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강의 (7) 한 티끌 속에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한 티끌 속에 시방세계가 포함되고

모든 티끌 속에도 또한 그러하다.

이 두 구절은 현상계와 관련하여 법을 분별하는 대목이다.

우선 공간적인 차원에서 볼 때, 작은 티끌이 시방을 머금는다는 것은 공간의 크고 작은 한정(限定)이 없다는 것으로, 자성(自性)이 없는 까닭에 어느 것도 머무름이 없어 작은 것이 작은 것에 머물지 않고 큰 것이 큰 것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성에서는 크고 작은 차별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꿈에 본 물건은 큰 것과 작은 것도 있었지만, 꿈을 깨고 나서는 큰 것과 작은 것이 모두 없는 것처럼, 실상은 일체의 차별을 떠나 있기 때문에 작다고 하여도 작지 않고 크다고 하여도 크지 않아, 작은 것이 큰 것에 맞추어 지고 큰 것이 작은 것에 맞추어 지는 것이다.

마치 높은 산 위에 올라가서 멀리 내려다 볼 때 시야에 전개되는 광활한 경치가 눈동자 속에 모두 들어오듯이, 미진 속에 시방이 들어가는 것이다. 미진은 가장 작은 공간을 뜻하는 말이고, 시방(十方)은 공간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

잉불잡란격별성(仍不雜亂隔別成)

한량없는 먼 겁이 곧 한 생각이요,

한 생각이 곧 한량없는 겁이니

구세와 십세가 서로 붙어 있지만

뒤섞이지 않고 따로 따로 간격을 이루네.

이상의 네 구절은 시간을 통하여 법을 분별하는 내용이다.

겁(kalpa)은 시간의 가장 긴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계산할 수 없는 무한대의 시간이다. 일설에 4억3천2백년이라는 수치의 계산으로 나오는 시간을 가리킨다고 하지만, 지도론(智度論)에 나오는 개자겁(芥子劫)과 반석겁(磐石劫), 또는 진점겁(塵點劫)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현대의 시간단위로는 계산을 할 수 없는 시간이 겁(劫)이다.

즉 사방 40리와 높이 40리의 성에 개자씨를 가득 채워 놓고 100년마다 한 알씩을 가져가 개자씨가 모두 없어질 때까지를 1개자겁(芥子劫)이라 한다고 하였으며, 같은 이야기로 사방 40리와 높이 40리의 큰 반석을 엷은 옷깃으로 스침으로서 그 반석이 모두 닳아 없어질 때까지를 1반석겁(磐石劫)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 삼천대천세계를 먹으로 삼아 그 먹이 모두 닳도록 갈아서 만든 먹물을 1천 국토를 지날 때마다 한 방울씩 떨어뜨려 그 먹물이 다할 때까지를 1진점겁(塵點劫)이라 한다고 하였다.

한량없는 먼 겁(劫)을 한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과 순간이 똑같다는 말이다. 이처럼 찰나의 순간이 영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시간과 동서남북(東西南北). 사유상하(四維上下)의 모든 공간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대단한 메시지를 전하는 말이다.

오늘을 살고 있다는 것은 어제와 내일을 동시에 살고 있는 것이다. 존재의 본질에서 보는 실상의 모습은 시공을 초월하는 것이므로, 초월된 시공은 초월도지 아니한 현상계 상황 속의 시공을 전부 포함하는 것이다.

9세(九世)란 보통의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의 3시(時)로 나눈 뒤, 이 3시(時)를 다시 각각 3시(時)로 나누어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시제(時制)의 구분으로 움직이는 시간의 동태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 1념(一念)이라는 시간의 근본단위를 총합적인 의미로 추가하여 10세(十世)라고 한다. 9세는 그때 그때의 시간으로 구분될 수 있지만, 이러한 9세를 1념(一念)의 시간이 전체적으로 파악할 때, 모든 시간은 통일되며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법계도기총수록(法界道記叢隨錄)에는 꿈 속에서 5대(五代)가 지붕의 기와를 나르고 있는 일에 비유하여 9세를 설명하고 있다.

어떤 사람의 꿈 속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지붕 위에 올라가 있고, 아들과 손자는 밑에서 기와를 나르는데, 자신을 중간에서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여기서 할아버지는 과거이며, 과거는 오직 한 자리일 뿐이다. 아버지는 과거의 현재이며, 현재의 과거이므로 두 자리(二位)가 된다. 중간의 몸인 나는 과거의 미래요, 현재의 현재며, 미래의 현재이므로 세 자리(三位)를 갖추고 있다. 아들은 현재의 미래요, 미래의 현재이므로 두 자리(二位)를 갖춘다. 손자는 미래일 뿐이므로 한 자리(一位)이다.

이들 가운데 기와를 날라 주는 사람을 본위로 생각하면 나머지 8세도 모두 현재의 현재가 된다. 현재의 현재는 일념이라는 1세를 의미한다. 에릭슨(E.H.Erikson)의 “갓난 아이가 동시에 그의 노년을 살고, 현재의 노인이 동시에 그의 아기 시절을 살고 있다.”라는 말처럼, 우리가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는 것은 결코 현재 여기에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모든 존재는 영원 속에 존재한다는 의미가 된다.

요산 지안큰스님 강의. 월간반야 2007년 7월 제80호

법성게강의 (6) 진성은 참으로 깊고도 미묘하다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嶶妙)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진성은 참으로 깊고도 미묘하여

자성대로 있지 않고 연을 따라 달라지나니

위의 두 구절은 연기(緣起)의 체(體)를 설명하는 말이다. 원융무애한 법성이 현상계의 차별상을 전개하는 심오한 이치는 불가사의하다. 이것은 법성을 진성(眞性)이란 말로 바꾸어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에 의해 이해하는 차원에서 설명해 보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불교 교리의 주축을 이루는 것은 연기법(緣起法)이다. 연기(緣起)라는 말은 인연에 의해 일어난다는 뜻인데, 인연의 도리는 심오하여 깨달은 경계라야 체득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화장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화엄경에 미륵보살이 손가락을 퉁겨 누각의 문을 여는 장면이 나오는 것처럼, 진성의 심오한 문이 열려야 법계에 깨달아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것도 진성이 발현하여 인연을 따르는 것이요, 부처가 변하지 않는 것(不變)과 인연을 따르는 것(隨緣)의 도리가 있다. 이를 흔히 체(體)와 용(用)이라 설명한다. 본체와 본체가 일으키는 작용이 있기 때문에 일체 만법이 생성하여 변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심오하고 불가사의하다는 것이다.

쉽게 비유하여 말한다면, 날씨가 추워지면 물은 얼어서 얼음이 되고 따뜻해지면 녹아서 다시 물이 된다. 뿐만 아니라 그때그때의 기온의 상태에 따라 눈, 서리, 이슬, 안개, 비, 수증기, 아지랑이, 구름 등의 갖가지 형태로 변하여 달라지지만, 물의 본체 즉 H2O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본체가 작용을 일으키는 상태는 상황에 따라 무한히 달라진다. 왜 달라지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때문인데, 이것이 불가사의하고 심오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왜 자성(自性)은 연(緣)을 좇느냐 할 때, 일체법은 본래 자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설잠(雪岑) 김시습도 이 구절을 그렇게 설명하였다.

“일체법은 본래 자성이 없다. 또한 모든 자성은 본래 머무름이 없다. 머무름이 없으므로 고정된 주체가 없고, 고정된 주체가 없기 때문에 연(緣)을 따르는 데 장애가 없다. 연(緣)을 따르는 데 장애가 없기 때문에 자성을 고수할 수가 없고 시방삼세(十方三世)를 이룬다. 자성이란 제법(諸法)의 상(相)이 없는 본래 청정한 본체가 그것이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현상이 인연따라 나타난다는 것은 화엄경에서 설한 핵심요지의 하나이다. 이것은 제법(諸法)의 자성이 공(空)하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 어떤 현상이라도 체(體)와 용(用)의 관계에서 연기(緣起)되지만 고정된 모습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無)을 설하고 공(空)을 설한다.

또 화엄대의를 나타내는 유명한 4구게(句揭)의 하나인 “일체법잉 자성이 없는 줄 알아 이렇게 법성을 알면 곧 노사나불을 보리라‘()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성이 없음을 아는 것이 법을 통달하는 관문이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시방삼세(十方三世)가 이루어진다. 이것이 무(無)에서 유(有)가 나오는 도리이다. 시방은 공간이고 삼세는 시간인데, 시간과 공간이 있으면 존재의 상황이 전개된다. 그러나 이 존재의 상황은 본성의 당체가 무(無)의 상황, 즉 비존재의 상황이므로 근원적인 관점에서 보면 없음의 상태가 그 모체가 되는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에도 무(無)를 천하모(天下母)라고 표현하는 재미있는 말이 있다.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하나 가운데 일체요, 많은 가운데 하나며

하나가 곧 일체요, 많은 것이 곧 하나이다.

의상스님 자신의 과목설명에서는 위의 두 구절에 대해 다라니(다羅尼)의 이(理)와 용(用)을 설명하는 부분이라고 하였다. 다라니라는 말로써 이 대목을 설명하는 것은, 하나 속의 일체라는 말은 바로 다라니의 번역한 뜻인 총지(總持)의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총지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는 말로서 마치 그물을 당길 적에 그물을 한 쪽 코를 당기면 전체의 그물이 당겨 오듯이, 하나를 통하여 전체를 파악하며, 또 전체는 결국 하나의 범주 안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이(理)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는 항상 등치(等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구절은 앞의 구절인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의 뜻을 구체적으로 보충하여 설명하는 말이 된다. 연기법에서 나타나는 모든 상대적인 현상들이 자성을 고수하지 않는 무자성의 이치에서는 모두가 하나로 회통되며, 동시에 그 속에 모든 일체를 다 가지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를 들면, 열 개의 동전이 있을 적에 한 개가 두 개를 만들고 다시 세 개와 네 개 그리고 열 개를 만드는 것이다. 하나하나 헤아릴 적에는 모두 한 개이지만, 이것들을 합치면 열 개가 되는 것이다. 한 개가 있어서 열 개를 이루니, 한 개는 곧 열 개의 대역을 하게 된다. 또한 개체적으로 보는 하나의 사물은 언제나 전체의 의미가 된다는 뜻을 갖고 있다. 동전 하나가 돈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것은 동전의 열 개나 백 개가 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또한 앞의 두 구절은 인과도리(因果道理)와 덕용자재(德用自在)를 나타낸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어떤 하나의 결과가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하여 이루어졌을 때, 하나의 결과는 그 결과를 이룬 전체의 인연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因)과 과(果)가 함께 있으면서 인에서 과를 보고 과에서 인을 보는데, 이를 인과(因果)의 도리(道理)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에서 볼 때 이것이 곧 그것이요, 그것이 곧 이것이라고 하는 서로 상통하는 무애도리(無碍道理)가 생기는데, 이를 덕용자재문이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앞의 두 구절 가운데 하나는 ‘중(中)으로, 하나는 ’즉(卽)‘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를 물결에 비유하여 이쪽의 물결이나 저쪽의 물결은 모두 동일한 물 위에서 일어난 물결이며, 동풍이 일으킨 물결과 서풍이 일으킨 물결은 그 방향과 모양은 다르지만, 어떤 한 물결은 또 다른 물결 없이는 물결일 수 없는 것이다. 동풍에 의해 일어난 물결과 서풍에 의해 일어난 물결은 바람이라는 연(緣)을 따라 생긴 것일 뿐이다.

이와 같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홀로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서로의 상대적인 관계에 의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기(緣起)의 도리를 응용하여 하나와 전체의 관계를 설명해 놓은 대목인 것이다.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6월 제79호

법성게강의 (5)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습이 없다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습이 없으며

모든 것은 동요않고 본래 고요해

이름도 모양도 모두 끊어졌나니

깨달은 지혜로 아는 바라 다른 경지 아니네

이상의 4구는 스스로 안으로 증득한 자내증(自內證)의 경계를 천명해 놓은 내용이라고 한다. 즉 깨달음의 경지를 열어서 보여 주는 내용으로, 현시증분(顯示證分)이라고 과목한 이 분(分)은 깨달은 분상에서 보는 법성의 설명이다.

법성(法性)이란 범어 dharmata의 역어(譯語)로 법의 체성(體性), 즉 우주의 모든 현상이 지니고 있는 불변의 본성을 말한다. 가시 감각적 현상인 차별의 경계를 넘어서 있는 본체계(本體界)의 실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진여(眞如)를 달리 부르는 말이기도 한데, 진여법성(眞如法性) 혹은 진성(眞性)이라 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불성(佛性)이 생명체의 세계인 정보(正報) 또는 근신(根身) 쪽에서 하는 말이라면, 법성이라는 말은 무생물의 세계인 의보(依報) 혹은 기계(器界) 쪽에서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진여와 불성 그리고 법성은 모두 같은 말인데, 이들 용어를 어느 쪽에서 쓰느냐에 따라 용어 선택이 달라질 뿐이다.

법성(法性)을 법과 성으로 글자를 떼어 해석할 때, 법(法)은 제법(諸法)의 법으로 모든 존재의 상황을 함께 묶어 표현하는 말이 된다. 즉 현상 속에 전개되는 일체 만유의 차별상이며, 이 차별상을 에워싼 시간과 공간적인 상황의 전체가 범주에 모두 들어가는 것이다. 존재 자체와 존재하는 방법은 존재론적인 차원에서는 모두 법의 카테고리(category)에 들어간다.

이러한 법의 근원인 본래의 성품은 모든 상대적인 차별에서 벗어난 전일적(全一的)인 것으로서 원융무애 하다고 설명한 것이 첫 구의 뜻이다. 실제로 상대적인 차별로 보는 현상은 모두 가상일 뿐이다. 마치 거울 속에 비치는 모든 물체의 모습이 실물이 아닌 허상인 것처럼, 인연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현상계의 제상(諸相)은 모두 공(空)한 것이기 때문에 공(空)해진 자리에서 보면 이미 상(相)이 없는 것이므로 원융할 뿐이다.

또한 본래의 성품(性品)은 사물이 가지는 개체적인 성질을 떠나 있다. 가령 물의 성질은 적셔 주는 수분 성질이고 불의 성질은 태워버리는 뜨거운 성질이지만, 물과 불의 성질은 법성 안에서는 원융하게 하나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성의 당체는 피차의 이동이 없어 동요하지 않으며 고요할 뿐이다. 즉 시간적인 상황과 공간적인 상황을 초월한 것이므로 어떠한 상황의 전개에 의해 현상을 나타내는 것이 이전(以前)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어떠한 개념이 성립되지 않으며 관념화되기를 또한 거부한다. 이름과 모양이란 겉으로 파악하는 개념적이면서 관념적인 허사로 실상이 이치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꿈에 나타난 모습[몽경(夢境)]이 꿈을 꾸는 동안에는 있는 것 같지만 꿈을 깨고 나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없다’라는 경지 또한 깨달아야 알 수 있는 것이므로 4구에서는 ‘다른 경계가 아니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물론 여기서 안다는 것은 지적인 이해가 아닌 체험으로 얻어진 증오(證悟)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5월 제7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