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문>
선남자여, 설법하여 주시기를 청한다는 것은 온 법계, 허공계, 시방삼세의 부처님 국토에 있는 작은 티끌의 하나하나 티끌 속에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부처님 국토의 작은 티끌 수만큼의 부처님이 계시며, 낱낱의 부처님 국토 가운데 생각마다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부처님 국토의 작은 티끌 수 부처님이 등정각을 이루시고 보살들로 둘리워 계시거든, 내가 모두 몸으로, 입으로, 뜻으로 가지가지 방편으로 은근히 설법하여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니라.
이렇게 하여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하여도, 내가 항상 일체 모든 부처님께 정법을 설해 주시기를 청함은 다함이 없어, 생각마다 계속하여 끊임없이 하여 몸과 말과 뜻으로 하는 일에 조금도 지치거나 싫증을 내지 않고 하는 것이니라.
<풀이>
부처님께 설법을 청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겠다는 뜻이다. 법을 배워 법을 알아야 나를 제도하고 남을 제도할 수 있는 것이므로, 자나깨나 부처님 설법을 듣고 싶어하며, 법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이 원은 수행의 근본정신이 법에 입각하여 있는 것임을 나타내 놓았다.
이 세상 모든 것에서 법이 설해지고 있다. 물소리 바람 소리도 설법하는 법음이라 한다. 뿐만 아니라 산하대지의 모습 자체가 부처님의 법신이므로, 말없는 법이 우리들 귀에 들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을 법으로 듣지 못하는 것이 바로 중생의 미혹이다. 이 미혹을 걷을 수 있는 시발은 보리심을 발하여 법을 구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법문을 언제나 한결같이 듣고자 하는 마음을 한시도 놓쳐서는 안 된다. 불교 수행에는 세 가지 지혜를 닦는다는 법문이 있다. 『능엄경』에 나오는 ‘문혜, 사혜, 수혜’의 이야기로, 우선 법을 들음으로써 얻는 지혜가 있고, 다음에는 들은 것을 계기로 하여 생각하여 생기는 지혜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각하던 것을 실천함으로써 얻는 지혜가 있다. 이러한 세 가지의 지혜를 통하여 구경에 불지를 이루게 된다. 경의 본문에서 미진 수 국토의 미진 수 부처님께 법륜을 굴려 주시기를 청한다고 하였다. 부처님의 법문을 하나도 남김없이 죄다 모두 들어 법을 듣는 법희가 충만한 생활을 계속하여 그 속에서 안락을 누리는 것이 보현행원을 실천하는 자의 생활 태도다.
부처님이 과거 전생에 설산동자가 되어 법을 듣고자 나찰에게 몸을 보시하였다는 설화가 있는데 진실한 마음으로 법을 구하는 자는 한 마디 법문을 듣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지극한 마음이 되어 법을 위하여 몸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한편 설법을 듣고자 한다는 것은 내 삶의 참된 의미를 바로 알겠다는 것이며 인생의 길을 올바르게 가고 방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차의 바퀴가 길을 따라 굴러가듯이 법의 바퀴가 굴리어지는 대로 가는 길이 가장 확실하고 좋은 길이라는 뜻이 있는 말이 법륜이라는 말이다.
원래 법의 바퀴를 굴린다는 말은 사천왕이 가지고 있다는 윤보에서 나온 말이다. 사천왕이 윤보를 굴려서 길을 닦는데 개울을 메우고 울퉁불퉁한 곳을 평탄하게 하며 대지에 나타나는 일체의 장애를 없애는 일에 법을 설하여 중생의 번뇌와 교만 따위의 그릇된 악습을 고쳐주는 것을 비유하여 법륜을 굴린다고 표현되어 나온다. 따라서 법륜을 굴리기를 청하는 것이 나의 번뇌를 없앨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뜻이다.
인류사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성을 성숙시켜주는 설법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모든 성인들이 세상에 출현한 이유가 바로 법을 설해 주기 위해서이다. 더구나 정법이 구현되지 않는 사회는 설법이 부재한 세계로 곧 암흑의 세계가 되고 마는 것이다.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할 때까지 설법을 청한다는 경의 말씀은 예사로운 말이 아니다. 사실 이 세상은 법에 의하여 꽉 차 있다. 어디에도 법이 없는 곳이 없으며 두루 충만해 있다. 그러나 중생의 마음에 보리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법이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이 살아 움직이고 많은 중생에게 법의 은혜를 입히기 위해서는 법의 문이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설법을 청하는 것의 법의 문, 법을 갈무리하고 있는 보고의 문을 여는 일이다. 진리의 태양이신 부처님을 향하여 은혜를 받고 갚아야 하는 의무가 목숨 받아 태어난 모든 사람들에게 다 있는 것이다. 법을 듣는 것을 음식을 먹는 것에 비유하여 법식을 먹는다고 하기도 한다. 육체를 보육 유지시키기 위해서 밥을 먹듯 법식을 먹고 실상 생명인 법신을 수용하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다. 부처님의 법문을 많이 들으면 업화의 불길을 소멸시키고 청량한 감로의 맛을 얻게 된다. 한량없는 법문을 모두 배우리라는 사홍서원의 말처럼 법을 위하여 생애를 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1월 제5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