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경전 (11)잡아함경

『잡아함경(雜阿含經. Samyuktagama)』은 불교의 교리와 설법의 모체가 되는 경으로 알려져 있다. 네 가지 아함경 중에서도 『잡아함경』의 위치가 가장 탁월하다고 한다. 문체의 조직이 가장 잘 되었으며, 기초교리를 이론화하는데 있어서 논리적 근거가 되는 설법의 내용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경전이다. 한역으로는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Gunabhadra)가 번역한 50권 본(本)이 가장 완비된 것이라 한다. ‘잡아함’이라 하는 것은 이것저것 서로 관련된 교설을 차례로 배열하여 묶었다는 뜻에서 붙여진 말이다. 『아함경』이 모든 경전의 원전 구실을 하는 경이라고 앞서 언급했지만 특히 『잡아함경』에 설해진 내용이 가장 명쾌하여 교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 탁월하다고 한다.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의 인연과 그 당시의 사정, 그리고 부처님이 어떻게 사부대중(四部大衆)을 교화했다는 것을 가장 사실적으로 알 수 있는 경은 『잡아함경』이 으뜸이다. 50권(1362경) 속에 두 가지의 소경이 있어 짤막짤막한 법문을 엮어 이룩된 이 경은 불교 입문의 필독서라고 할 수 있다.

교리 사상의 연원으로서 이 경을 살펴볼 때 오취온(五取蘊)에 항일(恒一)·주재성(主宰性)이 없다고 주장한 무아설(無我設)이 주축이 되면서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고 괴로운 것은 진정한 ‘나’가 아니라고 설하고 있다. 또 연기법을 가장 구체적으로 설하여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이 12연기라 하였다. 이 중 무아설은 불교 특유의 교리사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우리가 ‘나’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물질적, 생물학적, 또는 정신적인 현상의 집합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육체라고 하는 것은 몇 개의 물질적인 요소들의 모임이고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감각기관들과 그것에 해당하는 대상들 간의 접촉에서 발생되는, 끊임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고 하는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잡아함경』에서는 이와 같은 인간의 존재를 수레에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다. “여러 가지 재목을 한 곳에 모아 세상에서 수레라 일컫는 것처럼 모든 쌓음의 인연이 모인 것을 거짓으로 중생이라 부르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들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들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어떠한 실체도 가지고 있지 않다.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는 ‘몸뚱이인 색(色)은 모인 물거품 같고, 느낌인 수(受)는 떠 있는 거품 같으며, 생각[想]은 아지랑이 같으며, 지어감인 행(行)은 마치 파초 같으며, 의식[識]은 허깨비의 법과 같다. 이와 같은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는 존재 속에서는 고정·불변적인 실체가 없다’고 하였다.

『잡아함경』 11권 속에서는 난다카 비구가 비구니들에게 등불의 비유로써 무아의 이치를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비유하면 기름과 심지로 인하여 등불은 타게 된다. 그러나 그 기름은 덧없고 심지도 덧없으며, 불도 또한 덧없고 등잔도 또한 덧없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기름도 없고 심지도 없으며 등잔도 없더라도 그것들을 의지하여 일어나는 등불 빛은 언제나 변하거나 바뀌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 말이 항상하여 옳은 말이라 하겠는가? 우리들의 존재 속에서 고정불변적인 어떤 것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파초를 보고 재목으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하여 잘라내어 껍질을 벗기고, 단단한 나무와 같은 알맹이를 찾으면서 다 벗겨 보아도 단단한 것은 도무지 없는 것과 같다고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지안스님강의. 월간반야 2003년 7월 (제32호)

초기경전 (10)증일아함경

『아함경』을 중심으로 설해진 부처님 설법에는 악도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나쁜 행위 곧 악업을 지으면 악도에 간다는 다분히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듯한 훈몽적인 교훈을 많이 설하고 있다. 이것은 불법 수행이 그만큼 윤리의식을 함양해서 이것을 더욱 고취시켜 나갈 때 수행이 완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악도의 이야기들은 사람이 죽어서 가는 사후의 세계로 설명되는데 이러한 것을 이론으로 정리해서 설해 놓은 것이 바로 윤회설(輪廻說)이다.

윤회란 범어 ’Samsara’를 번역한 말로 그 어원의 뜻은 ‘함께 흐른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윤회의 개념은 사람이 나고 죽는 생사를 거듭한다는 뜻이다. 곧 생을 이어가면서 생사를 반복하고 있는 것을 윤회라 한다. 이 윤회설은 불교의 고유한 설이 아니고 힌두교를 비롯한 인도의 고대 사상에 공통적으로 설해져 오던 이론이다. 뿐만 아니라 서양의 사상에도 부분적으로 윤회설과 함치되는 설이 있다. 피타고라스의 사상에도 윤회설이 등장한다.1) 윤회의 이론에 의하면 한 개인에게 있어서 현재의 생은 전체의 생 가운데 하나의 생이라는 것이다. 하나의 생은 이 육신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시간적인 제한이 분명하지만 전체의 생은 시간적인 시종을 말할 수 없는 무한생(無限生)이라는 것이다. 흔히 무시생래(無時生來)란 말이 한역 논장에 자주 나오는데 시작 없이 태어나 생사를 거듭해 온 이래라는 뜻이다. 윤회라는 강물에서 한 물결에 불과한 것이 개인의 한 생애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윤회란 한 인간이 죽은 후에 그가 지은 전생의 업에 의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게 되어 거듭 생을 누리게 된다는 뜻이다.

업(業)은 범어의 ‘Karma’를 번역한 말인데 행위의 결과로 남는 어떤 잠재적인 힘이 있어 다음의 과보를 불러오게 되는 것을 말한다. 『바가바드기타(Bagavadgita)』2)라는 인도의 고전 책에는 이런 말이 있다. “태어난 자는 틀림없이 죽는다. 그리고 죽은 자는 틀림없이 다시 태어난다. 다시 몸을 받는 영혼은 낡은 육체를 버리고 새 육체로 바꾸어 입는다. 마치 어떤 사람이 헌 옷을 버리고 새 옷을 바꾸어 입는 것처럼.”

이 말에서도 역시 윤회의 이치를 명료하게 설해 놓고 있다. 그런데 이 윤회설에서 중생이 죽어 다시 생을 받는 곳을 보통 여섯 곳으로 설명하여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한다고 한다. 인간에서 업을 지어 그 과보를 받는 곳이 인간이 아닌 다른 곳이 있다는 것이다. 육도(六道)는 인간을 중심으로 하여 제일 나은 세계인 천상이 있고 나쁜 곳인 지옥이 있는데 그 외에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가 있다. 인간으로서 한 생을 산 사람이 다음 생에는 천상에 가 태어나는 수가 있는가 하면 지옥에 가서 태어나는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물론 아귀도나 축생도에도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생을 바꾼다 하여 전생(轉生), 곧 전환되는 생이라 한다. 육도윤회(六道輪廻)는 생을 바꾸면서 업의 과보로 여섯 갈래의 세계를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이 마을 저 마을로 이사를 다니면서 살 듯 이 생이 바뀔 때마다 육도를 순회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육도를 윤회하게 하느냐 하면 그 윤회의 주체를 초기불교에서는 업이라 하였다. 업이란 다시 말을 하자면 범어의 ‘Karma’를 번역한 말로 ‘행위’라는 뜻을 지닌 말이다.

『중아함경』에 나오는 부처님 말씀이 있다. 어떤 바라문이 부처님께 질문을 한다. “고오타마여! 어떤 인연으로 저 중생들이 다 같은 사람의 몸을 받았으면서도 지위가 높고 낮으며, 얼굴이 예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며, 명이 긴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목숨이 짧은 이도 있고, 병이 많은 이가 있는가 하면 적은 이가 있고, 부자가 있는가 하면 가난한 사람이 있고, 나쁜 지혜를 가진 이와 착한 지혜를 가진 이가 있습니까?”

다시 말하면 인간세상의 차별이 왜 있느냐는 질문을 하였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단 한마디로 그것은 모두 전생에 지은 업 때문이라고 하였다. 업이 좋으면 좋은 과보를 받고 업이 나쁘면 나쁜 과보를 받는 이치는 인과의 법칙이다. 인간의 현실 속에서 나타나는 갖가지 차별을 업의 차이, 과거에 행했던 습관의 차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무척 합리적인 이론이다. 모든 존재하는 현상의 상태를 과거에 이미 만들어졌던 업의 결과로 설명하여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에 이르기까지를 모두 그 원인을 과거를 소급하여 해명해 주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삼세 인과(三世因果)를 설명하는 말에 전생을 알려고 하거든 금생(今生)이 받고 있는 것을 살피라는 말이 있다. 곧 과거의 원인에서 현재의 결과가 오고 현재의 원인에서 미래의 결과가 온다는 뜻이다. 윤회설이 인류 역사에 끼친 영향이라면 인간에게 삶을 순리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정신적인 여유를 준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인도에서 발생한 여러 종교·철학사상에 있어서 윤회설은 너무나 핵심적인 것이다. 만약 윤회설이 없다면 인도의 종교와 사상은 존재할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왜냐하면 인도의 모든 종교와 철학의 목적이 윤회에서 벗어나는 일, 달리 말하면 해탈을 얻는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윤회사상은 또한 인생의 의미를 무한히 확대하여 그 뜻을 한없이 넓혀 놓은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지안스님강의. 월간반야 2003년 6월 (제31호)

초기경전 (1)숫타니파아타

‘숫다니파타(Sutta-nipata)’는 경을 모은 집성(集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굳이 번역하자면 경집(經集)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은 수많은 불경 가운데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경으로 알려지고 있다. 때문에 초기 불교를 이해하고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하여 역사적인 인물로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경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제자들이 부처님 생전의 말씀을 암송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12전(傳)시킨 것이 최초의 경전 결집(Sa?git?)이라 한다. 그러다가 팔리어라는 언어를 통하여 비로소 문자화되면서 경전이 그 체제를 새로이 갖추게 되었다. 『숫다니파타』는 바로 팔리어 성전에 들어 있는 경으로, 운문체의 짧은 시와 같은 형식으로 이루어진 부분도 있다. 마치 『법구경』과 비슷하게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은 모두 다섯 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개의 경전이 그러하듯이 각 장이 따로따로 독립되어 전해지다가 어느 시기에 와서 함께 묶여진 것으로 본다. 제 3결집이 이루어진 시기인데, 그때를 대략 아소카 왕 재세시로 보기도 한다. 어떻든 이 경이 초기 경전을 대표하는 최고의 경으로 알려져 있다.

제1장의 이름이 ‘뱀의 장’이라고 되어 있다. 한자로 뱀 ‘사(蛇)’자 ‘사품(蛇品)’으로 되어 있는데, 경의 중간중간 노래가사의 후렴처럼 “수행자는 이 세상 저 세상 다 버리는 것이 뱀이 묵은 허물을 벗는 것 같다.”는 말이 반복되고 있다.

“뱀의 독이 몸에 퍼지는 것을 약으로 치료하듯 치미는 화를 삭이는 수행자는 이 세상 저 세상을 모두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연못에 핀 연꽃을 물 속에 꺾듯이, 애욕을 말끔히 끊어버린 수행자는 이 세상(此岸) 저 세상(彼岸)을 다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안으로 성냄이 없고 밖으로 세상의 영고성쇠(榮枯盛衰)를 초월한 수행자는 이 세상을 다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유명한 말이 나온다. 출가수행자는 모든 데서 독립되어 세상 경계에 의지하는 곳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제2장 소품(小品)에는 부처님이 아들인 라훌라를 타이르는 말이 나온다. “라훌라야, 늘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너는 어진 이를 가볍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냐? 모든 사람을 위해 횃불을 비춰 주는 사람을 너는 존경하고 있느냐”라고 하시자, 라훌라는 “어진 이를 가볍게 보는 일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횃불을 비춰 주는 사람을 저는 항상 존경합니다”라고 대답한다. 또 부처님은 오욕(五欲)의 대상을 버리고 믿음으로 집을 떠나 괴로움을 없애는 사람이 되라고 한다.

제3장 대품(大品)에는 출가를 권장하는 이야기에서부터 정진행(精進行)을 강조하는 12개의 짤막한 경이 들어 있는데 <바삿타>에서는 인도의 카스트제도에서 나누어진 사성 계급에 대해 사성(四姓)이 본래 평등함을 설하여 계급 타파를 밝혀 놓기도 하였다.

또 많은 바라문들과 청년들이 부처님 말씀을 듣고 부처님께 귀의하는 장면들도 나온다. 부처님은 이들에게 때로 “눈이 있는 자 빛을 보리라”는 말로 수행에 대한 자신감과 용기를 북돋아 주신다. “눈이 있는 자 빛을 보리라”고 한 이 말은 부처님의 진리는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누구든지 눈이 있으면 사물을 보듯이 있는 그대로를 보게 된다는 뜻이다. 다만 어둠 속에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이 빛을 밝혀 어둠을 물리쳤으니 누구든지 보고 싶은 사람은 와서 보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제4장 의품(義品)은 여덟 편의 게송시(偈頌詩)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두 번째 이야기 <동굴>에서는 사람의 육신을 동굴에 비유하여 말하는데 “동굴 속에 머물러 집착하고 온갖 번뇌에 덮이어 미망 속에 빠져 있는 사람, 이러한 사람은 집착에서 벗어날 수 없다. 참으로 이 세상 욕망은 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라고 설하여 몸에 집착한 것이 동굴에 갇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또 <분노>에 대한 이야기로 이런 말이 나온다. “마음으로부터 화를 내고 남을 비방하는 사람이 있다. 또한 마음이 진실한 사람이라도 남을 비방하는 일이 있다. 비방하는 말을 들을지라도 성인은 그것에 동하지 않는다. 성인은 어떠한 일에도 마음이 거칠어지지 않는다.”

제5장 피안에 이르는 길(彼岸 道品)은 열여섯 명의 바라문들이 한 사람씩 부처님께 질문을 하고 부처님이 답해 주는 문답이 전개된다.

“존자 아지타(Ajita)가 물었다. 세상은 무엇으로 덮여 있습니까? 세상은 무엇 때문에 빛나지 않습니까? 세상을 더럽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커다란 공포는 무엇입니까?”

“스승은 대답하였다. 아지타여 세상은 무명의 어둠에 덮여 있다. 세상은 탐욕과 게으름 때문에 빛나지 않는다. 욕심은 세상의 때이고 고뇌는 세상의 커다란 공포라고 나는 말한다.”

제5장의 내용 중 제4장 의품(義品)만이 한역으로 번역되어 대장경에 수록되어 있고 전품이 한역되지 않았는데 한역된 별도의 경명(經名)이 『불설의족경(佛說義足經)』이다. 두 권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역자는 인도인 지겸(支謙)이 중국에 와서 오나라 초기 곧 3세기 초엽에 번역하였다.

지안스님강의. 월간반야 2002년 9월 (제2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