로 캐신다. 작년에는 나무두릅의 첫순을 누구에게 도둑질 당했다고 서운해 하셨는데 올해는 주인에게 돌아올지 모르겠다. 차나무는 심어놓고는 잎을 따주지 않으니까 별로 쓸모는 없는데 오래되어 씨가 떨어져 싹을 틔어 어린 묘목들이 제법 많이 나 있다. 내일 아침 밥상에 오를 쑥국과 냉이 나물, 아니면 냉이된장국을 생각하면서 이마의 땀을 훔친다.

웰빙(Well-being)바람이 불기 시작한 지도 제법 시간이 흘렀건만 이 바람은 일시적 유행이 아닌가 보다. 이 바람의 참뜻은 반문명적ㆍ반도시적ㆍ반인공적이어서, 친자연적ㆍ복고적ㆍ시골적인 것 같다. 어쩌면 원시에로의 회귀가 참 웰빙(?)이 아닐까.

김형춘 香岩 글. 월간반야 2006년 4월 제6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