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41)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다

하나는 전체의 한 부분이지만, 이 하나는 곧 전체라는 것이다. 하나와 많음一多이 서로 통하는 세계가 진여의 세계이다. 전체의 많음이 하나에서 나오는 것이며, 다시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다.

화엄의 법계연기(法界緣起)에서 하는 말처럼 우주 만유 전체는 하나의 큰 그물이며, 낱낱의 개체는 그물의 눈과 같아서 일다(一多)가 융합되어 있으므로, 하나가 곧 전체요 전체가 곧 하나라는 것이다.

또한 하나는 전체를 가진 하나이며 전체가 없는 하나는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하나의 총상(總相)은 부분의 별상(別相)이 집합된 것이다. 예를 들면 한 채의 집에 집을 구성하는 전체의 요소가 모두 들어 있는 것이다.

신심명(40)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반드시 지켜서는 안되느니라

若不如此(약불여차)인대 不必須守(불필수수)니라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반드시 지켜서는 안되느니라

유무(有無)가 둘이 아닌 경계라야 진여(眞如)의 세계인데, 이것이 바로 깨달은 세계이며, 이것을 불법(佛法)이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면 모두 버려야 한다.

깨달음으로써 법칙을 삼는(以悟爲則) 불교에 있어서는 근본 본령(本領)을 지켜야 하며, 본령이 아닌 것을 무엇 하러 지키는가. 즉 둘이 아닌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면 불법이라고 할 아무 것도 없다는 뜻에서 지키지 말라고 한 것이다.

중봉은 “유무(有無)의 정식(情識)이 다한 곳에 색공(色空)도 잊는다.”고 하였다.

신심명(39)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니

有卽是無(유즉시무)요 無卽是有(무즉시유)니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같다고 한 것도 원융무애를 설명하는 것인데, ‘있다’ 또는 ‘없다’라고 하는 것은 객관의 경계를 분별할 때 쓰는 개념에 불과하다. 주객이 끊어진 무념(無念) 속에는 어떠한 개념이 성립되지 않는다. 몽경(夢境) 속에 있었던 것은 잠을 깨면 없었던 것이고, 없었던 것 역시 없었던 것이다. ‘있다’ 또는 ‘없다’라고 하는 것이 꿈속의 일이라면,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고 없어도 없는 것이 아니므로 있고 없음이 하나인 것이다.

중봉은 송(頌)하기를

無中現有有還無 무중현유유환무

此物應難入畵圖 차물응난입화도

笑老趙州忘管帶 소노조주망관대

强言東壁掛葫蘆 강언동벽괘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