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행원품 (18) – 보개회향원 4

<경문>

선남자여, 저 모든 중생들이 만약 이 큰 원의 왕을 듣거나 믿고 받아 지니며 읽고 외워서 널리 남을 위하여 설한다면, 이 사람이 지은 공덕은 부처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 사람이 없으리라. 그러므로 너희들은 이 원의 왕을 듣고 의심하는 생각을 내지 말고, 응당 진실하게 받으며, 받고는 능히 읽고, 읽고는 능히 외우며, 외우고는 지니며, 나아가 쓰거나 베껴서 널리 사람들에게 설해야 하느니라. 이렇게 하는 사람들은 한 생각 속에 행원을 모두 성취해서 얻는바 복의 무더기가 한량이 없고 가이없어 능히 번뇌의 큰 고통의 바다에서 중생들을 건져내어 생사를 벗어나서 모두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세계에 가 태어나게 하리라.

<풀이>

보현행원의 원을 ‘원의 왕’이라 표현한 말맛이 미묘하다. 왕은 최고의 지위를 뜻한다. 또한 승진의 마지막 단계라 할 수 있는 왕이 되는 것이 원으로서 이루어지므로 원의 왕이다.

사실 불교는 인간을 승격시켜 ‘인간 부처’를 만드는 종교다. 인간의 인격이 최고로 승격된 상태가 부처님이다. 이것은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자율적으로 내가 나를 승격시키는 것이다. 내가 나를 어떻게 승격시키는가? 내 마음이 원의 왕이 되면 스스로 승격되어진다. ꡐ원의 왕ꡑ을 받아 지녀 읽고 외워 남에게 설해 주는 공덕은 부처님만이 아는 일이라고 한 것은, 중생들의 생각에서는 불가사의한 일이라 쉽게 믿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의심하지 말고, 믿을 것을 권하면서 복이 한량없음을 강조하였다. 《화엄경 현수품》에 서 ‘믿음이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라 하였다. 믿음에서 시작되는 도며 믿음에 의해서 성취되는 공덕이므로 모든 수행의 근본이 말할 것도 없이 믿음인 것이다. 그런데 불교의 믿음은 그 결과가 자기의 마음을 바로 아는 데로 돌아온다. 또한 자기 마음을 바로 안 사람이 부처이다. 자기 마음을 바로 안 사람은 번뇌에서 벗으나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 따위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마음의 무한한 자유를 느끼며 오로지 남을 이롭게 하는 원력으로 충만된다. 이것이 바로 ꡐ원의 왕ꡑ이다. 때문에 ꡐ원의 왕ꡑ이 되면 그대로 부처님 마음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대자대비의 자비가 되어 끝없는 은혜를 누구에게나 베풀어준다. 중생의 자비는 현실의 조건 속에서 일어나므로 인연 따라 제한적이 되어 작은 자비, 곧 소비(小悲)가 되고 만다. 그런가 하면 성문이나 연각들의 자비는 무아의 이치를 안 아공에서 나온 자비이므로, 자기 부정의 차원에서 집착을 여의었으나 이타 원력이 부족한 자비이다. 따라서 이를 중비(中悲)라 한다. 부처님의 자비는 무연(無緣)자비다. 아무런 조건이 없는 절대평등의 자비로 이를 동체대비라 부르기도 한다. 서양에서 말해 온 아가페(Agape)의 정신과 유사한 면을 가지고 있다. 결국 인간의 마음이 성숙될수록 무연자비인 대비를 향해 접근해 가는 것이다.

불교 수행에 있어서 ‘내가 나를 목적으로 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성불이 목표가 되는 수행이지만 그 성불이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불성 계발이므로, 객관 대상에 있는 목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마음이 마음을 체험하는 것이 수행의 궁극적 경지이다. 또한 우리의 마음은 본래 무한한 공덕을 갖추고 있다. 우리의 본래 마음은 해탈의 마음이요, 열반의 마음이다. 일체 번뇌나 괴로움이 애초에는 없었다는 말이다. 객진번뇌라고 하는 말처럼, 번뇌는 주인이 아니고 찾아온 손님과 같다는 뜻이다. 거울에 본래 먼지가 끼지 않았었는데 나중에 보니 어디서 와 붙었는지 먼지가 낀 상태가 되어 버렸더라는 이야기다.

보살행의 실천을 강조하는 대승 불교는 바라밀을 닦는 이타행을 일으키면 번뇌가 저절로 조복되어진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적인 고요만을 추구하는 현실의 회피를 용납하지 않는다. 한 그루의 나무를 심어 놓고 물을 주어 키우듯이 언제나 중생세계를 관찰하는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동시에 중생을 보는 시선이 항상 연민과 환희심으로 차 있어야 한다. 중생들을 보고 내가 원의 왕이 될 수 있으므로 내면적으로는 환희가 오고 외향적으로 중생의 처지를 대비심으로 보게 되므로 언제나 연민의 마음이 떠나지 않는 것이다. 번뇌의 바다에 빠져 괴로워하는 중생들을 건져내어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태어나게 한다는 보현행자의 원력이 모든 이의 가슴 속에 살아 있어야 불국정토가 구현되는 것이다. 내가 극락세계에 갈 수 있는 것은 남이 극락세계에 갈 수 있도록 해 줄 때 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스로를 제도하지 못하더라도 남을 먼저 제도한다(自未得度先度他)’는 대승의 기치이다. 참된 자리(自利)에 이타(利他)가 있고 참된 이타에 자리가 있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10월 제 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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