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44) 언어의 길이 끊어져 과거·현재·미래가 아니로다

言語道斷(언어도단시)하야 非去來今(비거래금)이로다

언어의 길이 끊어져 과거·현재·미래가 아니로다

진여법성의 자리, 즉 도라는 것은 언어의 길이 끊어져 말이나 문자로써 설명할 수가 없고, 시간을 초월하여 과거·현재·미래의 시제가 없다는 것이다. 말없는 말이며 시간이 아닌 시간이 도(道)속에 있다.

다시 말하면 시간적·공간적으로 원융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 도의 세계이며, 무애자재한 법성의 세계는 현상에 걸려 장애를 받는 일이 없는 것이다. 부처님의 열반 사덕(四德)인 상(常) · 낙(樂) · 아(我) · 정(淨)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영원하고 즐거우며 실체를 갖춘 깨끗한 진리의 세계가 불성(佛性) 속에서 구현되는 것이다.

신심명(43) 믿는 마음은 둘이 아니요 둘이 아닌 것이 믿는 마음이니라

信心不二(신심불이)요 不二信心(불이신심)이니라

믿는 마음은 둘이 아니요 둘이 아닌 것이 믿는 마음이니라

진여자성은 둘이 아닌 신심으로 깨달아지는 것이며, 신심은 불법수행의 힘이다. 힘이 없으면 사람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신심이 없으면 수행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신심 역시 둘이 아닌 경지에 이르러야 완전한 신심이 되는 것이다. 이 신심 속에는 신(信)‧해(解)‧행(行)‧증(證)이 갖추어져 있으며, 이것이 진여법계에 합치되게 하는 불이(不二)신심인 것이다.

화엄경의 현수품에서는 “믿음이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信爲道元功德母)”라고 하였다. 따라서 깨달음의 경계와 마찬가지로 신심의 경계도 상대가 없는 절대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凡聖悟迷俱不二(범성오미구불이) 범부와 성인의 깨달음이 모두 둘이 아니니

了知元自信心生(요지원자신심생) 원래 신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心非生滅誰迷悟(심비생멸수미오) 마음은 생기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거니 누가 미혹하고 깨달았는가

開眼無端入火坑(개안무단입화갱) 눈을 뜨고도 무단히 불구덩이로 들어가네

신심명(42) 다만 능히 이렇게만 되면 어찌 마차지 못할까 걱정하겠는가

원융무애한 진여법계를 체험하기만 하면 공부는 다 마쳐져 더 이상 할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이 일심 안에서 해결되어 괴로움의 문제는 남지 않는다. 선문(禪門)에서는 이를 일대사(一大事) 해결이라고 한다.

그리고 만사휴의(萬事休矣)의 이 경지는 결국 자성을 깨닫는데서 성취되는데, 이것을 위해서 생애를 바치고 사는 수도자의 본분은 분별로 말할 수 없는 일종의 불가사의이다. 이처럼 진여자성으로 돌아가면 운명의 굴레는 없는 것이다.

중봉의 송(頌)에는 이렇게 읊었다.

要問畢時那裏泊(요문필시나리박) 이렇고 이렇고 다시 이렇다는데 묻노니 마칠 때가 어디쯤인가?

埒下重重鐵面皮(날하중중철면피) 겹겹의 쇠가죽만 만지고 있으니

家鄕猶隔三千里(가향유격삼천리) 고향은 아직도 삼천리나 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