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라니무진보(以陀羅尼無盡寶)
장엄법계실보전(莊嚴法界實寶殿)
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際中道床)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
다라니의 다함없는 보배로써
법계의 실다운 보배 궁전을 장엄하고
마침내 실제 중도의 자리에 앉으니
예부터 움직임이 없는, 그 이름 부처이네.
이것은 수행의 이익을 밝혀 전문(全文)을 마무리한 마지막 4구로서, 수행의 이익은 결국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던 부처의 성품을 계발하여 부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다라니란 모든 선법을 구족한 한량없는 공덕장(功德藏)을 밀교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즉 마음의 근원(根源)에 갖추어진 비밀스런 공덕으로 일체의 악을 차단하여 순수하고 참되어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것은 한없는 이익을 발생케 하여온 세상을 부처의 세계로 꾸며 놓은 것이다.
법계의 실보전(實寶殿)은 부처가 거처하는 궁전이다. 이는 법성의 자리를 공간적으로 수식한 말인데, 여기에서는 모든 상대적인 차별을 뛰어넘어 만법이 하나로 회통되는 중도의 진리가 일승(一乘)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 일승은 진리의 궁극으로 만법의 참된 근원이다. 그리고 이러한 참된 근원은 본래부터 어떠한 변화나 이동이 생길 수 없는 것이다. 알고보면 본래의 제 모습이었던 것인데, 근원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비로소 그러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지로서 “실상(實相)은 이언(離言)이요, 진리(眞理)는 비동(非動)이라”고 한 말처럼, 고요하고 동요가 없어서 본래부터 여여한 그 모습이 부처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동서남북을 내왕하며 돌아다녔는데, 잠을 깨고 보니 정작 자신을 움직이지 않았고 잠자리에 누워 있었을 뿐 이었다. 꿈 속에서는 이곳 저곳으로 다녔으나 깨고 보니 오고 간 일이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깨닫기 전의 중생이나 깨달은 뒤의 부처는 본질적인 근원에서 볼 때에는 다른 것이 없는 것으로, 마치 돌 속에 들어 있는 금과 순금으로 제련된 금이 그 성분에서 다르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번뇌와 망상 그리고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속에서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잃고 있다가, 번뇌와 망상을 끓고 아집과 법집을 여의고 보니 본래의 자신의 모습이 회복되어 나타났을 뿐, 번뇌와 집착을 가지고 있던 나(吾)를 떠난 별개의 나(吾))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깨달음은 자기의 참된 성품자리에 돌아가는 복귀요, 또한 그것을 회복하는 일이다. 법성의 그윽한 이치는 불변(不變)과 수연(隨緣)으로 설명되면서, 인연을 따라 변화하는 모든 법을 근원에 돌아가서 보면 변화되지 않는 불변의 바탕이 되어 고금(古今)을 꿰뚫고 동서(東西)를 관통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도 감이 없는 것이요, 와도 옴이 없는 것이다. 의상스님은 이것을 “행행본처(行行本處) 지지발처(至至發處)” 라고 설명하였다.
“가도 가도 본래 자리요, 이르고 이르러서도 출발한 그 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