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길의 가로수나 연구실에서 내려다본 교정의 나무들이 생기를 발하는 계절이다. 최근 두세 달 동안 칩거 아닌 칩거를 하고 꼭 6년만에 연구실로 돌아왔다. 뭔가 신변정리가 깔끔하게 되지 않아 아침 9시에 출근하여 오후 5시까지 우두커니 앉아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좋게 표현하면 무념무상의 경지로 가는 수행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니면 멍청하게 시간만 허비하는 바보스런 모습의 연속이었다. 전임지의 사무실에서 옮겨온 짐들은 그대로 묶여진 채 여기저기 쌓여 있고, 6년 전에 쓰던 집기나 책들도 어지러이 널려 있는 그대로다. 지금까지 아침저녁으로 보던 신문도 없고, 그 흔한 TV도 없다. 컴퓨터를 켜보니 6년이나 지난 고물이라 그런지 인터넷도 안 된다. 현실과 문명을 철저하게 등지고 조용히 내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20일 정도를 그렇게 보냈다. 오히려 편안함을 느꼈다.
주말에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텃밭으로 향한다. 지난 겨울동안 완전히 잊고 지냈던 곳이다. 잡초들이 말라 누렇게 된 풀밭(?)에는 지난 가을에 따지 않고 버려두었던 박이 썩어가고, 고추를 따고 그대로 둔 말라버린 고추나무, 뿌리만 남겨두고 말라 부러진 채로 뿌리를 덮고 있는 도라지 줄기, 줄기 끝 부분에 달린 들깨만 낫으로 베고 남은 들깨의 그루터기, 노인네가 가난했던 옛날의 향수를 맛보기 위해 그대로 두자고 해서 없애버리지 못했던 돼지감자의 마른 줄기들, 여느 잡초밭과 다름없이 말라버린 땅두릅밭, 언뜻 보기에는 약해 보이지만 비록 잎과 줄기는 말라도 혹한의 추위와 강풍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제 모습을 지키고 있는 말라버린 고사리 잎새들, 제때에 가지치기를 해주지 않아서 흉하게 키만 자란 비라칸사스 울타리의 빨간 열매들, 마치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집에 돌아온 기분이 든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엄두가 나질 않는다. 온통 말라버린 풀밭이라 불을 질러버리면 좋으련만. 겨울 가뭄으로 건조할 대로 건조해진 대지에 불기운이 가면 감당할 수도 없을 테고. 하는 수 없이 손과 낫으로 말라버린 고추와 들깨, 돼지감자와 고사리, 그리고 잡초의 덤불을 걷어내고 그루터기를 뽑아내니 비로소 이곳이 텃밭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늦가을에 이웃에서 몇 포기 얻어다 심은 양파 모종이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기에 퇴비를 뿌리고 북을 돋아 주고, 고추와 들깨를 심었던 곳에는 콩을 심기 위해 퇴비를 하고 이랑을 지어 쪼아두었다. 벌써 꽃이 만개한 매화와 꽃을 피울 준비가 한창인 앵두나무의 보기 싫은 가지를 쳐주고, 비라칸사스 가시에 찔리고 할퀴면서 울타리의 가지치기를 해놓으니 이발을 한 사람처럼 주위가 훤해졌다. 애기사과와 단풍나무는 겨울이 되어도 마른 잎을 그대로 달고 있으니 좀은 추해 보인다. 봄이 오기 전에 떨어져서 거름이 되어주는 것이 순리일텐데. 흙을 밟고 대지를 호흡하고 땀을 흘리는 것이 이처럼 편안할 수 있을까.
지난 겨울의 추위에 얼어 죽었는지 산미나리는 자취를 감추었고, 풀섶에서 쑥과 냉이가 모습을 드러낸다. 길거리나 장터에서 보이는 대로 구해다 심는 야생화밭에는 할미꽃이 제일 먼저 올라왔다. 노인네는 아직 채 올라오지도 않은 머위를 뿌리채로 캐신다. 작년에는 나무두릅의 첫순을 누구에게 도둑질 당했다고 서운해 하셨는데 올해는 주인에게 돌아올지 모르겠다. 차나무는 심어놓고는 잎을 따주지 않으니까 별로 쓸모는 없는데 오래되어 씨가 떨어져 싹을 틔어 어린 묘목들이 제법 많이 나 있다. 내일 아침 밥상에 오를 쑥국과 냉이 나물, 아니면 냉이된장국을 생각하면서 이마의 땀을 훔친다.
웰빙(Well-being)바람이 불기 시작한 지도 제법 시간이 흘렀건만 이 바람은 일시적 유행이 아닌가 보다. 이 바람의 참뜻은 반문명적ㆍ반도시적ㆍ반인공적이어서, 친자연적ㆍ복고적ㆍ시골적인 것 같다. 어쩌면 원시에로의 회귀가 참 웰빙(?)이 아닐까.
김형춘 香岩 글. 월간반야 2006년 4월 제6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