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문>
선남자여, 또한 부처님께 이 세상에 오래 계시기를 청한다는 것은 온 법계, 허공계, 시방삼세의 부처님 국토에 있는 작은 티끌 수만큼의 모든 부처님께서 장차 열반에 드시려 할 때와 또한 모든 보살과 성문 연각들, 유학 무학과 나아가 일체 모든 선지식들에게 두루 권하여 청하되, ‘열반에 드시지 말고 일체 부처님 국토의 작은 티끌 수만큼의 많은 겁을 지니도록 중생을 이롭게 하여 주소서’ 하는 것이니라.
이렇게 하여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며,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하여도 나의 이 권하여 청하는 것은 다함이 없어 생각마다 계속하고 끊임이 없이 하여 몸과 말과 뜻으로 하는 일에 조금도 지치거나 싫증을 내지 않느니라.
<풀이>
중생이 사는 세계를 불국토화하려는 것이 불교의 지상 과제다. 일체중생 모두가 불국토의 염원으로 세상을 사려면 우선 부처님이 계시는 세상을 동경하면서 부처님이 이 세상에 항상 머물러 계셔 주기를 청해야 한다고 하였다. 태양이 없으면 이 세상이 어둠뿐이듯, 부처님이 계시지 않으면 세상은 빛을 잃는다. 언제나 부처님은 중생에게 있어서 빛과 같은 존재이다. 무명의 밤바다에 빠져 밝음을 잃고 산다는 건 더없는 불행이요, 고통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은혜를 중생에게 두루 입혀 주시기를 청함은 스스로를 구하고 남을 구제하는 자비원력인 것이다. 또 부처님은 중생을 깨우치는 법을 설해 주는 주인공이므로, 법주로서 부처님이 우리 세상에 계시게 하여 법의 은혜를 아울러 입고자 함이다 . 뿐만 아니라 성문이나 연각, 그리고 아직 배움의 단계에 있는 유학들과 이미 배움의 단계를 거쳐 마친 무학 등 일체 선지식들이 열반에 들지 말고 영원무궁토록 이 세상에 계시면서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기를 기원한다. 이것은 바로 정법을 받들려는 서원이기도 하다. 중생의 세계에서는 반드시 법을 바로 펴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지도자가 없는 사회를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은 구성원이 속한 공동의 사회는 지도편달에 의해서 사회적 기능이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길을 잃은 사람을 인도하는 것이 교화의 의무이므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진리의 안내자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부처님의 법 광명 속으로 안내 받아 인도되어지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행복이요, 안락이다.
열반에 드시지 말라고 청함은, 여기서는 부처님이 이 세상을 떠나지 말라는 것을 의미하지만, 부처님을 법신을 통하여 파악할 때는 부처님은 열반에 든다고 하여도 중생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다만 부처님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위해서 부처님을 원하는 지극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열반이라는 말이 때로는 죽음을 뜻하지만 원래는 일체 고통이 소멸된 진정한 평화를 뜻하는 말이다. 다만 여기 ‘보현행원품’의 경문은 부처님이 사바 인연을 끝내고 중생의 현실을 떠난다는 뜻으로 쓰여졌다. 말하자면 부처님이 항상 중생들을 보살펴 주시는 존재로 중생의 곁을 지켜주시면서 우매하고 불쌍한 중생을 버리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나무가 있어야 나무 그늘이 생길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계셔야 부처님의 음덕이 중생에게 입혀진다. 이리하여 부처님의 법의 은혜가 중생에게 미쳐지면 중생들이 부처님의 법을 호지할 수 있는 것이다.《열반경 금강신품》에 서는 부처님의 정법을 호지하는 공덕을 밝혀 놓았다.
“가섭아, 나는 옛적에 정법을 호지한 인연으로 이 부수어지지 않는 금강신을 성취할 수 있었느니라. 이 금강신은 허물어지지 않는 몸이며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되는 몸이며 부처의 본래 몸인 법신이니라.”
결국 부처님이 세상에 머무시기를 청하는 행원은 부처님의 금강신 곧 법신을 얻겠다는 서원으로 귀착되는 것이다. 법신을 얻게 하기 위해서는 선지식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며, 여기에 불교의 참된 가치가 있다.
‘선지식’은 ‘좋은 벗’이라는 뜻인 ‘선우’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현대적인 의미로 해석한다면 ‘올바른 지도자’라는 뜻이다. 《화엄경 입법계품》에 는 선재 동자가 53선지식을 찾아가서 해탈법문을 듣는 내용이 있다. 선지식은 능숙한 교화를 통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를 화목하게 하고 사회의 평화를 선도하는 역할을 한다. 소위 지도력을 발휘하여 너와 나를 이상적인 관계로 발전시켜 나가 모든 사람에게 이로운 영향을 준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부처님을 향하는 마음 자기 법신을 찾는 마음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3월 제5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