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행원품 (13) – 항순중생원1

<경문>

선남자여, 또 항상 중생을 따른다는 것은 온 법계, 허공계, 시방 세계에 있는 중생들이 가지가지로 차별되니 이른바 알에서 태어나고, 태에서 태어나며, 습기에서 태어나며, 변화해서 태어나는 것들이다. 혹 땅과 물과 불과 바람을 의지해서 사는 것들이 있으며, 혹은 허공이나 초목을 의지해 사는 것도 있거든 이런 저런 사는 종류, 이런 저런 몸, 이런 저런 형상, 이런 저런 모양, 이런 저런 수명, 이런 저런 종족, 이런 저런 이름, 이런 저런 심성, 이런 저런 지견, 이런 저런 욕망, 이런 저런 행동, 이런 저런 거동, 이런 저런 의복, 이런 저런 음식으로 이런 저런 마을과 성읍과 궁전에 살며, 나아가 일체 천룡팔부와 사람인 듯 하면서도 사람 아닌 것들, 발이 없는 것과 두 발 있는 것, 네 발 있는 것, 많은 발을 가진 것, 색깔이 있는 것, 색깔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과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들의 이러한 가지가지 종류들을 내가 모두 저들에게 따라다녀 갖가지로 받들어 섬기며, 갖가지로 공양하기를 부모와 같이 공경하며, 스승이나 아라한 내지 여래처럼 받들어 조금도 다름이 없이 하고, 병들어 고생하는 이에게는 훌륭한 의사가 되어 주며, 길 잃은 자에게는 바른 길을 보여주며, 캄캄한 어둠 속에서는 광명이 되어 주며, 가난한 자에게는 보배를 얻게 해 주리라 하는 것이니라.

<풀이>

일체중생이 이 세상에 생명을 부여받았다는 것 자체가 지극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생명이 적자생존의 경쟁에 의해 은혜의 배반이 일어나는 것은 중생세계의 비극이다. 약육강식이라는 업보의 본능이 서로의 생명 발전을 장애하여 생명 위협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불안과 공포가 더욱 가중된다. 여기에 중생을 보호해 주려는 보현의 원력이 동체대비를 띠고 나와 모든 중생을 따라 보살펴 준다는 것이다. 어떤 중생도 멀리하지 않고 가까이 친해져서 도우며 섬기겠다는 것은 생명의 참 가치를 보장하여 절대 평등한 본래의 공덕을 누구나 소유하고 누리도록 하자는 취지에서다. 생명체 하나하나가 개체적으로 처해 있는 조건이나 환경을 가리지 않고, 이런 저런 모든 상황 속에서 오로지 위해 주는 마음으로 부모처럼 공경하고 여래처럼 받들겠다는 정신은 대승의 본질이 발휘되는 극치이다. 나와 남의 생존을 대립적으로 보고 나를 위해 상대를 배타시하려는 소아적인 생각에서는 중생을 따를 수 없다. 사실 이 세상은 모든 중생들의 생명이 통분되어 있는 것이다. 시방법계 곧 대우주가 하나의 전일적인 생명 체계를 구축해 있는 것이므로 중생의 종류가 아무리 다르다고 하더라도 공생의 원리에 입각하여 생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아함경》에 양두사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의 몸체에 머리가 두개 달린 뱀이 있었다. 먹이를 만났을 때 두 머리의 입이 서로 먹으려고 경쟁을 하였다. 그런데 번번이 오른쪽 머리의 입이 선수를 쳐서 먹어버리므로 왼쪽 머리의 입이 항상 불만스러워 했다. 그러던 중 한 번은 오른쪽 머리의 입이 먹이를 보고 냉큼 먹지를 않아, 왼쪽 머리의 입은 이때다 하고 집어 삼켰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것은 독이 든 먹이로, 오른쪽 머리의 입은 그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항상 먹이를 뺏기는 불만에 쌓여 있던 왼쪽 머리의 입은 재빨리 먹는 것에만 급급하여 그만 독이든 먹이를 먹고 말았다. 이리하여 결국 양두사는 죽었다. 생명에 뿌리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다. ‘만물동근’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한 뿌리를 의지해 이런 저런 생명의 갈래가 나뭇가지처럼 나누어져 뻗어진 것이다. 또 세세생생 생사를 이어가는 윤회 속에서 볼 때 모든 개체적 생명 하나하나가 서로 상관 관계 있다. 때문에 남을 돌보는 것은 내 몸에 생긴 상처를 치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신체의 어느 한 부위에 상처가 생긴다면 치료를 해야 하는 것처럼 중생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알라는 최상의 가르침을 보현의 행원에서 배우게 된다. 중생이 있으므로 부처가 있고 보살이 존재한다. 중생 구제를 서원하는 자는 병든 이에게 의사가 되어 주고, 캄캄한 밤에 불빛이 되어 주고, 길 잃은 이에게 바른 길을 안내하며, 가난한 자에게는 재물을 얻게 해 준다는 말은 한 편으로 생각할 때 우리가 사는 인류사회를 복지사회가 되게 하는 근본이념을 구체적 제시한 현실의 실태를 지적한 말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5월 제54호

보현행원품 (12) – 상수불학원

<경문>

선남자여, 항상 부처님을 따라 배운다고 하는 것은 이 사바세계의 비로자나여래께서 처음 발심하고부터 정진하여 물러나지 아니하고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몸과 목숨을 보시하시되, 살갗을 벗겨 종이를 삼고, 뼈를 쪼개 붓을 삼고, 피를 뽑아먹물을 삼아 경전을 써, 수미산처럼 쌓더라도 법을 존중하기 때문에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거늘, 어찌 하물며 왕위나 성읍이나 촌락, 궁전, 정원, 산림의 일체 소유와 가지가지 난행고행일 것이며, 나아가 보리수 아래에 큰 깨달음을 이루시고 가지가지 신통을 보이여 온갖 변화를 일으키시던 일이나, 가지가지 부처님 몸을 나타내시고 여러 모임에 처하시되, 혹은 여러 대보살의 모인 도량에 처하시고 혹은 성문과 벽지불 등이 모인 도량에 처하시며 혹은 전륜성왕, 소왕권속들이 모인 도량에 처하시고 혹은 찰제리나 바라문, 장자, 거사가 모인 도량에 처하시며 나아가 천룡팔부와 사람인 듯 하나 아닌 이 등이 모인 도량에 처하시면서 온갖 모임에서 원만하신 음성을 마치 큰 우레 소리와 같게 하여, 그들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중생을 성숙시키던 일이나, 열반에 드시는 것을 나타내는 이와 같은 일체를 모두 내가 다 따라 배우기를 지금의 세존이신 비로자나불께 하는 것과 같이 하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온 법계 허공계 시방삼세 일체 부처님 국토의 작은 티끌 속에 계시는 모든 부처님께서도 다 이렇게 하시거든 생각마다 내가 모두 따라 배우리라 하는 것이니라.

이렇게 하여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하여도, 나의 이 따라 배우는 것은 다함이 없어, 몸과 말과 뜻으로 하는 일에 조금도 지치거나 싫증을 내지 않느니라

<풀이>

부처님을 따라 배운다는 것은 부처님의 수행과 원력이 내 자신의 수행과 원력이 되도록 함이다. 다시 말하면 내 삶의 방식을 부처님 방식대로 하여 부처님이 중생에게 보인 모범처럼 나도 남에게 그러한 모범을 보이면서 살겠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두말할 것도 없이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의 모델을 부처님에서 찾는다. 부처, 그 탁월한 인격과 최고의 격조 높은 삶의 모습이 모든 인류에게 희망을 주는 영원한 푯대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걸 수 있는 최대의 희망은 부처를 지향하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스스로를 제도하고 남을 제도하는 인간 최고의 정신이다.

‘살갗을 벗겨 종이를 만들고 뼈를 쪼개 붓을 만들며 피를 뽑아 먹물을 만들어 경전을 써서 수미산같이 쌓는다’고 한 말은 구도의 정신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용맹과 정진의 근면을 상징적으로 서술한 말이다. 이러한 용맹 정진하는 마음에는 오로지 부처를 본받으려는 것 외엔 다른 일이 없다. 이미 목숨마저 돌보지 않거늘 명예나 지위 재산, 게다가 소소한 고행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직 부처의 행을 따를 뿐이다.

불교에서 수행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깨달음이 ‘행’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행’이 없이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깨달음이 지식에서 나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도는 아는 것에 속하지 아니하고, 모르는 것에 속하지 아니한다”는 말이 선가의 유명한 격언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진리를 직접 체험하는 데는 유식이나 무식이나 모두 상관없다. 그렇기 때문에 행을 선도하여 깨달음으로 가게 하는 것이 보현행원이다. 또한 인간이 배움에 있어서 사표(師表)를 가져야 함은 당연한 일이며 바로 부처님이 만 인류의 영원한 사표이다. 맹물에 설탕을 타면 단맛이 나고 소금을 타면 짠맛이 나듯 부처님을 마음속에서 생각하고 따라 배우려 할 때 우리는 어느 사이 부처님 마음을 감응하여 자신의 수행을 성취하게 된다. 또한 인생을 배우려는 자세로 산다는 것은 그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배움 그 자체가 인생의 참된 가치라 할 수 있다. 더구나 구도의 정열로 사는 수행자에게 있어서는 비본질적인 세상잡사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나고 죽는 생사의 미망은 헛된 것이다. 본질적 의미를 회복한 열반의 삶, 해탈의 삶이라야 참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항상 발심을 가로막는 업장 속에서 질곡의 삶을 살기가 일쑤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사바세계가 수행하고 정진하는 최적의 환경을 가진 세상이라고 한다. 제불 가운데서도 사바교주 석가모니불이 가장 용맹정진 하는 제일의 부처님이라 고 한다. 세상의 부귀영예가 수도에는 마장이라 하여 옛날부터 인간이면 누구나 누리기를 원하는 복을 삼생의 원수라고 했다. 첫 생에 복을 짓느라고 수행을 못하고, 두 번째 생에 복을 누리느라고 수행을 못 하고, 세 번째 생에 다시 복이 감해져 빈궁에 시달리느라고 수행을 못하니, 결국 복이 삼생 동안 수행을 방해하는 결과가 되어 이 복이 원수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4월 제53호

보현행원품 (11) – 청불주세원

<경문>

선남자여, 또한 부처님께 이 세상에 오래 계시기를 청한다는 것은 온 법계, 허공계, 시방삼세의 부처님 국토에 있는 작은 티끌 수만큼의 모든 부처님께서 장차 열반에 드시려 할 때와 또한 모든 보살과 성문 연각들, 유학 무학과 나아가 일체 모든 선지식들에게 두루 권하여 청하되, ‘열반에 드시지 말고 일체 부처님 국토의 작은 티끌 수만큼의 많은 겁을 지니도록 중생을 이롭게 하여 주소서’ 하는 것이니라.

이렇게 하여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며,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하여도 나의 이 권하여 청하는 것은 다함이 없어 생각마다 계속하고 끊임이 없이 하여 몸과 말과 뜻으로 하는 일에 조금도 지치거나 싫증을 내지 않느니라.

<풀이>

중생이 사는 세계를 불국토화하려는 것이 불교의 지상 과제다. 일체중생 모두가 불국토의 염원으로 세상을 사려면 우선 부처님이 계시는 세상을 동경하면서 부처님이 이 세상에 항상 머물러 계셔 주기를 청해야 한다고 하였다. 태양이 없으면 이 세상이 어둠뿐이듯, 부처님이 계시지 않으면 세상은 빛을 잃는다. 언제나 부처님은 중생에게 있어서 빛과 같은 존재이다. 무명의 밤바다에 빠져 밝음을 잃고 산다는 건 더없는 불행이요, 고통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은혜를 중생에게 두루 입혀 주시기를 청함은 스스로를 구하고 남을 구제하는 자비원력인 것이다. 또 부처님은 중생을 깨우치는 법을 설해 주는 주인공이므로, 법주로서 부처님이 우리 세상에 계시게 하여 법의 은혜를 아울러 입고자 함이다 . 뿐만 아니라 성문이나 연각, 그리고 아직 배움의 단계에 있는 유학들과 이미 배움의 단계를 거쳐 마친 무학 등 일체 선지식들이 열반에 들지 말고 영원무궁토록 이 세상에 계시면서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기를 기원한다. 이것은 바로 정법을 받들려는 서원이기도 하다. 중생의 세계에서는 반드시 법을 바로 펴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지도자가 없는 사회를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은 구성원이 속한 공동의 사회는 지도편달에 의해서 사회적 기능이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길을 잃은 사람을 인도하는 것이 교화의 의무이므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진리의 안내자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부처님의 법 광명 속으로 안내 받아 인도되어지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행복이요, 안락이다.

열반에 드시지 말라고 청함은, 여기서는 부처님이 이 세상을 떠나지 말라는 것을 의미하지만, 부처님을 법신을 통하여 파악할 때는 부처님은 열반에 든다고 하여도 중생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다만 부처님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위해서 부처님을 원하는 지극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열반이라는 말이 때로는 죽음을 뜻하지만 원래는 일체 고통이 소멸된 진정한 평화를 뜻하는 말이다. 다만 여기 ‘보현행원품’의 경문은 부처님이 사바 인연을 끝내고 중생의 현실을 떠난다는 뜻으로 쓰여졌다. 말하자면 부처님이 항상 중생들을 보살펴 주시는 존재로 중생의 곁을 지켜주시면서 우매하고 불쌍한 중생을 버리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나무가 있어야 나무 그늘이 생길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계셔야 부처님의 음덕이 중생에게 입혀진다. 이리하여 부처님의 법의 은혜가 중생에게 미쳐지면 중생들이 부처님의 법을 호지할 수 있는 것이다.《열반경 금강신품》에 서는 부처님의 정법을 호지하는 공덕을 밝혀 놓았다.

“가섭아, 나는 옛적에 정법을 호지한 인연으로 이 부수어지지 않는 금강신을 성취할 수 있었느니라. 이 금강신은 허물어지지 않는 몸이며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되는 몸이며 부처의 본래 몸인 법신이니라.”

결국 부처님이 세상에 머무시기를 청하는 행원은 부처님의 금강신 곧 법신을 얻겠다는 서원으로 귀착되는 것이다. 법신을 얻게 하기 위해서는 선지식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며, 여기에 불교의 참된 가치가 있다.

‘선지식’은 ‘좋은 벗’이라는 뜻인 ‘선우’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현대적인 의미로 해석한다면 ‘올바른 지도자’라는 뜻이다. 《화엄경 입법계품》에 는 선재 동자가 53선지식을 찾아가서 해탈법문을 듣는 내용이 있다. 선지식은 능숙한 교화를 통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를 화목하게 하고 사회의 평화를 선도하는 역할을 한다. 소위 지도력을 발휘하여 너와 나를 이상적인 관계로 발전시켜 나가 모든 사람에게 이로운 영향을 준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부처님을 향하는 마음 자기 법신을 찾는 마음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3월 제5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