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행원품 (16) – 보개회향원 2

<경문>

선남자여, 이상 말한 것이 보살마하살의 열 가지 대원을 모자람 없이 갖춘 것이니라. 만약 보살들이 이 대원에 따라 들어가면 곧 능히 일체중생들을 성숙되게 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따르게 되며 보현보살의 모든 행원을 이루게 되느니라. 이렇기 때문에 선남자여, 이러한 뜻을 잘 알아야 하느니라.

만약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시방의 한량없고 가없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부처님 국토의 작은 먼지 수만큼의 일체 세계에 가득한 가장 으뜸가는 칠보와 인간과 천상에서 가장 뛰어난 편안하고 즐거운 것들로 그 곳 일체 세계에 있는 중생들에게 보시하며, 그 곳 일체 세계의 불보살께 공양하되, 그 곳 부처님 국토의 작은 먼지 수만큼의 수많은 겁을 지내도록 계속하여 끊어지지 않게 한 공덕과 어떤 사람이 이 대원을 귀에 한번 들은 공덕을 비교한다면 앞의 공덕이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천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나아가 가장 적은 분수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느니라. 만약 다시 어떤 사람이 깊은 신심으로 이 대원을 지녀 외우거나 네 구절의 게송 하나만 써 베끼더라도 속히 능히 오무간업을 제거해 없애고, 세상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생기는 병들과 온갖 고뇌 그리고 작은 먼지 수만큼의 많은 일체 악업을 모두 다 소멸하고 모든 악귀들마저 멀리 떠나가리라.

이렇기 때문에 만약 누군가가 이 대원을 외우는 자는, 세상에 나감에 아무런 장애가 없음이 마치 공중에 달이 구름을 빠져나오는 것 같아 불보살의 칭찬을 받으며, 모든 인간과 천상이 다 예경을 할 것이며 일체중생들이 응당 공양하게 될 것이니라.

<풀이>

여기에서는 열 가지 보현보살의 행원 하나하나를 설명하고, 다시 이 행원을 수지독송할 것을 권하며, 그 공덕을 설해 놓았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위대한 점은 보현의 이러한 행원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대원을 가진 사람에게 불가능이란 없다. 고도의 정신에서 발휘되는 지극한 원력이 있으면 불가능한 일이 가능한 일로 바뀐다. 사실 누구나 목숨을 버릴 정도의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하면 초능력을 나타낼 수 있다.

신앙의 영험에 관한 무수한 설화가 있지만 병을 기도로 낳게 하거나, 재난의 액을 불가사의하게 벗어났다는 이야기들은 흔하게 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좋은 생각이 들어 있어야 한다. 거룩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불자라면 언제나 보현행원을 수지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사람의 행실은 잘못된 습관에 빠져들기 쉬운 약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약점들을 행원을 가짐으로써 사전에 극복할 수 있으며, 과거에 이미 잘못한 행위에 대한 대오반성이 행원을 실천할 때 저절로 따라 일어나게 된다. 불교는 이 세상의 길흉화복을 인과법으로 설명한다. ‘선인선과 악인악과(善因善果惡因惡果)’의 인과법칙이 이 세상을 지배한다. 원인이 좋으면 결과가 좋고 원인이 나쁘면 결과가 나쁘다. 식물이 종자에 따라서 생태가 다른 것처럼 우리가 만나는 인연도 우리들의 업종자에 의해서 만나지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생활의 기본 원리는 스스로 좋은 원인을 만들고 남에게도 좋은 원인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화엄경 본문에 ‘중생들은 결과만 두려워하고, 보살들은 원인만 두려워한다ꡓ’ 말이 있다. 중생들은 좋은 결과를 바라면서도 원인을 좋게 만들지 못한다는 뜻이다. 반면에 보살들은 결과에는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항상 좋은 원인을 스스로 만들어 간다. 원인이 좋으면 결과는 저절로 좋아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보현행원의 법문은 사실 보편적인 삶의 철학일 뿐이다. 특별한 것이 아니고 대단한 것이라고 할 수도 없는, 생명 세계의 생명 발전에 대한 기본 원리를 설해 놓은 것이다. 달이 구름을 벗어나듯 보현행원으로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런 장애가 없다고 한다.

고도의 정신력으로 탁월한 의지를 갖춘 사람에게 이 세상의 장애는 끼어들지 않는다. 나약한 사람에게는 장애로 작용되는 것도 원력이 뛰어난 사람에게는 장애가 되지 않는 법이다.『선문어록』에 자주 등장하는 ‘각하조고’(脚下照顧)’라는 말이 있다. ‘발밑을 살피라’는 말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아무 이상이 없는지, 다시 말해 좋은 원인이 심어지고 있는지 잘 살펴보라는 말이다. 우리는 수시로 지금 내가 잘하고 있는지, 바로 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마치 수험생이 공부를 잘해야 좋은 성적을 얻듯이, 공부는 하지 않고 놀고만 있지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를 살피는 것이 만사 가운데 가장 우선되는 일이다. 내가 바로 될 때 내가 나일 수 있다. 내가 틀려지면 나는 나가 아니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8월 제57호

보현행원품 (15) – 보개회향원 1

<경문>

선남자여, 널리 모두 회향한다는 것은, 처음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하는 것으로부터 중생을 따르는 것까지의 모든 공덕을 온 법계, 허공계, 일체중생에게 남김없이 회향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항상 안락하고 모든 질병의 고통은 없게 하며, 악법을 행하려 할 적에는 이루어지지 않게 하고, 선업을 닦고자 하면 모두 속히 이루어지게 하며, 일체 악취의 문은 닫아버리고 인간과 천상에 열반의 바른 길을 열어 보이며, 만약 모든 중생이 악업을 쌓아 모은 것 때문에 받아야 할 일체 지극히 무서운 고통의 과보를 내가 모두 대신 받아서 저 중생들로 하여금 해탈을 얻게 하여 마침내 위없는 보리를 성취하게 하리라 하는 것이니라.

보살이 이처럼 닦은 바를 회향하기를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며, 중생의 번뇌가 다하여도, 나의 이 회향은 다함이 없어 생각마다 계속하여 끊임없이 하여 몸과 말과 뜻으로 하는 일에 조금도 지치거나 싫증을 내지 않느니라.

<풀이>

‘회향’이란 내가 쌓은 선근 공덕을 다른 사람에게 돌려준다는 뜻이다. 범어 ‘파리나마나’(parinamana)를 어원으로 가지고 있는 말로 대승의 정신을 나타내는 중요한 말로 쓰인ㅈ다. ‘회’는 회전(回轉)의 준말이고, ‘향’은 취향(趣向)의 뜻이다. 어디로 갈지 방향을 잡아서 나아간다는 뜻이다. 사실 불교의 모든 수행은 회향에서 참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치 화폐가 쓰여져야 상행위가 이루어져 돈으로의 역할이 살아나듯이, 내가 닦은 선근과 공덕이 어디엔가 회향되어져야 제 역할이 이루어진다.

《화엄경 십회향품》에 서는 열 가지 회향을 설해 놓았고 보통 상단 축원시 ‘삼처회 향’을 고하기도 한다. 자기의 공덕을 깨달음을 구하는 데 돌리는 것을 ‘보리회향’이라 하고, 또 궁극적으로 깨달음의 진리 그 자체에 돌려져 맞아지도록 하는 것을 ‘실제회향’이라 하며, 그리고 자신의 공덕을 중생들에게 돌려주는 것을 ‘중생회향’이라 한다. 보현행원에서의 회향은 중생회향이다. 내가 아무리 선근과 공덕을 많이 성취하여도 그것이 중생에게 회향되어지지 않으면 상대적 한계성을 가지는 한정된 공덕이 되고 말지만, 회향을 하게 되면 이 유한한 공덕이 무한한 공덕으로 전환되어진다. “보살이 지은 바 모든 공덕을 온 법계 허공계의 일체중생에게 남김없이 회향한다”는 것은 내가 성취한 공덕을 내 것이라는 소유 관념 속에 묶어 두지 않고 중생의 것이라고 내놓는 것이다.

내가 성취한 공덕을 나 홀로 소유하지 않고, 중생 모두에게로 나누어 공유하겠다는 정신이 바로 회향정신이다. 따라서 회향은 단순히 주고받는 수수 관계가 아니다. 인간 행위의 본질적 의미를 밝힌 것이 회향이다. 회향하는 행동이라야 그 행동에 진정한 공덕이 따른다는 뜻이다. 또한 인간 행위의 가치를 극대화시키는 것이 바로 회향이며, 회향을 통하여 하나의 완전한 행업이 이루어진다. 이 회향에서 인간의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극복된다. 더불어 사는 중생의 삶의 현장을 떠난 개인은 존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사회를 의지하지 않고는 내가 살 수 없는 것이다. 중생의 은혜 속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고, 사회의 은혜 속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 은혜를 바로 알 때 자연히 나의 모든 것을 회향하여 나의 선근, 나의 공덕이 바로 은혜 그 자체가 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 회향의 정신은 현대 사회에서 볼 때 인간의 의식을 개혁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강자의 독점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현대의 기업생리나 강권을 가진 자의 고압적인 인간 압박은 ‘회향 정신’의 부재에서 비롯되고 있다. 회향의 현대적 의미는 바로 이러한 강권주의와 독점주의를 우리 사회에서 추방하는 것이다. 이기주의가 사라질 때 회향 정신은 발휘된다. 악업은 지은 중생이 그 과보로 무서운 고통을 받을 때 그 고통을 내가 대신 받겠다는, 저 숭고한 뜻을 어찌 거룩하다 하지 않겠는가? ‘나’라는 자기는 결국 개인적인 존재가 아니다. 개체적으로 독립한 개인은 없다. 불교의 연기의 이법이 이미 그것을 가르쳐 왔다. 우리는 모두 일체 세계 일체중생과 더불어 한 몸이며 대립적으로 상쟁할 수 없는 불가분리 관계의 화합적 인연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행원을 실천하는 보살의 마음에는 이기적 자기 우선주의가 있을 수 없다. 만약 어떤 수행을 아무리 많이 하여도 이기주의에 빠져버린다면 행원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순수한 자기의 진심, 청정한 본래의 마음, 그 속에는 무한한 회향의 덕이 충만해 있으니 그것을 운전해 살아가는 것이 회향의 인생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7월 제56호

보현행원품 (14) – 항순중생원2

<경문>

보살이 이와 같이 평등하게 일체중생들을 이롭게 하나니, 왜냐하면 보살이 만약 중생들을 따르면 곧 부처님을 따라 공양하는 것이 되며, 중생을 존중하여 받들면 곧 여래를 존중하여 받드는 것이 되며, 만약 중생들을 기쁘게 하면 일체 여래를 기쁘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니라. 그 까닭은 모든 부처님께서는 대비심으로써 바탕을 삼기 때문에 중생으로 인하여 대비를 일으키고 대비로 인하여 보리심을 내며 보리심으로 인하여 등정각을 이루시나니라. 비유하자면 넓은 벌판 모래밭 가운데 있는 큰 나무의 뿌리가 물을 얻으면 가지와 잎, 꽃과 열매가 모두 번창하고 무성한 것처럼 생사벌판의 보리수도 그와 같아 일체중생은 나무의 뿌리며 모든 부처님은 꽃과 열매이니 대비의 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면 곧 능히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의 지혜의 꽃과 열매를 이루게 되니, 그것은 만약 보살이 대비의 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면 능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는 까닭이니라. 이렇기 때문에 보리는 중생에게 속하는 것이다. 만약 중생이 없으면 일체 보살이 마침내 위없는 정각을 이루지 못하니라. 이 뜻을 잘 알아야 하느니라. 중생들에게 마음이 평등하므로 곧 능히 원만한 대비를 성취하며, 대비심으로써 중생을 따르는 까닭에 곧 능히 여래에게 공양하는 결과를 성취하느니라.

보살이 이와 같이 중생을 따르기를 허공계가 다하며 중생계가 다하며 중생의 업이 다하며 중생의 번뇌가 다하여도 나의 이 따름은 다함이 없이 하리라 하여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하여 중간에 끊어짐이 없이 하여 몸과 말과 뜻으로 하는 일에 지치거나 싫증을 내지 않느니라.

<풀이>

‘중생을 따르는 것이 여래를 공양하는 것이고, 중생을 받드는 것이 여래를 받드는 것’이란 이 말은 중생 때문에 부처님이 있으며, 나아가 불교는 중생 때문에 존재한다는 취지를 단도직입적으로 밝히고 있다. 보살들의 모든 행원이 중생본위에서 실천되어지고 있음을 천명하여, 행여 중생과 부처를 분리하여 중생을 버리고 부처를 찾는 어리석음을 범할까봐 경계한 것이다. 삶을 도와주는 일이 수행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일이 바로 삶을 도와주는 일이다. 따라서 삶을 누리는 자에게 그 삶의 안락이 보장되도록 힘써 주는 것이야말로 ꡐ진선진미ꡑ한 일이다.

‘중생’이란 범어 ‘사뜨바(sattva)’를 번역한 말로 정식(情識)이 있는 생명체를 가리킨다. 진나라 때 구마라습 등은 ‘중생’이라 번역하였고, 당나라 때 현장 등은 유정(有情)이라 번역하였다. 아직도 구역이 많이 통용되어 중생이라는 말이 널리 쓰인다. 한역에서 ‘중생’의 의미를 3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많은 인연에 의해서 태어난다는 뜻이며, 둘째는 생이 거듭거듭 이어지므로 많은 생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셋째는 뭇 삶이라는 뜻으로 여럿이 함께 산다는 뜻이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이 중생이 누리는 삶, 그 속에 부처님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다시 말하면 부처는 중생 속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근본에 있어서 부처와 중생은 하나다. 『화엄경』에 서 마음과 부처 그리고 중생은 차별이 없다고 한다. 다만 스스로가 쓰고 있는 마음의 상태가 다를 뿐이다. 깨달아서 지혜로운 상태는 부처의 마음 상태요, 깨닫지 못하여 미혹한 상태는 중생의 마음 상태다. 미오의 상태가 다르지만 마음 그 자체는 같다는 것이다. 땅에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난다는 말처럼 마음이 미혹한 중생이 마음을 깨달아 부처가 된다.

바로 이점에서 관찰할 수 있듯이 중생이 중생이라서 위대한 것이 아니라, 중생이 부처의 위대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불성 때문에 중생이 위대한 것이다. 한 마리 벌레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 벌레에 내재되어 있는 불성의 공덕과 그 작용은 부처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으므로 위대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명이 부여된 모든 존재 자체는 그 속에 부처의 탁월성이 갖추어져 있으며 그 생명의 현발 자체가 부처의 공덕이므로 중생을 따르라는 것이다. 중생을 통하여 부처의 공덕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ꡐ나무가 뿌리에서 수분을 흡수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이, 중생의 뿌리에 대비의 물이 뿌려져야 부처의 꽃과 열매가 맺힌다ꡑ는 비유는 중생과 부처의 관계를 가장 아름답게 설명한 좋은 경우이다. 중생이 없으면 정각을 이룰 수 없다는 것도 중생을 부처보다 더 근본적인 위치에 두고 한 말이다. 즉, 모든 현상적 사실에 있어서 중생의 실태를 여법하게 파악하지 않고는 부처의 세계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또한 대비심으로써 중생을 보살펴주므로 여래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이라는 마지막 구절은 눈물겨운 말이다. 불교는 중생에 대한 대비의 윤리를 종교적 생명으로 삼는다. 중생에 대한 연민이 없는 깨달음이란 무용지물이며, 대비의 실천이 없는 사변적 이론은 한낱 메마른 철학적 사고에 불과하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6월 제5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