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행원품 (19) – 중송분 1

<경문>

그때 보현보살마하살이 거듭 이 뜻을 말씀하시고자 널리 시방을 살펴보시고 게송을 설하였다.

시방세계 안에 있는 삼세 모든 부처님께

내 몸과 말과 생각을 깨끗이 하여

빠짐없이 절을 하여 쉬지 않으리.

보현의 행과 원의 위신력으로

제불 전에 수많은 몸 널리 나타내고

한 몸에 다시 먼지 수의 많은 몸을 나타내어서

먼지 수의 부처님께 예배하리라.

한 티끌 속에 티끌 수의 부처님 계셔

각기 보살 무리 함께 처하고

다함없는 법계의 티끌에도 모두 그러해

부처님 가득함을 깊이 믿어서

각각 일체 음성으로 다함없는 미묘한 말을 내어서

끝없는 미래 겁이 다할 때까지

깊고 깊은 부처님 공덕 찬탄하리라.

가장 좋고 미묘한 꽃과 꽃다발

노래하는 악기와 바르는 향과 우산의 종류

이와 같은 제일가는 장엄구로써

내 모든 여래께 공양 올리고

가장 좋은 의복이며 가장 좋은 향

가루로 된 향과 태우는 향 그리고 등불과 촛불

하나하나 그 모두를 수미산만큼

내가 모두 여래께 공양 올리리.

내 넓고 큰마음으로 훌륭히 이해해

과거 현재 미래 부처님을 깊이 믿어서

모두 보현의 행과 원의 힘을 다하여

빠짐없이 부처님께 공양하리라.

<풀이>

시를 읊듯이 설하여 운문체로 표현된 것을 게송이라 한다. 12부 경문의 체제 가운데 ‘가타(伽陀)’와 ‘기야(祇夜)’가 그것이다. 산문체 형식으로 설해진 장행의 내용을 거듭 요약하여 겹쳐 설하는 것이 ‘기야’로, 응송(應頌), 혹은 중송(重頌)이라 번역한다. 반면에 장행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설해진 것은 ‘가타’라 하며, 고기송(孤起頌), 혹은 부중송(不重頌)이라고 번역한다. 보현의 십종대원을 기야로 다시 요약 설하는 대목이다. 같은 내용도 문장의 형식에 따라 느끼는 감동이 달라질 수 있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게송에서 더 진한 감동을 느낄 것이다. 사실 불교 경전 전체가 위대한 문학작품이다. 특히 《화엄경》은 일대 로망대서사시라 할 수 있는 경전이다. 인간의 의사를 표현하는 말과 글은 감동의 효과가 클수록 감화력이 커지므로 언어가 가지는 생명력의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똑같은 말이라도 누가 설했느냐의 설주에 따라 의미의 무게가 달라지는 것이다. 더구나 부처님의 말씀은 모두가 삼매에서 나온 지혜의 말씀이다. 번뇌와 망상 속에서 나오는 말씀이 전혀 아니다.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부처님께 예배하고 찬탄하고 공양하는 것은 부처님을 섬기는 기본자세다. 나아가 부처님을 섬기는 이 기본자세가 기실은 인간 상호에 적용되는 삶의 태도이다. 태도가 좋아야 성숙된 삶을 살 수가 있다. 서툴고 미숙한 삶을 사는 것은 범부요, 현인이나 성인의 삶은 성숙된 인간성이 발휘되므로 공경과 덕을 베푸는 마음 씀이 인색하지가 않는 것이다. 예배는 생명의 공경을 나타내는 행위며, 찬탄은 남을 높여줄 때 내 자신의 도덕이 높아지는 것이며, 공양은 뜻이 통해지는 화목한 사이를 만드는 최상의 방편인 것이다. 열 가지 행원 중에 이 세 가지 행원이 닦아지면 부처의 마음이 길들여진다.

일반적으로 불교의 신앙 정서를 네 가지로 설명한다. 귀의하는 마음, 찬탄하는 마음, 참회하는 마음, 발원하는 마음이다. 사찰에서 기도를 할 때 필수적으로 독송하는 천수경이 있는데, 이 천수경의 내용이 귀의, 찬탄, 참회, 발원으로 되어 있다. 사람이 누구나 태어난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가지듯이 자신의 영혼에 대한 향수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상상도 할 수 없는 감상이 영혼 깊숙이 울려 나올 때 비로소 내 영혼의 활동은 시작되는 것이며, 이 활동을 준비하는 것이 귀의하고 찬탄하고 참회하고 발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에서 내세우는 기도는 자기 영혼을 순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42장경』에는 이런 말이 있다. “마음의 때가 다하면 영혼이 오고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육체의 활동은 제한적이지만 영혼의 활동은 무한한 것이다. 우리들의 기도는 잠자는 영혼을 일깨우는 일이다. 어느 시인은 말하기를 “일생에 기도를 한번도 해 본 일이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꽃을 본 일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11월 제60호

보현행원품 (18) – 보개회향원 4

<경문>

선남자여, 저 모든 중생들이 만약 이 큰 원의 왕을 듣거나 믿고 받아 지니며 읽고 외워서 널리 남을 위하여 설한다면, 이 사람이 지은 공덕은 부처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 사람이 없으리라. 그러므로 너희들은 이 원의 왕을 듣고 의심하는 생각을 내지 말고, 응당 진실하게 받으며, 받고는 능히 읽고, 읽고는 능히 외우며, 외우고는 지니며, 나아가 쓰거나 베껴서 널리 사람들에게 설해야 하느니라. 이렇게 하는 사람들은 한 생각 속에 행원을 모두 성취해서 얻는바 복의 무더기가 한량이 없고 가이없어 능히 번뇌의 큰 고통의 바다에서 중생들을 건져내어 생사를 벗어나서 모두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세계에 가 태어나게 하리라.

<풀이>

보현행원의 원을 ‘원의 왕’이라 표현한 말맛이 미묘하다. 왕은 최고의 지위를 뜻한다. 또한 승진의 마지막 단계라 할 수 있는 왕이 되는 것이 원으로서 이루어지므로 원의 왕이다.

사실 불교는 인간을 승격시켜 ‘인간 부처’를 만드는 종교다. 인간의 인격이 최고로 승격된 상태가 부처님이다. 이것은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자율적으로 내가 나를 승격시키는 것이다. 내가 나를 어떻게 승격시키는가? 내 마음이 원의 왕이 되면 스스로 승격되어진다. ꡐ원의 왕ꡑ을 받아 지녀 읽고 외워 남에게 설해 주는 공덕은 부처님만이 아는 일이라고 한 것은, 중생들의 생각에서는 불가사의한 일이라 쉽게 믿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의심하지 말고, 믿을 것을 권하면서 복이 한량없음을 강조하였다. 《화엄경 현수품》에 서 ‘믿음이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라 하였다. 믿음에서 시작되는 도며 믿음에 의해서 성취되는 공덕이므로 모든 수행의 근본이 말할 것도 없이 믿음인 것이다. 그런데 불교의 믿음은 그 결과가 자기의 마음을 바로 아는 데로 돌아온다. 또한 자기 마음을 바로 안 사람이 부처이다. 자기 마음을 바로 안 사람은 번뇌에서 벗으나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 따위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마음의 무한한 자유를 느끼며 오로지 남을 이롭게 하는 원력으로 충만된다. 이것이 바로 ꡐ원의 왕ꡑ이다. 때문에 ꡐ원의 왕ꡑ이 되면 그대로 부처님 마음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대자대비의 자비가 되어 끝없는 은혜를 누구에게나 베풀어준다. 중생의 자비는 현실의 조건 속에서 일어나므로 인연 따라 제한적이 되어 작은 자비, 곧 소비(小悲)가 되고 만다. 그런가 하면 성문이나 연각들의 자비는 무아의 이치를 안 아공에서 나온 자비이므로, 자기 부정의 차원에서 집착을 여의었으나 이타 원력이 부족한 자비이다. 따라서 이를 중비(中悲)라 한다. 부처님의 자비는 무연(無緣)자비다. 아무런 조건이 없는 절대평등의 자비로 이를 동체대비라 부르기도 한다. 서양에서 말해 온 아가페(Agape)의 정신과 유사한 면을 가지고 있다. 결국 인간의 마음이 성숙될수록 무연자비인 대비를 향해 접근해 가는 것이다.

불교 수행에 있어서 ‘내가 나를 목적으로 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성불이 목표가 되는 수행이지만 그 성불이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불성 계발이므로, 객관 대상에 있는 목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마음이 마음을 체험하는 것이 수행의 궁극적 경지이다. 또한 우리의 마음은 본래 무한한 공덕을 갖추고 있다. 우리의 본래 마음은 해탈의 마음이요, 열반의 마음이다. 일체 번뇌나 괴로움이 애초에는 없었다는 말이다. 객진번뇌라고 하는 말처럼, 번뇌는 주인이 아니고 찾아온 손님과 같다는 뜻이다. 거울에 본래 먼지가 끼지 않았었는데 나중에 보니 어디서 와 붙었는지 먼지가 낀 상태가 되어 버렸더라는 이야기다.

보살행의 실천을 강조하는 대승 불교는 바라밀을 닦는 이타행을 일으키면 번뇌가 저절로 조복되어진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적인 고요만을 추구하는 현실의 회피를 용납하지 않는다. 한 그루의 나무를 심어 놓고 물을 주어 키우듯이 언제나 중생세계를 관찰하는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동시에 중생을 보는 시선이 항상 연민과 환희심으로 차 있어야 한다. 중생들을 보고 내가 원의 왕이 될 수 있으므로 내면적으로는 환희가 오고 외향적으로 중생의 처지를 대비심으로 보게 되므로 언제나 연민의 마음이 떠나지 않는 것이다. 번뇌의 바다에 빠져 괴로워하는 중생들을 건져내어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태어나게 한다는 보현행자의 원력이 모든 이의 가슴 속에 살아 있어야 불국정토가 구현되는 것이다. 내가 극락세계에 갈 수 있는 것은 남이 극락세계에 갈 수 있도록 해 줄 때 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스로를 제도하지 못하더라도 남을 먼저 제도한다(自未得度先度他)’는 대승의 기치이다. 참된 자리(自利)에 이타(利他)가 있고 참된 이타에 자리가 있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10월 제 58호

보현행원품 (17) – 보개회향원 3

<경문>

이 선남자는 사람의 몸을 잘 받아서 보현보살의 모든 공덕을 원만히 하고 오래지 않아 보현보살과 같은 미묘한 몸을 성취해서 32가지 대장부상이 갖추어질 것이며, 만약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나게 되면 난 데마다 뛰어난 종족 가운데 태어날 것이며, 능히 일체의 악취는 모두 없어질 것이며, 일체 악한 벗은 다 멀리 떠나고, 일체 외도는 다 조복하며, 일체 번뇌에서 해탈하게 되는 것이 마치 사자의 왕이 뭇 짐승들을 굴복시키는 것과 같아서 일체중생의 공양을 받게 되리라.

또한 이 사람이 임종할 마지막 순간에 육근은 모두 흩어지고, 일체 친족과 권속들은 모두 떠나고, 모든 위엄과 세력도 모두 사라지고, 보좌하던 재상과 대신들 그리고 궁성 안팎의 코끼리와 말, 수레와 보배 재물 등 이러한 모든 것들이 하나도 따라오는 것이 없건만, 오직 이 원의 왕은 떠나지 아니하여 앞길을 인도하여 잠간 사이에 곧 극락세계에 가서 태어나게 하고, 태어나면 곧바로 아미타불과 문수사리보살과 보현보살, 관자재보살, 미륵보살 등을 뵈옵고, 이 모든 보살들이 몸매가 단정하고 엄숙하며 갖춰진 공덕으로 장엄하고 계시거든 그때 스스로가 연꽃 속에 태어났음을 보게 되리라.

그리고 부처님의 수기를 받아 무수한 백천만억나유타겁을 지나도록 시방의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세계에 널리 다니며, 지혜의 힘으로 중생들의 마음을 따라 이롭게 하며, 머지않아 마땅히 보리도량에 앉아 마군들을 항복받고 등정각을 성취하여 미묘한 법륜을 굴려서, 능히 불찰미진수의 중생들로 하여금 보리심을 발하게 하고, 근기와 성질을 따라서 교화하여 성숙시키며, 나아가 한량없는 미래 겁이 다하도록 널리 일체중생들을 이롭게 하리라.

<풀이>

보현의 행원은 인간이 인간의 자격을 유지하고 또한 보장받는 일이다. 자칫 인간은 인간으로 탄생한 다음 그릇된 업에 끌려 인간의 자격을 상실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옛날부터 사람 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라는 경책의 말씀이 전해져 내려온다. 이 말은 사람이 죽은 다음 생전에 지은 나쁜 업의 과보로 다시 수생할 때 사람의 몸을 받지 못하고 짐승의 몸을 받는다든가, 혹은 아귀나 지옥 등 악도에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이다.

사람이 한 행위는 그 결과의 과보가 있다. 이것이 과거, 현재, 미래의 삼생을 통하여 인과 관계를 이루어 이어진다. 이것은 바로 불교의 기본윤리요, 도덕률이다. 보현행원을 실천하는 보현행자는 언제나 이 기본의 ‘인과 법칙’을 믿고 자기의 수행에 전념한다. 마치 사자가 뭇 짐승들을 굴복시키는 것처럼, 모든 악취를 없애고 외도를 조복하며 일체 번뇌에서 해탈하게 함은 보현행자의 본연의 자기 역할이다. 불보살의 역할을 대행하는 것이 보현의 행원이므로, 중생을 향하여 끝없는 원력을 발휘한다.

또 ‘임종할 마지막 순간에 육체의 모든 기관이 흩어지고 소유하고 있던 모든 것이 떠나가지만, 오직 원의 왕만이 따라와 앞길을 인도하여 극락왕생을 성취하게 한다’ 는 보현의 행원 속에 정토의 발원이 저절로 이루어짐을 나타낸 말이다. 결국 불국정토의 실현의 중추적 역할이 보현행원에 있다는 말이다. ‘극락세계에 태어나 여러 불보살들을 친경하고 마침내 그 자신도 연꽃 속에 태어나 있음을 보게 된다’는 말은 인간의 이상 세계를 환상적으로 미화시킨 문학적 표현일 수도 있지만, 마음에 서 열리는 불국 세계를 깊은 신앙 정서에 입각한 유심정토의 묘사로 볼 수 있다.

보현행원도 자성공덕이요, 극락세계도 결국은 자성공덕일 뿐이다. 인간의 마음, 그 자체가 공덕인 줄 모르고 망령된 업에 끌려가 그릇된 행위를 저지르는 것을 ‘배각합진’(背覺合塵)이라 한다. 이것은 깨달음을 등지고 번뇌에 붙어버리는 중생의 몽매함을 일컫는 말이다. 광석 속에 들어 있는 순금을 추출해 내듯이, 자성 공덕을 번뇌 속에서 추출하여 계발해 내는 것이 불교의 수행이다.

무릇 세상의 허망성이 모든 현상을 덧없이 사라지게 하지만, 원력이 충만한 마음에는 영원성이 기약되고 무한한 활동 영역이 언제나 보장되어 있다. 미래겁이 다하도록 내가 할 역할은 쉴 새가 없어 결코 중단되는 일이 없으며, 끝나는 시점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원의 왕’이 되어 세상을 살 때, 세상은 영원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이것이 나를 제도하고 남을 제도하는 유일한 길이다. 모든 일은 마음에 의지해 있고 마음에 의해서 해결된다. 생명의 발전을 방해하는 것도 마음이고, 생명의 발전을 도와주는 것도 마음이다.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것을 거둬들인다(觀心一法 總攝諸行)고 한다. 내 마음이 ‘원의 왕’이 되면 내 인생은 영원하고, 세상은 무한히 넓어지는 것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9월 제5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