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행원품 (10) – 청전법륜원

<경문>

선남자여, 설법하여 주시기를 청한다는 것은 온 법계, 허공계, 시방삼세의 부처님 국토에 있는 작은 티끌의 하나하나 티끌 속에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부처님 국토의 작은 티끌 수만큼의 부처님이 계시며, 낱낱의 부처님 국토 가운데 생각마다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부처님 국토의 작은 티끌 수 부처님이 등정각을 이루시고 보살들로 둘리워 계시거든, 내가 모두 몸으로, 입으로, 뜻으로 가지가지 방편으로 은근히 설법하여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니라.

이렇게 하여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하여도, 내가 항상 일체 모든 부처님께 정법을 설해 주시기를 청함은 다함이 없어, 생각마다 계속하여 끊임없이 하여 몸과 말과 뜻으로 하는 일에 조금도 지치거나 싫증을 내지 않고 하는 것이니라.

<풀이>

부처님께 설법을 청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겠다는 뜻이다. 법을 배워 법을 알아야 나를 제도하고 남을 제도할 수 있는 것이므로, 자나깨나 부처님 설법을 듣고 싶어하며, 법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이 원은 수행의 근본정신이 법에 입각하여 있는 것임을 나타내 놓았다.

이 세상 모든 것에서 법이 설해지고 있다. 물소리 바람 소리도 설법하는 법음이라 한다. 뿐만 아니라 산하대지의 모습 자체가 부처님의 법신이므로, 말없는 법이 우리들 귀에 들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을 법으로 듣지 못하는 것이 바로 중생의 미혹이다. 이 미혹을 걷을 수 있는 시발은 보리심을 발하여 법을 구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법문을 언제나 한결같이 듣고자 하는 마음을 한시도 놓쳐서는 안 된다. 불교 수행에는 세 가지 지혜를 닦는다는 법문이 있다. 『능엄경』에 나오는 ‘문혜, 사혜, 수혜’의 이야기로, 우선 법을 들음으로써 얻는 지혜가 있고, 다음에는 들은 것을 계기로 하여 생각하여 생기는 지혜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각하던 것을 실천함으로써 얻는 지혜가 있다. 이러한 세 가지의 지혜를 통하여 구경에 불지를 이루게 된다. 경의 본문에서 미진 수 국토의 미진 수 부처님께 법륜을 굴려 주시기를 청한다고 하였다. 부처님의 법문을 하나도 남김없이 죄다 모두 들어 법을 듣는 법희가 충만한 생활을 계속하여 그 속에서 안락을 누리는 것이 보현행원을 실천하는 자의 생활 태도다.

부처님이 과거 전생에 설산동자가 되어 법을 듣고자 나찰에게 몸을 보시하였다는 설화가 있는데 진실한 마음으로 법을 구하는 자는 한 마디 법문을 듣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지극한 마음이 되어 법을 위하여 몸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한편 설법을 듣고자 한다는 것은 내 삶의 참된 의미를 바로 알겠다는 것이며 인생의 길을 올바르게 가고 방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차의 바퀴가 길을 따라 굴러가듯이 법의 바퀴가 굴리어지는 대로 가는 길이 가장 확실하고 좋은 길이라는 뜻이 있는 말이 법륜이라는 말이다.

원래 법의 바퀴를 굴린다는 말은 사천왕이 가지고 있다는 윤보에서 나온 말이다. 사천왕이 윤보를 굴려서 길을 닦는데 개울을 메우고 울퉁불퉁한 곳을 평탄하게 하며 대지에 나타나는 일체의 장애를 없애는 일에 법을 설하여 중생의 번뇌와 교만 따위의 그릇된 악습을 고쳐주는 것을 비유하여 법륜을 굴린다고 표현되어 나온다. 따라서 법륜을 굴리기를 청하는 것이 나의 번뇌를 없앨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뜻이다.

인류사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성을 성숙시켜주는 설법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모든 성인들이 세상에 출현한 이유가 바로 법을 설해 주기 위해서이다. 더구나 정법이 구현되지 않는 사회는 설법이 부재한 세계로 곧 암흑의 세계가 되고 마는 것이다.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할 때까지 설법을 청한다는 경의 말씀은 예사로운 말이 아니다. 사실 이 세상은 법에 의하여 꽉 차 있다. 어디에도 법이 없는 곳이 없으며 두루 충만해 있다. 그러나 중생의 마음에 보리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법이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이 살아 움직이고 많은 중생에게 법의 은혜를 입히기 위해서는 법의 문이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설법을 청하는 것의 법의 문, 법을 갈무리하고 있는 보고의 문을 여는 일이다. 진리의 태양이신 부처님을 향하여 은혜를 받고 갚아야 하는 의무가 목숨 받아 태어난 모든 사람들에게 다 있는 것이다. 법을 듣는 것을 음식을 먹는 것에 비유하여 법식을 먹는다고 하기도 한다. 육체를 보육 유지시키기 위해서 밥을 먹듯 법식을 먹고 실상 생명인 법신을 수용하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다. 부처님의 법문을 많이 들으면 업화의 불길을 소멸시키고 청량한 감로의 맛을 얻게 된다. 한량없는 법문을 모두 배우리라는 사홍서원의 말처럼 법을 위하여 생애를 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1월 제50호

보현행원품 (1) – 강의에 들어가며

보현행원품은 궤빈국 삼장법사 반야가 왕명을 받고 번역한 경전이다. 본래 명칭은 『대방광불 화엄경 부사의 해탈경계 보현행원품』이다. 화엄 삼역 중에, 반야삼장이 번역한 40권 본은 불타발타라가 번역한 60권 진역이나 실차난타가 번역한 80권 당역의 입법계품에 해당한다. 보현행원품은 반야삼장 역의 40화엄에 들어 있다. 주인공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에 의해 보리심을 발하여 53선지식을 찾아가 법을 묻는데, 그 질문은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며, 어떻게 보살행을 닦느냐’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보살행을 묻기 위해 선재는 53선지식을 찾아갔다는 말이다.

선재의 방문을 받은 선지식들은 선재의 물음에 누구도 완전한 답을 주지 못한다. 모두가 자기가 체험한 부분적인 이야기만 하고, 다른 선지식을 소개하면 거기에 찾아가서 물어보라고 한다. 도대체 보살행이 무엇이기에 53명의 선지식들이 거기에 대한 충분한 답을 못해 주는 것일까.

보살행은 불교의 수생을 대승적 차원에서 총괄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이 보살행을 간단히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선재는 마지막으로 만난 보현보살로부터 보살행 완성의 법문을 듣는다. 보현보살은 10가지 행원을 설하여 그것으로 인해 부처님 공덕을 성취할 수 있다고 선재에게 말한다. 이른바 보현의 10종 광대행원은 불교의 수행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되어져야 하는가를 가장 쉽고도 심도있게 설해 놓은 법문이다.

과거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보현보살의 행원을 특별히 중요하게 여겨, 방대한 『화엄경』에서 따로 분리시켰다. 그것의 한 품을 별도로 간행·유포하여 불자들로 하여금 수지독송케 했다. 이는 대승불교의 근본정신인 보살정신의 극치를 보현행원을 통해 보여주고, 이를 본받게 하기 위해서이다. 동시에 이 보현행원품은 불교의 신행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장 구체적이고도 쉽게 밝히면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교리적 이론보다 실천적이고 극진한 신행의 마음이 어떻게 우러나는가를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0종의 행원 하나마다 그 행원의 실천을 지극한 정성을 기울여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할 때까지 해야하며, 그 생각이 끊어져도 아니되며, 뿐만아니라 몸과 말과 뜻으로 하는 일에 조금도 지치거나 싫증을 내지 않아야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10종행원을 실천하는 공덕이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점과 이 10종행원을 듣고, 읽고, 외우고, 남을 위해 설해주는 사람의 공덕이 어떠한가도 설명하고, 누구든지 이 행원을 수지하는 사람은 마침내 생사를 벗어나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됨을 밝혔다.

본문에 이어서 본문의 뜻을 요약한 게송이 나오고, 마지막으로 선재동자를 비롯한 모든 대중이 보현행원의 법문을 받들어 행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화엄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내려온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화엄종지의 선양차원에서 이 보현행원의 실천을 특별히 중요시했다. 고려시대 군여스님은 이 『보현행원품』을 바탕으로

「보현십종원왕가」를 지어 서민사회에 유포시켰다. 이 향가는 국문학사상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예불대참회문」도 『보현행원품』을 근거로 만들어졌다. 선종에서는 이 참회문을 외우며, 매일 저녁 108배의 참회절을 하는 것을 일과로 삼기도 했다.

보현행원의 참뜻은 ‘중생의 생명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생명의 발전이란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중생의 삶이란 중생이라는 말에서부터 나타나듯이, 공동의 삶으로 서로의 공영이 보장되도록 살자는 것이다. 속된 말로 너죽고 나죽고의 이기적 싸움이 아닌, 나도 살고 너도 살자는 것이다. 말하자면, 상생의 삶을 살아 모든 중생 전체가 조화롭고 평화로움을 유지하는 것이다. 생명이 생명을 해치는 것이 가장 나쁜 저질의 업이다.

이 업이 중생 상호간에 장애를 주지않게 자신의 그릇된 업을 극복하여, 자비의 마음, 대비의 마음으로 남을 대하고, 이 마음에 입각한 자비행, 대비행을 보다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생활을 할 때, 성숙된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 보현행원에 나타나는 정신이다. 비(悲)의 윤리를 내세우는 불교에 있어서, 보현행원을 능가하는 정신은 없다. 보현의 행원에 들어가지 않고는 부처님 자비의 진면목을 볼 수 없다. 마치 물 속에 들어가지 않고는 목욕할 수 없는 것처럼, 자비의 강물 속에 들어가야 부처님의 자비가 내 몸에 와 닿는 것이다.

전쟁과 테러의 공포가 지구촌을 덮고 있는 이 시대, 자칫 인간성 실종의 위기가 오고 있는지도 모를 어두운 시절을 보현의 정신을 되살림으로써 밝은 희망을 걸 수 있지 않을까? 보현행원은 인생의 아름다운 연출이다.

지안스님 강의. 월간반야 2004년 4월. 제41호

법성게강의(끝)다라니의 다함없는 보배로써

이다라니무진보(以陀羅尼無盡寶)

장엄법계실보전(莊嚴法界實寶殿)

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際中道床)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

다라니의 다함없는 보배로써

법계의 실다운 보배 궁전을 장엄하고

마침내 실제 중도의 자리에 앉으니

예부터 움직임이 없는, 그 이름 부처이네.

이것은 수행의 이익을 밝혀 전문(全文)을 마무리한 마지막 4구로서, 수행의 이익은 결국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던 부처의 성품을 계발하여 부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다라니란 모든 선법을 구족한 한량없는 공덕장(功德藏)을 밀교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즉 마음의 근원(根源)에 갖추어진 비밀스런 공덕으로 일체의 악을 차단하여 순수하고 참되어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것은 한없는 이익을 발생케 하여온 세상을 부처의 세계로 꾸며 놓은 것이다.

법계의 실보전(實寶殿)은 부처가 거처하는 궁전이다. 이는 법성의 자리를 공간적으로 수식한 말인데, 여기에서는 모든 상대적인 차별을 뛰어넘어 만법이 하나로 회통되는 중도의 진리가 일승(一乘)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 일승은 진리의 궁극으로 만법의 참된 근원이다. 그리고 이러한 참된 근원은 본래부터 어떠한 변화나 이동이 생길 수 없는 것이다. 알고보면 본래의 제 모습이었던 것인데, 근원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비로소 그러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지로서 “실상(實相)은 이언(離言)이요, 진리(眞理)는 비동(非動)이라”고 한 말처럼, 고요하고 동요가 없어서 본래부터 여여한 그 모습이 부처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동서남북을 내왕하며 돌아다녔는데, 잠을 깨고 보니 정작 자신을 움직이지 않았고 잠자리에 누워 있었을 뿐 이었다. 꿈 속에서는 이곳 저곳으로 다녔으나 깨고 보니 오고 간 일이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깨닫기 전의 중생이나 깨달은 뒤의 부처는 본질적인 근원에서 볼 때에는 다른 것이 없는 것으로, 마치 돌 속에 들어 있는 금과 순금으로 제련된 금이 그 성분에서 다르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번뇌와 망상 그리고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속에서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잃고 있다가, 번뇌와 망상을 끓고 아집과 법집을 여의고 보니 본래의 자신의 모습이 회복되어 나타났을 뿐, 번뇌와 집착을 가지고 있던 나(吾)를 떠난 별개의 나(吾))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깨달음은 자기의 참된 성품자리에 돌아가는 복귀요, 또한 그것을 회복하는 일이다. 법성의 그윽한 이치는 불변(不變)과 수연(隨緣)으로 설명되면서, 인연을 따라 변화하는 모든 법을 근원에 돌아가서 보면 변화되지 않는 불변의 바탕이 되어 고금(古今)을 꿰뚫고 동서(東西)를 관통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도 감이 없는 것이요, 와도 옴이 없는 것이다. 의상스님은 이것을 “행행본처(行行本處) 지지발처(至至發處)” 라고 설명하였다.

“가도 가도 본래 자리요, 이르고 이르러서도 출발한 그 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