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강의(10)수행자가 본제에 들어가려면

시고행자환본제(是故行者還本際)

파식망상필부득(叵息妄想必不得)

무연선교착여의(無緣善巧捉如意)

귀가수분득자량(歸家隨分得資糧)

그러므로 수행자가 본제에 돌아가려면

망상을 쉬지 않으면 되지를 않네

조건없는 선교방편 마음대로 잡아

집에 돌아가 능력따라 양식을 얻나니

이상의 4구는 수행의 방법을 설해 놓은 대목이다.

행자(行者)는 탄탄한 믿음을 가지고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인데, 일반적으로 말하는 구도자로서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킨 사람이다.

본제(본제)에 돌아간다는 것은 법성의 당체를 가리키는 본래의 자리라는 뜻을 지닌 깨달은 세계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즉 이것은 시간과 공간의 근원이 되는 자리로서 안으로 증독된 해인(海印)의 경계이며, 중생 모두가 가지고 있는 자신의 참성품 자리이기도 하는데, 중생이 여기에 돌아가면 부처로 전환된다. 그러나 여기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나’에 집착하는 망상이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면 무아(無我)의 이치를 통달해야 본제에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파(叵)는 불가(不可)의 뜻으로,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행자(行者)가 수행의 도중에 있어서 본제를 향해 앞으로 나가는 경우이다. 미래를 향해 수행을 진행하는 차원에서 파(叵)를 불가(不可)의 뜻으로 새기는 것이다.

그런데 종래의 해석에는 달리 해석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파(叵)를 ‘자못’이나 ‘마침내’ 의 부사로 새겨 망상을 쉬려고 할 것이 없다는 뜻으로 새긴 것이다. 이는 수행을 완성하여 본제에 돌아갔을 경우로서, 본제에 돌아가면 일체의 망상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고려시대 화엄의 대가인 균여대사는 이처럼 두 가지의 뜻으로 설명하였지만, ‘초발심시변정각’ 이라는 앞에 나온 구절의 인과(因果)와 동시적 의미에서 볼 때에는, 후자의 해석이 화엄교의에 더 적합한 것 같기도 하다.

무연(無緣)이란 관계의 매임이 없다는 말로서, 조건이 없음을 뜻한다. 무연대비(無緣大悲)라는 말이 있듯이, 무위심(無爲心)에서 실천되어지는 것은 모두 무연이 되는 것으로, 서양 신학에서 말하는 아가페(Agape)정신과 유사하다.

선교(善巧)란 방편을 잘 쓰는 훌륭한 솜씨를 일컫는 말이다.

여의(如意)를 잡았다는 말은 뜻대로 걸림없이 이룬다는 뜻으로, 순조로운 수행의 성취를 타내는 말이다.

집에 돌아간다는 것에서의 집은, 본제(本際) 즉 만유의 근원인 법성(法性)의 집을 말하며, 일체 중생들의 생명의 실상 자리에 돌아간다는 뜻이다.

자량(資量)은 생명을 보존하는 양식인데, 수행의 공덕을 이루는 여러 가지의 실천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11월 제84호

법성게강의 (9) 이(理)와 사(事)가 명연하여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

십불보현대인경(十佛普賢大人境)

이(理)와 사(事)가 명연하여 분별이 없으니

십불(十佛)과 보현, 대인의 경지로다.

위의 두 구절은 연기분(緣起分)의 결론에 해당되는 대목인데, 이(理)와 사(事)의 통일된 경지를 부처의 경계와 보현의 경계로 설명하였다. 본질적 차원에서 보는 이치적인 면을 이(理)라고 하며, 현상적인 차원에서 나타나는 사실적인 면을 사(事)라고 한다.

즉 화엄교의에 나오는 사법계설(四法界設) 가운데 이법계(理法界), 사법계(事法界),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의 이(理)와 사(事)이다.

<탐현기>의 ‘금사자장(金獅子章)’에 나오는 이(理)와 사(事)의 설명을 예로 들어보면, 순금으로 만든 사자를 사자의 모양으로 보면서 머리와 다리 등 몸의 각 부분을 구별해 보는 것은 사(事)이고, 머리든 꼬리든 모두 순금인 줄 알고 금사자 전체를 순금으로 보는 것은 이(理)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이(理)와 사(事)의 설명으로, 불법수행의 과정에서 살펴본다면 깨달음의 진리를 체험한 내면적인 경계는 이(理)가 되며, 외향적인 교화활동의 구체적인 사실들은 사(事)가 되는 것이다.

<법기(法記)>에서는 생사와 열반의 성(性) 없음이 이(理)이고, 이처럼 성(性))없는 생사와 열반 자체는 곧 사(事)라 하였다. 즉 일체법이 무자성(無自性)이라는 성(性)없는 면은 이(理)요, 이처럼 성(性)없는 무자성(無自性)에서 연기되는 제법의 현상은 사(事)인 것이다.

또한 십불(十佛)은 이(理)에 해당하고, 보현(普賢)은 사(事)에 해당한다. 십불은 화엄경에서 부처님의 경계를 10가지의 면으로 나눈 뒤 의인화(擬人化)시켜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해경십불(解境十佛)과 행경십불(行境十佛)이 있다.

지엄스님이 쓴 <화엄공목장(華嚴孔目章)>에 의하면, 차별이 없는 평등한 진리를 지혜로써 관조할 때 온 법계가 모두 부처로 보이는 것을 해경십불이라고 말하는데 이를 중생신, 국토신, 업보신, 성문신, 벽지불신, 보살신, 여래신, 지신(智身), 법신, 허공신 등의 열 가지로 나눈다.

또 행경십불은 수행이 완성된 후에 얻은 부처님의 경계를 10가지로 분류하여 말하는 것으로, 정각불, 원불, 업보불, 주지불, 화불, 법계불, 심불, 삼매불, 성불(性佛), 여의불이며, 이것은 해경의 여래신을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다.

이 십불설은 모두 부처님의 깨달은 지혜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를 이(理)에 해당된다고 한다. 화엄경에서 보현의 행원으로 설명하며 중생제도를 위한 이타행으로 실천화될 때 나타나는 자비의 덕용은 사(事)이다. 그리고 이(理)와 사(事)가 둘이 아니라는 것은 지혜와 자비가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능인해인삼매중(能仁海印三昧中)

번출여의부사의(繁出如意不思議)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

능인이 해인삼매 가운데에서

여의 부사의를 치성(熾盛)하게 드러내어

허공 가득히 보배비 내려 중생을 이익되게 하니

중생들은 그릇따라 이익을 얻네.

이 대목부터는 이타행을 설해 나가고 있는 것으로, 즉 부처님이 중생들을 이익되게 한다는 내용이다.

능인(能仁)은 부처님의 존칭 중 하나이며, 중생을 교화하여 제도하는 능력이 어질게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먼저 능인이 해인삼매 속에서 모든 것을 뜻대로 되게 하는 여의보(如義寶)의 불가사의한 공덕을 힘차게 솟구쳐 내어 온 허공에 보배의 법비를 내려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고 하였다.

해인삼매(海印三昧)란 부처님이 화엄경을 설하기 전에 들게 되었던 삼매의 이름으로, 도장에 문자가 새겨진 것처럼 밝고 고요한 바다에 만상(萬像)의 영상이 비춰진 것을 뜻한다. 이는 앞서 말한 십불(十佛)의 내자증(內自證)의 경계로, 이 해인삼매에 의하여 이타원력(利他願力)이 일어나는 것이다. 해인 속에 참된 자리(自利)와 이타가 들어 있다. 이러한 자리와 이타는 동시적인 것으로 이타 속에 자리가 있고, 자리 속에 이타가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이타(利他)를 중생이 받을 때에는 바로 부처님의 은혜가 되는 것으로, 태양의 광명이 온 세상에 꽉 차 법계에 충만해 있듯이, 산천초목을 적셔 주는 빗물처럼 중생을 적셔 주는 법우(法雨)가 되어 내리고 있어, 중생들의 근기(根機)인 그릇의 크기에 따라 법수(法水)를 받아 담게 된다는 것이다.

화엄의 대가인 통현(通玄)장자의 게송에 “불시중생실리불(佛是衆生心裏佛)이요, 수자근감무이물(隨自根堪無異物)이니라, 욕지일체제불원(欲知一切諸佛源)인데, 오자무명본시불(悟自無明本是佛)이니라”라는 말이 있는데, 중생의 마음은 그 근기의 정도에 따라 부처를 나타낼 뿐 다른 것이 없으며, 스스로의 무명을 깨달으면 이것이 바로 부처라고 하였다. 즉 부처의 근원은 중생의 무명이라는 말이다.

또한 화엄경 경문에는 “마음과 부처 그리고 중생은 차별이 없다”라고 해 중생자체가 바로 부처라고 하였다. 따라서 부처님의 이타 역시 중생의 이타가 되는 것이며, 이러한 이타를 수반하여 자리를 닦아 나가는 것을 불도 수행이라고 할 것이다.

소경이 밝은 해를 보지 못하듯이, 믿음이 없는 중생은 부처를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그에게도 부처님의 감로법문은 열려 있다.

그릇이 없이는 샘물을 퍼 담아 올 수 없듯이, 신근이 갖춰지지 아니하면 법문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용수보살(Nagarjuna)은, 불법의 큰 바다는 믿음으로 들어와서 지혜로 건너간다고 하였다.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10월 제83호

법성게강의 (8) 처음발심할때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

처음 발심할 때에 바로 깨달음을 이루며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 하네.

이 대목은 수도(修道)의 단계에 의해 법을 분별하는 내용이다.

일체의 법에는 자성이 없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의 고유성을 지니는 어떤 것도 없다는 것으로, 이것이 화엄철학의 요지이다. 이것은 모든 시간적 상황과 공간적 상황의 한계를 벗어버린 원융무애(圓融無碍)한 법성의 입각하여 하는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시간의 선후(先後)나 공간의 원근(遠近)이 모두 한 점에서 만난다. 또한 인과가 동시에 갖추어지며, 상대적 차별은 하나 속에 합쳐지는 것이다.

처음 발심할 때는 수도의 시작이며, 정각은 완성된 결과로, 이것이 동시라는 것이요, 생사의 경계에서 발심하여 정각을 이루면 열반은 얻게 되는 것인데, 이는 수행의 시작과 끝의 선후가 상대적으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은 생사에 처하면서 열반에 머물며, 열반에 머물면서 ㅅ애사에 노니는 것이라는 말이다. 또한 자성이 없는 이치에서 보면 생사도 공(空)한 것이요 열반도 공(空)한 것으로, 생사와 열반의 정체가 같다는 것이며, 동일한 선상에서 함께 공존한 다는 것이다.

고래(古來)의 해석에서 무엇이 생사이며 무엇이 열반이냐 물어 놓고, 생사도 너의 몸이요 열반도 너의 몸이라고 하는 말이 있다. 즉 어떠한 개념으로 조립된 대상으로서의 생사나 열반이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대승의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생사를 버리고 열반을 구하는 취사선택적인 수행이 소승이라면, 대승은 모든 것을 회통하여 하나로 보는 수행의 가풍을 가지고 있다. 생사의 열반이 하나인 것이 대승이 된다는 말이다.

요산 지안 큰스님글. 월간반야 2007년 9월 제8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