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행원품 (1) – 강의에 들어가며

보현행원품은 궤빈국 삼장법사 반야가 왕명을 받고 번역한 경전이다. 본래 명칭은 『대방광불 화엄경 부사의 해탈경계 보현행원품』이다. 화엄 삼역 중에, 반야삼장이 번역한 40권 본은 불타발타라가 번역한 60권 진역이나 실차난타가 번역한 80권 당역의 입법계품에 해당한다. 보현행원품은 반야삼장 역의 40화엄에 들어 있다. 주인공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에 의해 보리심을 발하여 53선지식을 찾아가 법을 묻는데, 그 질문은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며, 어떻게 보살행을 닦느냐’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보살행을 묻기 위해 선재는 53선지식을 찾아갔다는 말이다.

선재의 방문을 받은 선지식들은 선재의 물음에 누구도 완전한 답을 주지 못한다. 모두가 자기가 체험한 부분적인 이야기만 하고, 다른 선지식을 소개하면 거기에 찾아가서 물어보라고 한다. 도대체 보살행이 무엇이기에 53명의 선지식들이 거기에 대한 충분한 답을 못해 주는 것일까.

보살행은 불교의 수생을 대승적 차원에서 총괄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이 보살행을 간단히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선재는 마지막으로 만난 보현보살로부터 보살행 완성의 법문을 듣는다. 보현보살은 10가지 행원을 설하여 그것으로 인해 부처님 공덕을 성취할 수 있다고 선재에게 말한다. 이른바 보현의 10종 광대행원은 불교의 수행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되어져야 하는가를 가장 쉽고도 심도있게 설해 놓은 법문이다.

과거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보현보살의 행원을 특별히 중요하게 여겨, 방대한 『화엄경』에서 따로 분리시켰다. 그것의 한 품을 별도로 간행·유포하여 불자들로 하여금 수지독송케 했다. 이는 대승불교의 근본정신인 보살정신의 극치를 보현행원을 통해 보여주고, 이를 본받게 하기 위해서이다. 동시에 이 보현행원품은 불교의 신행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장 구체적이고도 쉽게 밝히면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교리적 이론보다 실천적이고 극진한 신행의 마음이 어떻게 우러나는가를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0종의 행원 하나마다 그 행원의 실천을 지극한 정성을 기울여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할 때까지 해야하며, 그 생각이 끊어져도 아니되며, 뿐만아니라 몸과 말과 뜻으로 하는 일에 조금도 지치거나 싫증을 내지 않아야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10종행원을 실천하는 공덕이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점과 이 10종행원을 듣고, 읽고, 외우고, 남을 위해 설해주는 사람의 공덕이 어떠한가도 설명하고, 누구든지 이 행원을 수지하는 사람은 마침내 생사를 벗어나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됨을 밝혔다.

본문에 이어서 본문의 뜻을 요약한 게송이 나오고, 마지막으로 선재동자를 비롯한 모든 대중이 보현행원의 법문을 받들어 행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화엄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내려온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화엄종지의 선양차원에서 이 보현행원의 실천을 특별히 중요시했다. 고려시대 군여스님은 이 『보현행원품』을 바탕으로

「보현십종원왕가」를 지어 서민사회에 유포시켰다. 이 향가는 국문학사상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예불대참회문」도 『보현행원품』을 근거로 만들어졌다. 선종에서는 이 참회문을 외우며, 매일 저녁 108배의 참회절을 하는 것을 일과로 삼기도 했다.

보현행원의 참뜻은 ‘중생의 생명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생명의 발전이란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중생의 삶이란 중생이라는 말에서부터 나타나듯이, 공동의 삶으로 서로의 공영이 보장되도록 살자는 것이다. 속된 말로 너죽고 나죽고의 이기적 싸움이 아닌, 나도 살고 너도 살자는 것이다. 말하자면, 상생의 삶을 살아 모든 중생 전체가 조화롭고 평화로움을 유지하는 것이다. 생명이 생명을 해치는 것이 가장 나쁜 저질의 업이다.

이 업이 중생 상호간에 장애를 주지않게 자신의 그릇된 업을 극복하여, 자비의 마음, 대비의 마음으로 남을 대하고, 이 마음에 입각한 자비행, 대비행을 보다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생활을 할 때, 성숙된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 보현행원에 나타나는 정신이다. 비(悲)의 윤리를 내세우는 불교에 있어서, 보현행원을 능가하는 정신은 없다. 보현의 행원에 들어가지 않고는 부처님 자비의 진면목을 볼 수 없다. 마치 물 속에 들어가지 않고는 목욕할 수 없는 것처럼, 자비의 강물 속에 들어가야 부처님의 자비가 내 몸에 와 닿는 것이다.

전쟁과 테러의 공포가 지구촌을 덮고 있는 이 시대, 자칫 인간성 실종의 위기가 오고 있는지도 모를 어두운 시절을 보현의 정신을 되살림으로써 밝은 희망을 걸 수 있지 않을까? 보현행원은 인생의 아름다운 연출이다.

지안스님 강의. 월간반야 2004년 4월. 제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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