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행원품 (14) – 항순중생원2

<경문>

보살이 이와 같이 평등하게 일체중생들을 이롭게 하나니, 왜냐하면 보살이 만약 중생들을 따르면 곧 부처님을 따라 공양하는 것이 되며, 중생을 존중하여 받들면 곧 여래를 존중하여 받드는 것이 되며, 만약 중생들을 기쁘게 하면 일체 여래를 기쁘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니라. 그 까닭은 모든 부처님께서는 대비심으로써 바탕을 삼기 때문에 중생으로 인하여 대비를 일으키고 대비로 인하여 보리심을 내며 보리심으로 인하여 등정각을 이루시나니라. 비유하자면 넓은 벌판 모래밭 가운데 있는 큰 나무의 뿌리가 물을 얻으면 가지와 잎, 꽃과 열매가 모두 번창하고 무성한 것처럼 생사벌판의 보리수도 그와 같아 일체중생은 나무의 뿌리며 모든 부처님은 꽃과 열매이니 대비의 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면 곧 능히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의 지혜의 꽃과 열매를 이루게 되니, 그것은 만약 보살이 대비의 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면 능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는 까닭이니라. 이렇기 때문에 보리는 중생에게 속하는 것이다. 만약 중생이 없으면 일체 보살이 마침내 위없는 정각을 이루지 못하니라. 이 뜻을 잘 알아야 하느니라. 중생들에게 마음이 평등하므로 곧 능히 원만한 대비를 성취하며, 대비심으로써 중생을 따르는 까닭에 곧 능히 여래에게 공양하는 결과를 성취하느니라.

보살이 이와 같이 중생을 따르기를 허공계가 다하며 중생계가 다하며 중생의 업이 다하며 중생의 번뇌가 다하여도 나의 이 따름은 다함이 없이 하리라 하여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하여 중간에 끊어짐이 없이 하여 몸과 말과 뜻으로 하는 일에 지치거나 싫증을 내지 않느니라.

<풀이>

‘중생을 따르는 것이 여래를 공양하는 것이고, 중생을 받드는 것이 여래를 받드는 것’이란 이 말은 중생 때문에 부처님이 있으며, 나아가 불교는 중생 때문에 존재한다는 취지를 단도직입적으로 밝히고 있다. 보살들의 모든 행원이 중생본위에서 실천되어지고 있음을 천명하여, 행여 중생과 부처를 분리하여 중생을 버리고 부처를 찾는 어리석음을 범할까봐 경계한 것이다. 삶을 도와주는 일이 수행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일이 바로 삶을 도와주는 일이다. 따라서 삶을 누리는 자에게 그 삶의 안락이 보장되도록 힘써 주는 것이야말로 ꡐ진선진미ꡑ한 일이다.

‘중생’이란 범어 ‘사뜨바(sattva)’를 번역한 말로 정식(情識)이 있는 생명체를 가리킨다. 진나라 때 구마라습 등은 ‘중생’이라 번역하였고, 당나라 때 현장 등은 유정(有情)이라 번역하였다. 아직도 구역이 많이 통용되어 중생이라는 말이 널리 쓰인다. 한역에서 ‘중생’의 의미를 3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많은 인연에 의해서 태어난다는 뜻이며, 둘째는 생이 거듭거듭 이어지므로 많은 생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셋째는 뭇 삶이라는 뜻으로 여럿이 함께 산다는 뜻이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이 중생이 누리는 삶, 그 속에 부처님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다시 말하면 부처는 중생 속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근본에 있어서 부처와 중생은 하나다. 『화엄경』에 서 마음과 부처 그리고 중생은 차별이 없다고 한다. 다만 스스로가 쓰고 있는 마음의 상태가 다를 뿐이다. 깨달아서 지혜로운 상태는 부처의 마음 상태요, 깨닫지 못하여 미혹한 상태는 중생의 마음 상태다. 미오의 상태가 다르지만 마음 그 자체는 같다는 것이다. 땅에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난다는 말처럼 마음이 미혹한 중생이 마음을 깨달아 부처가 된다.

바로 이점에서 관찰할 수 있듯이 중생이 중생이라서 위대한 것이 아니라, 중생이 부처의 위대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불성 때문에 중생이 위대한 것이다. 한 마리 벌레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 벌레에 내재되어 있는 불성의 공덕과 그 작용은 부처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으므로 위대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명이 부여된 모든 존재 자체는 그 속에 부처의 탁월성이 갖추어져 있으며 그 생명의 현발 자체가 부처의 공덕이므로 중생을 따르라는 것이다. 중생을 통하여 부처의 공덕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ꡐ나무가 뿌리에서 수분을 흡수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이, 중생의 뿌리에 대비의 물이 뿌려져야 부처의 꽃과 열매가 맺힌다ꡑ는 비유는 중생과 부처의 관계를 가장 아름답게 설명한 좋은 경우이다. 중생이 없으면 정각을 이룰 수 없다는 것도 중생을 부처보다 더 근본적인 위치에 두고 한 말이다. 즉, 모든 현상적 사실에 있어서 중생의 실태를 여법하게 파악하지 않고는 부처의 세계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또한 대비심으로써 중생을 보살펴주므로 여래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이라는 마지막 구절은 눈물겨운 말이다. 불교는 중생에 대한 대비의 윤리를 종교적 생명으로 삼는다. 중생에 대한 연민이 없는 깨달음이란 무용지물이며, 대비의 실천이 없는 사변적 이론은 한낱 메마른 철학적 사고에 불과하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6월 제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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